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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55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 각인된 맥아더의 이미지 또한 퇴색은 됐지만, 여전히 대중들 사이에 왜곡된 채로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가 즐겨 쓰던 모양의 선글라스가 여전히 ‘맥아더 선글라스’로 불리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해 보인다.

더글러스 맥아더, 그는 “미국이 낳은 천재적 군인”, “인천의 영웅”, “태평양의 시저” 등으로 선전됐지만,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친 미국의 국가전략인 아시아 태평양 지역 침략의 첨병이었다. 전쟁 초기 총사령관이던 맥아더가 지휘한 한국전쟁에는 널리 알려진 대로 베트남 전에서 악명을 떨쳤던 네이팜탄과 소이탄이 인구밀집지역에 퍼부어졌으며 심지어는 반인륜적인 생물무기가 북한 주요지역에 대량 살포되기도 했다. 이는 2차대전 직후 일본 점령군 사령관이던 맥아더가 이끄는 사령부가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만주731부대 이시이 시로 등 전범들을 면책하는 대신 731부대의 ‘노하우’를 고스란히 전수받은 검은 거래의 공이라 할 만하다.(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일급비밀! 미국의 세균전’, 2000년 7월2일 방송)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의 핵에 대한 집착을 빼놓을 수 없다. 한반도를 핵참화로 몰고 가고자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의 집념은 ‘천재’,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쟁 초기 “한 손을 등에 묶어놓고도 승리할 수 있다”고 호언하던 그는 전쟁 개시 2주 만인 1950년 7월9일 미 합동참모본부에 ‘원자폭탄 사용권을 달라’고 재촉하는 긴급전문을 보낸다.(브루스 커밍스 저 <김정일 코드> 84쪽, 2005년, 따뜻한 손)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미 8군의 핵심인 24사단이 대전에서 격파되면서 윌리엄 딘 사단장까지 북한인민군에 생포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부산일대로 포위당한 미국은 핵투하를 구체적으로 검토했다.

맥아더의 핵사용 추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에도 불구 한미연합군이 북한인민군의 주력부대를 잡지 못하자 그는 또 다시 핵사용 계획에 매달린다. 북한 중북부 산악지역까지 진입한 미군은 청천강전투에서의 참패를 시작으로 북한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반격과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한파에 밀려 미국 역사상 ‘가장 길고도 치욕스런’ 후퇴를 하게 된다. 맥아더는 미 합동참모본부에 다시 급보를 보내는데 그 내용은 “북한군이나 중공군 부대뿐만 아니라 북중 국경에 30내지 50개의 원폭을 투하해 코발트 방사능 오염지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위 방송 ‘맥아더와 한국전쟁- 2부 또 하나의 전쟁’, 2003년 5월18일 방송) 코발트 폭탄에 포함된 ‘코발트60’은 방사능이 라듐의 320배에 달하며 반감기는 90년으로 핵폭탄 물질 가운데 “가장 무서운 구성물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의 핵에 대한 집착은 끝이 없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인 10월15일 태평양 웨이크섬에서 트루먼 대통령과 회동한 맥아더는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트루먼과는 오랜 불화로 불편한 사이였지만 전황으로 매우 들뜬 분위기에서 ‘한반도의 재건과 통일’에 대한 계획을 함께 수립하기도 했다. 1950년 안에 전쟁을 끝내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내자던 그의 ‘홈 바이 크리스마스 작전’이 물거품이 되자 맥아더는 그해 12월9일 한반도 전역에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는 사령관 재량권을 요구한다. 그는 크리스마스 전날 21개의 제거목표물에 26개의 원자탄을 요청했는데 여기에 “침략군”에 투하할 원폭4개와 “적공군의 핵심밀집지역” 파괴용 원폭 4개를 추가했다.(위 책 86쪽)

전쟁 내내 맥아더는 ‘10일 만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섬뜩하다. 30에서 50개의 원폭을 투하해 “만주의 목을 끊”고 압록강에 “장제스(장개석)가 이끄는 50만 국민당군을 투입”시킨 뒤 북한 중북부지역에 “동해에서 서해에 걸쳐 방사능을 내뿜는 코발트 폭탄을 살포”하는 것이 그 골자이다.(위 책 86쪽) 맥아더는 코발트의 최소 효력이 60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00톤급 코발트 수소폭탄을 단 한 방으로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를 멸종시킬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맥아더는 그 뒤로도 1951년 3월10일 우세한 제공권 확보를 위해 ‘디데이 원폭수행능력’을 요구하는 등 전황이 불리할 때마다 수시로 핵사용 요청과 병력증강을 요구하며 호전광의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맥아더는 결국 오랜 대립으로 인한 잦은 불화로 트루먼에 의해 해임된다. 트루먼 정권은 핵사용에 있어 소련을 의식했으며 3차대전으로 비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와 영국 등 동맹국들의 만류 또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핵폭격으로 전쟁이 확대되면 미국은 더 많은 병력을 한반도와 그 주변에 투입해야 하는 부담으로 유럽 전선이 약화될 것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임 당시부터 맥아더는 이런 트루먼을 향해 “겁쟁이”라고 분노를 여과 없이 표출하며 대통령에 도전하는 모습을 연출하곤 했는데 이 또한 그의 해임을 앞당겼다. 하지만 미국이 한국전쟁 기간 핵을 결국 사용하지 못한 데는 “어마어마한 수의 적군을 적시에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는 기술적인 이유(위 책 91쪽) 또한 크게 작용했으며 본질적으로는 미 정권은 핵을 사용할 경우 보다 ‘믿을 수 있는’ 사령관이 핵공격을 수행하길 원했던 것이다.

1951년 4월10일과 11일 트루먼이 맥아더 해임안과 한반도 원폭사용안에 거의 동시에 서명한 것이 이를 증명하는데 이 원폭사용안에 대한 핵무기 통제권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투하를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 당시 전략공군사령관에게 주어졌다.(위 방송) 맥아더를 해임시킨 그 날, 핵무기가 태평양 너머로 공수돼 한국전장을 위해 배치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트루먼 정권의 호전성도 맥아더의 그것과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맥아더는 트루먼 정권의 휴전협상 시작에도 영향을 미친다. 1951년, 불리해진 전황에 트루먼이 휴전협상을 시작할 움직임을 보이자 맥아더는 일본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평화계획’을 발표하는데 ‘평화’라는 이름이 붙은 ‘한국통일을 위한 전쟁확대 계획’이었다. 이는 트루먼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었고 결국 트루먼의 휴전제안은 당분간 영향을 받았다. 해임 이후에도 맥아더는 미 전역을 돌며 당시 매카시즘으로 타오르던 마녀사냥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고 다니며 트루먼 정권의 발목을 잡았다.

해임 후 귀국한 맥아더가 미국 내에서 영웅대접을 받았다고 묘사되기도 하지만 미국 내 전체여론은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임 한 달여 뒤인 5월3일부터 6월25일까지 미 상원에서 열린 맥아더 청문회는 미국 내 여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데이비드 리즈는 그의 저서 <코리아: 제한전쟁>에서 청문회가 여론이 “맥아더가 승리를 거두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고 “전쟁을 가능한 한 빨리 종결시키는 것이 국가적 희망사항”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고 설명한다.(김명철 저 <김정일의 한의 핵전략> 21쪽, 2005년, 동북아)

일본 점령군 사령관 시절부터 공개적으로 대권도전의사를 밝혀왔던 맥아더는 팽배한 반전여론에 “한국전쟁의 명예로운 조기종결”을 주요공약으로 내건, 1930년대 자신의 보좌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밀려 미 대선 공화당 후보자리조차 얻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당시 72세의 맥아더는 끝까지 한반도 핵사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에게 장문의 비밀메모를 건네는 데 한국전장에 원폭을 대량투하해 보급로와 통신망을 초토화하고 방사능 폐기물을 이용한 오염지대를 만들라는 제안이었다. 노년의 집념이 꽤나 끈질겼다. 아이젠하워는 후에 맥아더의 이 제안을 신중히 고려했다고 밝힌 바 있다.(위 방송)

맥아더는 결국 한국전쟁의 벽을 넘지 못했고,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트루먼에 이어 아이젠하워도 당선 이전 ‘핵사용 반대’ 입장을 뒤집고 노골적인 핵위협에 나섰지만 결국 미국 또한 한국전쟁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한반도를 핵참화로 몰아가기 위해 몸부림쳤던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그는 남북전쟁 때 지원병으로 참전, 혁혁한 전공으로 20세에 연대장이 된 아더 맥아더(1845-1912)의 아들이다. 아더 맥아더는 그 후 인디언과의 전투에서 활약하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준장이 되어 필리핀 사령부에 배치됐으며 육군소장으로 승진, 1900년부터는 필리핀 제8군 사령관 및 군정장관으로 활동하다 육군 중장으로 1909년 퇴역한 인물이다.

1903년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해 1930년 대장으로 승진, 1941년 미국 극동군사령관으로 필리핀에서 근무했으며, 1945년 8월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된 더글러스 맥아더와 아더 맥아더의 삶의 궤적은 미 제국주의 침략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선글라스와 함께 그가 즐겨 쓰던 모자는 미군이 아닌 필리핀군 모자로 알려지고 있다. 필리핀 사령관으로도 ‘활약’했던 아버지는 그의 우상이었다. 대를 이은 ‘침략’ 혈통을 타고난 더글러스 맥아더의 자취는 이승만이 하야하던 날 맥아더 동상에 ‘인천의 영웅’이라는 문구와 함께 꽃다발이 걸렸다던 1960년보다는 많이 퇴색했지만,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고도 전쟁발발 55돌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한국사회는 아직 이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전쟁을 끝내지 못해서 일까.

55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맥아더가 그토록 부르짖던 핵과 함께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무장한 북한이 미 세계지배의 한 축인 미국의 핵우산에 파열구를 내고 있다. ‘죽지 않는다던’ 노병은 죽었다. 하지만 그의 잔재는 미 제국주의와 함께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아직은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인터넷 자주민보(www.jajuminbo.net)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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