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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전태일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와 <오마이뉴스>는 7월 21일부터 <전태일 거리, 시민의 힘으로 만들자>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오는 9월 15일까지 진행될 이번 행사 기간 동안 고 전태일 열사에 대한 릴레이 기고 및 인터뷰 등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일곱번째로 '그날이 오면'의 작곡ㆍ작사가인 문승현 전남대 교수의 기고글을 싣습니다. <편집자주>

 



청계피복노조의 노동자 기타반을 운영한 것, '그날이 오면'이라는 노래. 겉만 보면 내가 전태일과 맺은 인연은 그것이 다다.

그러나 나는, 내 인생의 가장 높고 푸른 하늘을 그에게서 보았다. 지금껏 내 속에 남아있는….

▲ 동료들과 함께한 전태일 열사(뒷줄 가운데).
ⓒ 전태일기념사업회
1986년인가? 아니면 85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성문밖교회, 도시산업선교회라고 불렀던 곳.

그곳에 서울대 노래동아리 메아리의 후배, 지금은 경기문화재단의 문화예술대학 학장이 된 김보성이 김영인이라는 가명으로 노동자 기타반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가 공연을 요청해왔다.

'노동자를 상대로 공연을 한다….' 모험이고 기대였다.

고려대 연극회 출신으로 노래동아리 노래얼을 창단한 사람, 지금은 김보성과 함께 경기문화재단에서 일하고 있는 당시 나의 가장 가까운 동지이자 선배 표신중과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그 때 '노래모임 새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라는 문화단체에 소속된 전업적인 노래활동가들의 모임. 가수도 작곡가도 아니고 활동가라는 이름이 더 격에 맞고 영광스럽게 느껴지던 시절.

망원동 세 평짜리 차고. 늦겨울이었나? 아니면 초봄? 한기 때문에 갖다놓은, 냄새나는 석유난로가 기억난다. 냄새나는 담요가 그 옆에 있었을 것이다. 컵라면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고 조영래 변호사의 명작. 그 걸 재료로 표신중은 대본을 짰고 나는 주제곡을 만들고 있었다.

제목은 '불꽃'으로 하자. 책의 내레이션이 좋고 시간도 별로 없으니 공연도 내레이션으로 끌고 가다가 중간중간 노래를 삽입하자. 그 게 당시, 전업적이긴 하나 두말없이 아마추어였던 우리들의 공연구성방식이었다. 사람들은 그걸 노래'극'이라고 불렀다. 어쨌거나 이야기가 있으니까.

예술이 되는지 안되는지는 별로 중요치 않았던 시대. 난 그런 풍조가 늘 마음에 걸렸다. 음악의 완성도는 늘 내 중요한 가치였다. 나는 책이 뿜어내는 향취와 이미지를 음악으로 고스란히 옮겨놔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많은 내용을 그 짧은 가사로? 음악으로? 과연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전태일은, 그 '어느 청년 노동자'는, 그의 '삶과 죽음'은 너무 크고 무겁고 눈부셨으니까.

그렇게 해서, 일곱밤을 새웠다.

원래 가사.

'한 밤의 꿈은 아니리 / 오랜 고통 다한 후에 /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빛나는 눈물들 / 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짧은 추억도 / 아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빛나는 눈물들'을 '뜨거운 눈물들'로, '짧은 추억'을 '아픈 추억'으로 누군가 바꿔놓았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가(혹은 그들이) 원망스럽다. 노래이미지가 약간 망가졌으니까. 무게+넓이+눈부심의 이미지에 꼭 필요한 요소들이었는데.

노래말에는 노동ㆍ해방ㆍ투쟁 등의 용어가 필요치 않았다. 전혀.

숭고한 아름다움. 내 젊은 날의 유일한 신앙은 그것이었던 것 같다.

전태일이 그것을 내게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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