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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5월의 서울, 그 때도 푸르른 계절은 여전히 찾아왔고 봄기운은 싱그럽기만 했다.

"긴밤 지새우고~", "영차, 영차!"소리에 뒤이어 "파바박, 파박!" 들려오는 최루탄 발사음과 함께 교문 밖에서 날아오는 매캐한 냄새도 어쩌지 못할 만큼 교문밖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개나리, 진달래꽃 향기는 후각을 있는 대로 자극해 왔다. 곧 벌어질 축제를 대비해 부르는 듯 어디에선가 음대 합창반의 '오월의 아카시아'는 교문 밖 세상과는 아랑곳없이 청아한 화음을 뽑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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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교문 밖에서 벌어지는 '대회전'을 잊어버리게 할 만큼 5월은 그때도 여전히 푸르렀다. 수개월 전 벌어진 군사 쿠데타로 더렵혀진 서울 하늘은 그 봄 내내 시민들의 마음에 잿빛 그늘을 드리우기는 했으나, 계절만은 그 푸르름의 빛깔을 더욱 짙게 뿜어내고 있었다. 우리는 5월의 향기에 흠뻑 취해 있었다.

잿빛 공간, 그 푸르렀던 5월

어린이 날, 어버이날을 마 지난 며칠 후 저녁 무렵 이었다. 신촌의 '데모 대학' 운동권 멤버중 2인자이던 친구를 길거리에서 마주쳤는데, 그는 다짜고짜 "큰일 났다"는 것이었다. 그는 "광주에서 대살육이 벌어져 2만 명도 넘게 죽었다"며 상기된 얼굴로 자신들은 결사대를 조직해 광주로 가려 한다는 것이다.

이후로 수 일간 '공수부대 군인들이 길가는 시민들을 마구 잡이로 어찌어찌해서 000명이 죽었다더라', '임산부와 길가는 아가씨를 어찌어찌 해서 어찌어찌 됐다더라' 따위의 흉악한 루머들이 서울 바닥을 떠돌고 있을 때, 1980년 5월의 광주는 우선 '불쾌함'으로 다가왔다. 이디 아민이 통치하던 우간다에서나 일어났음직한 그런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선진 조국 문턱에 다다랐다는 우리 땅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광주가 역사의 앞 바다에 하나 둘씩 사실로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분명 소름 돋게 하는 충격이었다. 백주 대낮에 느닷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만큼이나 거듭되는 충격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운동권 친구가 광주에서 2만 명이 죽었다고 느낄 만큼, "6·25때도 그런 장면은 보지 못했다"는 증언이 나올 만큼, 어느 시인이 고백했듯 '참새도 세상을 뜰 만큼' 그렇게 참혹한 사실이었다.

불쾌함에서 분노로

무엇보다도 홍익인간을 기치로 세워졌다는 우리 땅에서 그 홍익 실현의 대상 중 하나인 광주를 짓이긴 공로로 주모자들이 최고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우리 앞에 당당하게 나타났을 때, 가당찮게도 그들에 의해 홍익 이념적 '정의 사회 구현'이 외쳐지고 있을 때, 제 정신 가진 한국인치고 그 당장에야 "죽일 놈들!"이라고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 '분노'라는 감정은 광주를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던 숨 막히는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네 마음의 변두리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인기에 목마른 정치꾼들의 목청 돋우기와 열화 같은 씨알들의 항의에 못 이겨,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훈장이 주모자 그룹의 정치권에 의해 5·18 광주에 수여되고부터 분노는 시나브로 사그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번 사그라지기 시작한 분노는 6·29라는 고단수 묘약에 완전히 풀이 꺾이게 되었고, 88올림픽의 휘황한 팡파르 속에서, 그리고 천민자본주의의 질탕한 단내 속에서 '불편함'으로 전이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문민정부의 최고 지도자로부터 "역사에 맡기자"는 알쏭한 선창이 나오고부터 한국 현대사에서 늘 그러했듯 광주는 역사의 또 다른 미아가 될 찰나에 놓였고, 공사석을 가릴 것 없이 '광주'는 더욱 불편한 이야기로 우리를 옥죄기에 이르렀다.

분노에서 불편함으로

그랬다. 광주는 불편했고 지금도 여전히 불편하다. 그것은 '예민한 안보 위기 상황에서 벌어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난제'라서 불편했고, 전혀 광주를 말할 수 없던 시절에 가졌던 습관적 두려움 때문에 불편했고, 역사의 대 반전이 이루어져 피해를 입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불편했다.

그리고 지금도 특정지역 사람들이 관련돼서 불편하고, 화해와 화합의 새 시대에 걸맞지 않는 과거사라서 불편하고, 마음의 평안을 깨서 불편하고, 광주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조차 광주는 아직 불편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광주는 아무런 느낌 없이 그저 고을 이름으로 불리기에는 너무도 의미 많고 무거운 이름이 되어 왔다. 한국인들에게 광주는 더 이상 지명이 아니다. 광주는 잠시 숨을 고르고서야 발음할 수 있는 암호 같은 것이다. 우리 시대 우리 땅에서 불편한 감정을 마음에 담지 않고 '광주'를 쉽게 발음할 사람이 누구인가.

우리는 25년 전 그 날 광주에 없었다. 그 날에는 물론, 예전에도 거기에 없었다. 사회 시스템으로서의 광주에 대한 심리적 거리는 항상 멀기만 했고, 사회적 무관심으로부터 나온 그 심리적 거리는 5·18내내 광주를 질식케 했던 것이다. 독일 대중이 침묵으로 히틀러의 나치집단에 동조한 것처럼, 묵묵히 자기 일만 하면서 군부독재에 침묵함으로 광주의 살육에 동조한 것이다. 공범자는 그 자신의 범죄로 인해 꺼림칙하고 불편한 법이다.

광주는 결코 죽지 않았다. 광주의 죽음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5·18 그날'을 경험한 모두에게 '구원'의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 그렇다. 20년이 지나도록 5월 그날 어간이 되면 광주는 우리네 양심의 뿌리를 가만 가만 건드려 왔다. 광주는 우리로 하여금 불쾌하게 하고, 분노케 하고, 불편케 하는 감정의 순환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죽어 가던 양심을 일깨워 왔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광주는 '모래시계'류의 드라마로 극화되어 그 날 광주를 외면한 우리 모두에게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고, 정치, 이익 집단에 의해 '기념'되어 석화(石花)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우리의 서러운 현대사는 늘 그렇게 흘러갔으므로 모두가 그러려니 했다. 그간에도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는 말은 언죽번죽 전두환씨 주변에서 흘러 나왔다. 이 또한 그러려니 했다.

다시 분노로

그리고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 주역중 하나가 우리의 기억력을 테스트나 하려는 듯 드디어 '우리가 언제 칼질을 했느냐'고 대드는 사태에 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역사적 실재'로서의 광주 민주화 운동의 참 의미가 희미해져 가고 있는 오늘, 우리는 그 수괴 집단의 일원이 벌이는 적반하장의 극치를 보고 있다.

증언자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생생한 증거물들이 나돌고 있는 마당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파렴치 행위가 자행될 만큼 대한민국은 역사가 무너진 나라인가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판이다.

근간 허화평씨의 궤변에 광주를 직간접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노도와 같은 분노를 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어느덧 광주는 산자의 양심을 일깨우는 기폭제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참에 '역사바로세우기'를 '제때에, 제대로' 해야 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할 시간을 가져 봄직도 하다.

덧붙이는 글 | koreaweeklyfl.com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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