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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우리는 역사를 사실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그 사실의 기록이라는 역사를 연구하는 자를 역사학자라 하고, 그들이 연구하는 학문을 역사학이라 한다.

우리는 단군 이래 4천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면 떳떳하게 내놓고 자랑할 만한 역사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한 것도 있다. 자랑할 만한 것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축소되고 묻혀지고 왜곡된 채 사라져갔다.

우리는 학교에 들어가 역사라는 것을 배우면서 수많은 역사의 승자와 패자를 만나왔다. 우리가 배운 역사적 결론 대부분은 승자는 선(善)이고 패자는 불선(不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였다. 그러한 역사를 절대 진리인양 믿고 어떤 의심도 없이 좋은 시험 점수를 얻기 위해 달달 외워왔다.

▲ <패자의 역사> 책 표지. 구본창 저
ⓒ 김현
그러나 역사란 진정 그런 걸까? 동일한 사건, 사물이라도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의 평가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느 하나의 사료에 의한 절대적 관점이 아니라 상대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봐야 함을 저자는 <패자의 역사>를 통해 낱낱이 밝히고 있다. 따라서 역사를 바라볼 때 '기득권층의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민중의 시각에서 바라볼 것인가?'는 전혀 다른 역사적 평가를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학은 박물관을 박차고 거리로 나와야

그동안 우리의 역사는 사료 중심의 역사만을 믿어왔고, 주류의 시각으로 바라본 역사만을 배워왔다. 여기에 이병도를 위시한 친일사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식민사관이 남아있는 역사를 배워왔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저자는 그 오류를 말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구본창의 <패자의 역사>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믿고 있던 역사적 사건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역사의 중심 소재는 추상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 즉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되어야 한다. …… 과거를 통해 현재를 정확히 진단하고, 그럼으로써 미래를 예측하는 역사! 민중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그럼으로써 민중의 당면한 고통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 역사! 이러한 역사가 되려면 먼저 박물관에 박제되고 독수리마냥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는 역사학이 거리로 나와야 한다. 민중이 아파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거리로…."

정복 군주 의자왕은 삼천 궁녀를 두지 않았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의자왕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삼천 궁녀이고, 궁녀들이 적군에게 치욕을 당하기 싫어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이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배운 의자왕에 대한 지식은 너무도 단순하다. 의자왕은 궁에 삼천 궁녀를 두어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다. 또한 성충 같은 충신을 죽이고 백성을 보살피지 않았다. 그로인해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패해 나라를 잃게 되었다.

초롱초롱한 어린 눈망울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한 치의 의심도 받아들였다. 그것은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그럴까? 저자는 이러한 사실들은 왜곡되고 당시 지배계층들에 의해 꾸며진 허구라고 단호히 말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의 상징인 삼천 궁녀는 존재하지 않았던, 말 그대로 전혀 사실과 다르게 왜곡된 허구일 뿐이다."

저자는 책에서 삼천 궁녀의 존재가 허구라는 근거를 조목조목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의자왕은 무능하지도 않았고, 재임 20년 동안 신라에 10번이나 대규모의 정벌을 시도했던 정복 군주였고, 당시 백제는 강대국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패해 항복하고 당나라로 끌려갈 때 백제 유민들은 의자왕을 붙들고 통곡하며 위로했다 한다. 그리고 당나라로 끌려간 왕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불렀다 한다. 사치와 방탕을 일삼으며 백성을 돌보지 않아 나라를 망하게 한 임금이라면 백성들이 그렇게 할까. 임진왜란 때 무능하기 짝이 없던 선조가 궁을 버리고 도망칠 때 백성들이 어떻게 했는가를 생각하면 의자왕은 지금까지 잘못 전해진 사실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백제의 멸망 원인은 무엇인가? 저자는 멸망 원인을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적 요인에서 찾고 있다.

"그럼 700년 제국 백제가 멸망하게 된 원인은 무인가? 그것은 의자왕의 통치 속에 부강했던 백제도, 세계 최강인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치면, 세계 어느 부강한 나라도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이길 수는 없다고 보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세계 최강인 당과 대립노선을 취한 의자왕의 선택이 백제 멸망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그러면서 저자는 백제의 멸망의 원인을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 그리고 그에 따른 내분에 초점을 맞추어져 온 이유를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백성들의 눈에 비친 신돈은 미륵불이었다.

구름이 무심(無心)탄 말이 아마도 허랑(虛浪)하다.
중천(中天)에 떠 이셔 임으로 단니면서
구테야 광명(光明)한 날빛을 따라가며 덥나니.

-이존오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자주 접하는 것으로 '간신 신돈의 횡포를 풍자'한 작품이라고 배운 시조이다. 이 시조를 보면 당시 기득권을 가진 지배계층에게 신돈이 어떻게 비춰졌는지 단적으로 나타난다. 그들에게 신돈은 요승이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는 간신이었다. 그렇다면 신돈은 백성들에게도 간신으로 비춰졌을까?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공민왕의 대리인이 되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귀족들이 불법적으로 취득한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려는 혁명적 조치를 취한 신돈은 백성들에게 요승도 아니고 간신도 아닌 미륵불이었다.

"신돈은 고려의 농민들에게 노비들에게선 '성인(聖人)'으로 추앙받았으나, 귀족을 비롯한 기득권층로부터는 '요승(妖僧)'으로 비판받으며 증오의 대상이 되었었다. 이렇듯 동일한 시기, 동일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신돈 만큼 극단적으로 상반된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뿐만 아니라 불과 몇 년 만에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서 가장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인물이 바로 신돈이었다. 그의 일생은 한 마디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결국 역사를 누구의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신돈은 '요승'도 되고 '성인'도 된다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신돈은 고려 백성들에겐 백성의 편에 섰던 개혁의 영웅이었지만, 기득권층의 정치 공작에 의해 희생된 비운의 개혁가라고 말하고 있다. 이 밖에도 저자는 정여립이나 광해군 등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역사가 승자에 의해 왜곡된 채 사실처럼 전해진다고 말하고 있다.

후세 사람들은 앞선 역사를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조건 절대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역사는 누구의 입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구본창의 <패자의 역사>는 우리가 역사를 새롭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역사는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역사는 반복되고 강물처럼 흘러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이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패자의 역사

구본창 지음, 채륜(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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