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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마고도의 옛 도시 쑤허의 사방청음 앞에서 춤 추는 나시족 여인들
ⓒ 최성수
몇 개의 산 능선을 넘은 차가 드디어 리지앙(麗江)에 도착한다. 따리를 떠난 지 네 시간 만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리지앙은 포근하다. 리지앙 도시를 멀찌감치 둘러싸고 있는 산 이름은 위룽쉐산(玉龍雪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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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에 왔을 때의 그 맑고 시리던 하늘과 눈부신 설산의 모습은,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구름 잔뜩 끼고 빗방울마저 촉촉하다. 설산을 보지 못해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비 오는 리지앙의 풍경을 보는 즐거움이 새롭기도 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먼저 저녁을 먹으러 벚꽃 마을(사쿠라) 카페로 간다. 리지앙에서 마음 놓고 식사를 할 곳은 어쩌면 이곳뿐인지도 모른다. 한국 음식에 일식에 중식, 서양 요리까지 안 되는 것이 없을 정도다.

<론리 플래닛>에 세계 5대 카페의 하나로 뽑혔다는 사쿠라 카페는 한국인 김명애씨와 그의 중국인 남편이 운영하는 음식점이다. 리지앙 고성의 중심인 사방가(四方街)를 마주하고 오른편 수로를 따라 조금 가면 그 카페가 있다. 지난 번 여행에서 여러 차례 들러 끼니를 해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 리지앙의 사쿠라 카페.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 수로를 보며 먹는 맥주 한 잔도 일품이다.
ⓒ 최성수
카페에 들어서자 사람들로 북적거려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다. 어둑한 불빛 아래 겨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된장찌개를 먹는다. 구수한 맛이 그만이다. 외국 여행을 온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어느 마을에서 저녁을 먹는 듯한 느낌이다.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김명애씨가 나를 보더니 웃으며 한마디 한다.

"전에도 오셨었지요?"

그 숱한 손님들 중에서 나를 기억하다니, 반갑고 고맙다. 그저 스쳐가며 인사를 하고 끝이었지만, 한 사람의 기억 속에 내가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저녁을 먹고 리지앙 고성 구경을 나선다. 빗줄기는 거세지다 약해지다를 반복한다. 우산을 펼쳐 들고 먼저 사방가로 간다. 비가 와서인지, 이 시간이면 한창일 사방가의 춤 판이 없다. 춤 판은 없지만, 사람들은 정말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많다. 겨울에 왔을 때는 적당한 인원이 고성 안을 물 흐르듯 다니고 있었는데, 여름 사방가는 홍수 같다. 이리저리 채이고 부딪치며 고성 이곳저곳을 거닌다.

▲ 쑤허. 뒤의 보산이 물에 비쳐 아름다운 곳, 차마고도의 옛 풍취가 그만이다.
ⓒ 최성수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리지앙 고성은 아름다운 곳이다. 영롱한 등불을 밝히며 어둠을 밀쳐내는 상가들이 있고, 그림처럼 곱고 다양한 문양의 동파문자 간판들이 있고, 숱한 세월 사람들의 발길에 닳고 달아 밤이면 눈부시기까지 한 바닥돌이 있는 리지앙 고성에서는 저절로 마음이 아늑해진다.

나는 일부러 꼬불꼬불한 고성 뒷골목을 걸어, 지난 여행 때 묵었던 청년여사(靑年旅舍)를 찾아가 본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 어둑한 골목 안쪽에 그 집은 그대로 웅크리고 있다. 나는 비 내리는 리지앙 뒷골목에서 한동안 그 집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마치 <그 집 앞>에 온 소년처럼. 마음 속에 간직한 첫 사랑의 그 사람을 찾아 온 소년처럼 나는 빗줄기 속에서 지난 여행을 떠올린다. 그것은 내 마음이 리지앙이라는 도시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여행이 낯선 곳에 대한 사랑이라면, 그 사랑 속에도 여러 층위가 있으리라. 어떤 곳의 여행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같은 기억으로 남고, 어떤 곳으로의 여행은 늘 잊지 못하고 마음의 갈피에 기억해 두고 싶은 첫사랑으로 남는 법이다. 리지앙과의 첫 만남이 내게 첫사랑의 기억과 같은 것은 리지앙이 그만큼 내 마음과 맞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새벽 잠결에 골목길을 울리며 지나가던 리지앙 고성 뒷골목의 수레바퀴 소리와 어느 곳에서나 울리던 '후루스'라는 악기의 경쾌하면서도 서글픈 소리, 나시족 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나가던 나시 청년의 경쾌한 발걸음과 아, 그리고 리지앙에서 만난 숱한 풍경과 시간들을.

▲ 창 너머로 수를 놓는 쑤허 옛 마을의 아가씨. 그 창틀에 세월이 칭칭 동여 있는 것 같다.
ⓒ 최성수
그래서 나는 리지앙을, 그 리지앙에 처음 발 디디고 묵었던 이 숙소를 첫사랑처럼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가끔씩 그 집 앞 찾아가 보네
사람은 간 곳 없고
돌담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잡초들만 여전한 그 집
열 여섯 이슬 같은 나이 때
마음 흔들리게 했던 첫사랑
가끔씩 돌아가 보네
잊혀진 세월의 어느 갈피에
가슴 뛰는 그 날 남아 있는지
나 가끔씩 그 집 앞에서
세상 모르고 살던 시절
아릿한 그리움 속으로 돌아가 보네
사람은 없고
사랑도 식어 버린
그 집 앞

- 졸시 <그 집 앞>


따리가 어릴 때 떠나온 고향 같은 도시라면, 리지앙은 첫사랑 같은 도시다. 리지앙 그 숱한 골목은, 마음 속 깊이 감추어 두고 곰씹고 곰씹어 이제는 아예 삭아 버린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릴 만큼 아련하다.

이튿날, 먼저 쑤허(束河)를 찾는다. 쑤허는 리지앙의 고성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4km 밖에 위치하고 있는 나시족의 옛 마을이다. 리지앙 고성이 관광객의 홍수 속에 상업화되었다면, 쑤허는 아직도 옛 나시의 문화 풍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나시 문화를 보다 원형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 쑤허도 홍콩의 자본가가 사들여 새로 개발을 하는 바람에 옛 마을은 그저 개발된 마을의 뒤쪽에, 마치 세상에서 밀려난 늙은이처럼 놓여 있다.

▲ 쑤허의 옛 마을에 흐르고 있는 수로. 물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 마음 한없이 편안해진다.
ⓒ 최성수
그러나 쑤허는 이 옛 마을이 가장 아름답다. 일부러 깨끗하게 새로 짓고 꾸민 앞쪽 마을도 그런 대로 운치가 있기는 하지만, 그 뒤쪽의 옛 마을에 가면 고운 꽃 만발한 아기자기한 정원도 있고,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집도 있다. 또 길을 따라 졸졸 흐르는 수로의 속삼임이 귓가를 간질이기도 하고, 대대로 세월 속에 자신의 핏줄을 묻으며 살아온 나시족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다. 그도 저도 다 싫으면, 그냥 하릴없이 골목에서 파는 홍당무를 사 씹으며 스적스적 걸어 다니기만 해도 좋다.

이곳 쑤허는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차마고도는 차엽지로(茶葉之路)라고도 하는데, 기원 7세기 경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길은 운남에서 시작해서 티벳, 네팔, 인도를 거쳐 아프카니스탄까지 이어진다. 그 사이 금사강(金沙江), 노강(怒江), 난창강(瀾滄江)을 지나는 험하디 험한 길이다. 주요 교역품은 야크 털 담요, 차, 도자기, 한약재 등이었다고 하는데, 그 험한 히말라야의 산길을 넘었을 옛 사람들에게 이 쑤허는 잠시 들러 쉬며 아득한 여행길의 고달픔을 씻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옛날을 생각하며 호수에 비친 보산(宝山)의 아름다움에 빠져보기도 하고, 낡은 창틀 너머 수를 놓는 나시의 아가씨를 흘낏 훔쳐 보기도 하는 나그네의 마음은 이 쑤허에서 또 다른 시간 여행자가 된다.

▲ 백사촌의 백사 벽화. 불교와 도교, 티벳 불교의 영행이 벽화에 남아 있다.
ⓒ 신병철
쑤허에서 나와 지난 여행에 들렀던 백사 벽화와 동파 신원을 구경한다. 백사마을의 백사 벽화는 지난번과 다름이 없는데, 입장료만 오르고, 특별한 변화는 없다. 보아도 그만, 안 보아도 그만인 셈이다. 동파신원은 그새 새로 단장을 했는지, 전에는 천막에 동파교의 창세 신화를 그려놓았었는데, 이제는 바닥 돌에 새겨 놓았다.

헤이룽탄(黑龍潭) 공원에 들렀다가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입장료가 배나 더 오른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빨리 비싸지는 것이 입장료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겨울에 왔을 때는 이 공원에서 옥룡설산의 눈 덮인 모습과 그 산이 공원의 맑디맑은 물에 비친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는데, 물은 흙탕물에 가깝고, 설산은 안개에 가려 자취조차 없다.

너무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고성과 설산도 보이지 않는 흑룡담 공원의 풍경을 아쉬워하며 돌아와 쉬다, 밤 늦은 시간에 숙소 앞의 식당 시앙빠라오로 간다.

▲ 설산이 보이지 않아 아쉬운 여름의 흑룡담 공원
ⓒ 최성수
▲ 몇 해 전 찾았던 흑룡담 공원. 설산의 모습이 물에 비쳐 눈부시다. 리지앙 여행은 여름도 좋지만, 겨울이 더 좋다.
ⓒ 최성수
리지앙 북문 밖 식당 시앙빠라오의 그 부부를 만난 것은, 리지앙에 도착한 첫 날 밤, 늦도록 리지앙 고성의 골목골목을 마치 첫 사랑의 그 집 앞처럼 헤매고 다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서였다.

오랜 만에 다시 찾은 리지앙의 기억을 한 잔 술로 풀어보기 위해 들른 식당에 첫사랑의 기억 같은 부부가 꼬치구이를 팔고 있었다. 간판은 향파로(乡巴佬). 좁고 허름한 식당 안에는 촉수 낯은 불빛이 어두컴컴하게 켜져 있었다. 마치 기억 속의 어느 날로 나를 끌고 가듯이.

초등학교 아이들이 앉기에 적당할 정도로 낮은 의자와 그 높이에 맞게 역시 낮은 식탁이 마치 수십 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놓여 있었는데, 막 문을 닫으려는지 주인 사내는 바닥을 깨끗이 물청소 하고 있었다.

"맥주 있어요?"
"예."
"차가운 맥주요."
"있어요."

아마 그것이 우리가 처음 나눈 대화였을 것이다.

그날 자정이 훨씬 넘도록, 나와 우리 일행은 시앙빠라오에서 열 병 가까운 맥주와 수십 개의 꼬치구이를 먹었다. 웃고 떠들며 마치 어린 날 떠났던 고향 집에 찾아간 나이 든 사람들처럼, 조금씩은 낯설어 하며, 또 많이는 푸근해 하며, 우리들은 추억에 젖은 사람이 되었다. 식당 이름(아마 '고향 동파의 사내'쯤 되리라)처럼, 오래 타향에서 떠돌다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이 흐릿한 호롱불 아래서 옛 친구를 만나 즐거움을 나누듯, 그렇게 우리들은 조금씩 취해갔다.

빗줄기 속에 숙소로 들어와 든 잠, 리지앙의 오래 된 시간이 흘러내리듯, 그렇게 비는 밤새 내 꿈을 적시고 있었다.

▲ 시앙빠라오의 가게 앞에 선 신혼부부 장씨네. 사진을 찍자고 하니 웃던 얼굴이 조금 경직된다. 옛날 사진이 귀하던 시절의 내가 그랬듯이.
ⓒ 최성수
그리고 리지앙에 있던 사흘 내내, 나는 밤이면 시앙빠라오를 찾았다. 아침이면 일어나 리지앙 이곳저곳을 떠돌고, 저녁이면 제 둥지에 찾아드는 새들처럼 시앙빠라오에 가 맥주잔에 꼬치구이를 먹었다.

그리고 그 사흘 내내 비가 내렸다. 사흘째 밤, 역시 늦은 시간에 들른 시앙빠라오의 라오반(사장)인 남편이 반가운 얼굴이다. 어제, 그제 이틀이나 만났으니, 이미 구면이 된 때문일 것이다. 웃으며 탁자를 붙여 주고, 바닥을 쓸어 주며 그는 우선 맥주부터 내온다. 목을 축이고, 돼지고기, 쇠고기, 부추, 삭힌 두부, 양고기 따위의 꼬치구이를 시킨다. 그의 순하고 착해 보이는 아내가 연기를 맡으며 꼬치를 굽고, 그는 이것저것 반찬을 챙겨 준다.

그리고는 서툰 중국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한국 사람이다. 반갑다. 언제 리지앙에 왔냐? 그제. 오늘은 어디 갔다 왔냐? 쑤허, 백사촌, 헤이룽탄 공원. 어제는 모우평. 어떻더냐? 좋더라. 그런 간단한 이야기 끝에 그는 뭐라고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수첩을 꺼내 놓고 써달라니, 그가 한 말은 시창(西昌)을 가 본 적이 있느냐는 말이다. 시창이 뭐냐니까 자기 고향이란다.

시창은 운남과 경계 지역인 사천성에 있는 작은 마을이란다. 그는 그 고향 마을에서 지금의 아내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생업을 위해 이곳 리지앙에 와 자리를 잡았단다. 식당을 연 지 겨우 3개월, 장사가 잘 되냐니까 괜찮다며 웃는 그의 얼굴에 소년다운 수줍음이 가득하다. 27살의 지앙 용 타오(蔣勇濤)는 아내와 세 살 차이. 한 달에 300원의 월세를 내고 이 식당을 열었다며 환하게 웃는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해 보인다.

내가 내 아내를 가리키며, 우리 부부도 세 살 차이라고 하자 내 나이를 묻고, 아내의 나이를 묻더니, 당신 아내가 나이보다도 훨씬 젊어 보인다며 또 수줍게 웃는다. 임신 3개월이라는 그의 아내도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다. 그 젊은 부부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서로 술잔을 권하고, 취하도록 이야기를 나눈 끝에, 시앙빠라오의 라오반 지앙은 내일의 일정을 묻는다.

"음, 내일 우리는 샹그리라로 떠난다."
"그럼 언제 다시 리지앙으로 돌아오니?"
"아니, 우리는 샹그리라에서 비행기로 쿤밍으로 간다. 이곳에 다시 오지 않을 거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섭섭함이 가득하다. 내일 아침 식사는 어디서 먹을 거냐고 묻기에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하자, 그가 어두운 얼굴을 풀고 반색을 한다. 자기 집에서 사천 음식을 먹게 해 주겠다는 거다. 어차피 거리식으로 쌀국수에 만두(속이 없는 빵), 찐 계란으로 때울 생각이었던 우리는 고맙다며 내일 아침에 꼭 들리겠다고 하고 그 부부와 헤어진다.

다음 날, 우리는 그 식당에서 사천식의 조반으로 포식을 한다. 계란찜과 감자 부침이 특히 그날의 기억에 남는 아침이었다. 사천 음식이 우리 입맛과 가장 비슷하다던 말을 실감하는 아침 식사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손을 흔들며 그 부부와 헤어졌다. 우리 일행은, 장사가 잘 되고 아이 순산하라는 축복의 말을 전해 주며, 그곳을 떠났다. 그는 우리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게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 못할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그렇게 서로 바라보며 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 꼬치구이를 구워 파는 장씨 부부. 이 집에 앉으면 낮은 의자에 탁자, 흐린 불빛에 우리 모두 기억 속의 어느 날로 돌아가는 것 같다.
ⓒ 최성수
서울로 돌아와 여전한 무더위를 견디며, 일상에 지치고 힘들 때면 나는 가끔 리지앙의 그 시앙빠라오 식당 부부를 생각한다. 선한 눈빛과 수줍은 웃음으로 사람을 대하던 그 부부, 한 달에 삼백 위안의 월세나 제대로 내고 있을까, 그 순한 품성으로 상업화된 리지앙의 거리에서 제대로 살아 낼 수나 있을까 하는 아련한 걱정을 말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이름자 그대로(勇濤) 세상의 거친 파도를 용기 있게 견뎌 낼 거라는 믿음도 갖는다.

이제 나는 리지앙을 생각하면 고성보다도, 동파문자보다도 먼저 시앙빠라오의 그 부부를 떠올린다. 그것은 어린 왕자의 말처럼, 그와 나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맺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행은, 다시는 더 만날 수 없는 사람이나 사물이라도, 이런 관계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주는 경험이라고 믿는다.

아, 그리운 리지앙이여. 어색한 표정으로 포즈를 잡아주던 시앙빠라오의 젊은 부부여. 생은 얼마나 깊고 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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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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