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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처럼 발발원인이 다양하고 복잡한 전쟁도 없을 것이다. 오늘까지도 북한의 언론은 한국전쟁을 북침으로 고집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냉전주의자의 시각은 김일성의 야욕으로 빚어진 남침전쟁으로 단순화시키고 있다.

이들 냉전주의자의 중대한 오류는 김일성의 남한점령의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55년이 되어가지만 한국전쟁발발원인이 다양하고 분분한 것은 이 전쟁을 해석하는 남과 북의 현격한 인식차이 때문인 것이다.

북쪽에선 여전히 북침설을 주장하지만 그동안 드러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북침설은 신빙설이 없다. 도리어 철저하게 전쟁준비를 한 북한군이 일거에 남측방어선을 제압하고 노도와 같이 남반부를 휩쓸었음이 북한이 부인하는 상황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전쟁발발의 원인에 대해서도 학자마다 전문가마다 주장이 서로 다르다.

혹자는 미군철수와 때를 같이한 애치슨라인으로 야기된 군력불균형으로 남침이 유발됐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시도 때도 없는 이승만의 북진통일천명에 대한 북한의 선제공격이라고 주장한다. 어느 전문가는 김일성의 남침을 쾌도난마(快刀亂麻)라고 표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남침 전 북한의 정치적 분위기는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첫째가 이승만의 북진통일설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감지한 북한군사지도부들은 김일성에게 모종의 응징을 바랐다는 것.

당시 인민군지도부 중 상당수가 팔로군에서 항일유격전에 가담했던 역전의 용사들이거나 소만(小滿)국경에서 항일 유격전선에서 활약하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중국공산혁명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그 여세를 몰아 남한까지 해방시켜야 된다는 혁명열기로 가득해 있었다는 것.

박헌영이 이끄는 남로당에 대한 한국정부의 토벌작전이 본격화되면서 지리산 일대의 친북세력이 상당수가 괴멸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을 뿐 아니라 대구민중항쟁사건과 여순사건 제주의 4.3 민중항쟁 등 남한 도처에서 벌어지는 반미(反美)투쟁 역시 북한의 혁명주의자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해방정국에서 정치적기반이 확고하지 못했던 김일성은 이승만의 북진통일의지나 북한내부의 호전적 분위기 모두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자칫 미적거리면 내부의 정치적 도전에 직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김일성에게 전쟁을 시작할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미군철수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외교관들은 미군주둔을 권고했으나 장군들은 미군철수를 원했다.

미국무성은 극동국의 윌튼 버트워드를 통해서 1949년 중국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했으므로 한국은 새로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남한을 장악하려는 북한을 중국이 도울 수 있게 되었다는 분석이었다. 그리고 그는 소련은 새로 탄생한 대한민국정부를 파괴하기 위하여 가장 빠른 시기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음이 점점분명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육군성 차관 월리엄 드레이프 2세는 “군사적인 견지에서 보면 남한은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다. 이 곳에 미군을 남겨두면 분명히 문제가 일어난다. 더구나 1949년 이후 육군성은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키는데 필요한 예산조차 배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국가안보회의와 트루먼은 한 달 동안 조사를 한 뒤에 한국 내에 미군주둔을 반대하는 미군부의 견해에 찬성한다. 이에 따라 1949년 6월 30일이 미군철수의 마감기일로 잡힌 것이다. 무초대사로부터 이를 전해들은 이승만은 워싱턴이 할 수 있는 원조보다 훨씬 많은 무기를 요구하면서 철수문제를 이용하려했다.

이승만은 30대의 P 51 전투기와 12대의 B-25 폭격기, 2척의 호위구축함과 2척의 잠수함, 그리고 5정의 소해정과 다목적 수송비행선을 원했다. 그러며 2개 전투기 편대와 1개의 폭격기 편대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은 최신예무기로 무장한 5만 명 이상의 예비군과 10만 명 이상의 군인을 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모든 이승만의 요구를 거절해버렸다.

1949년 6월 30일 소수의 미군고문관들과 신병보호병만 남기고 미군은 중요 군사장비와 함께 철수해버린다. 미군이 한국군에게 인계한 무기는 10만정의 소총과 5천만발의 소형화기탄약과 2천문의 로켓포, 4만대의 차량, 105미리 이하의 경포와 박격포 등이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의 날에 가장 유용하게 사용될 탱크와 비행기와 중형군함은 남겨두지 않았다.

이에 대해 북한군의 전쟁준비는 강화된다. 1949년과 1950년 초 한 달 사이에 스탈린은 3000명의 소련군장교와 사병을 북한군에 배치시켜 북한군을 지도하게 만든다.(한국군에 배치된 미군고문관은 500명 정도) 인민군 사단마다 15명의 소련군이 배치되었다. 소련은 중형탱크와 중포, 자동소총과 180대의 항공기를 인민군에게 제공했다.

1950년 봄 미정보기관이 탐지한 북한군의 병력은 13만5000명 정도였다. 이에 비해 남한군의 병력은 6만4697명에 불과했다.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북한군의 장비는 훨씬 우세했다. 특히 소련제 신형탱크는 전체 전선에서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어느 미군고문단이 어째서 미국은 한국에 탱크를 남기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윌리엄 로버츠(William A Roberts) 장군은 한국지형에서는 탱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넉살좋게 대답했다. 로버츠 장군의 이런 태도로 한국전쟁은 초전부터 북한인민군의 독무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장관은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반도를 방위선(defensive perimeter)에서 제외시킨다는 애치슨라인을 발표한다. 이제 북한인민군은 미군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졌다. 미군은 떠났고 남한은 방위선에서 버림받은 것이다.

김일성이 남침의지를 밝혔을 때 모택동과 스탈린은 신중하게 대처하라고 거듭 충고한다. 그러나 중소 두 지도자 역시 미국의 패권주의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도처의 공산혁명을 지원하고 있었으므로 적극적으로 김일성의 개전의지를 만류하지는 않았다.

모택동은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중국인민군에 편입되어 있던 조선출신의용군을 전투장비와 함께 북한으로 되돌려 보내준다. 북한군은 한층 강화되고 거듭해서 개전의지를 밝히는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스탈린은 전투 장비를 지원하기로 하고 북한공군복장을 한 소련공군을 참전시키기로 작정한다.

이런 북한내부의 전쟁준비 움직임의 일부를 감지한 미군의 정보책임자인 월러비는 한발 뒤로 빼듯하지만 분석해볼 가치가 있는 중요정보를 극동사령부로 혹은 워싱턴으로 전한다. 그러나 맥아더도 워싱턴도 북한의 개전 움직임에 대한 확인을 하지 않았다. 무시했거나 방조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한국전쟁은 충분히 사전에 막을 수 있던 전쟁이었다. 미군이 중요군사 장비를 남한군에 넘기지 않고 철수한 것은 이승만의 북진통일의지를 우려한 것도 원인이 될 것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외치지만 않았다면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사장비가 남겨졌을 것이다. 미국당국의 방심과 오판으로 일어난 한국전쟁은 엄청난 상흔을 남북모두에게 남기고 말았으니 원통하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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