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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안 묶고 가니?"

학교에 간다고 가방을 들고 나서는 딸을 보니 늘 보던 묶은 머리가 아니다. 매일 샤워하며 머리 에센스까지 바르는 딸의 머리는 오늘따라 더욱 찰랑거리며 윤기가 난다.

"지금 중간고사 기간이잖아. 오늘 같은 날은 머리 '안 잡을' 거야. 이렇게 시험기간만이라도 머리를 풀어주는 '센스'가 있어야지, 사람이. 센스가…."

딸은 코미디 프로에 나오는 '센스'라는 말을 연신 들먹거린다. 그러면서 이렇게 시험기간이라는 허점을 노려 머리를 늘어뜨릴 수 있는 것도 '센스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항변을 한다.

고1인 딸아이는 요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1989년생이다. 항간에는 과격한 표현으로 '저주받은 89년생'이라는 말도 있는 모양인데 딸은 대학입시 내신제 강화와 관련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머리에 대해서는 거의 '사수'라는 말을 써도 될 만큼 신경을 많이 쓴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머리가 길다고 '잡힌' 딸이 미용실에 갔다 오면 우리 두 모녀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험악한(?) 대화가 오간다.

"미용실에 갔다 온 거니?"
"응."

"그게 돈 들인 머리니? 자르기는 한 거야? 하나도 안 자른 것 같은데…. 그렇게 하고 학교에 가면 다시 걸리겠다. 거금 5000원이 그냥 날아갔네."
"이게 얼마나 많이 자른 건데…. 솎아내기도 하고 길이도 자르고…."

머리를 자르기 전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하면 딸은 '엄청' 많이 잘랐다고 툴툴거리며 입을 내민다. 딸 아이의 학교 홈페이지에는 아래와 같은 <학생 두발 규정>이 나와 있다.


나. 두발

(1) 머리 모양은 단발머리, 묶음머리를 원칙으로 한다.

① 단발머리 : 귀밑 5㎝
② 묶음머리 : 중앙에 한 갈래로 단정하게 묶어야 하고 묶는 위치는 귀와 나란히 하되 머리 길이는 귀밑 12㎝를 넘지 않도록 한다.
③ 묶는 머리 끈은 검정색만 허용한다.

(2) 파마, 염색, 무스, 스프레이, 짧은 커트(사회인들의 모양)는 하지 않는다.

(3) 머리핀과 헤어밴드는 사용할 수 있으나 원색 또는 장식이 있는 것은 일절 금한다.


두발 자율화를 요구하는 거리축제와 촛불시위가 오늘 열려 교육당국이 긴장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사회적인 이슈가 된 청소년의 '두발 자율화'에 대해 청소년들은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두발제한 폐지'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고, 이는 학생들의 인권문제와도 관련이 있다고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포털 사이트에는 두발규제에 관한 학생들의 불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두발 단속을 벌이면서 생기는 교사와 학생들 간의 불신과 불만, 그리고 적대감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내용들이 많이 올라와 있다.

학교에 따라서는 '귀밑 3cm, 5cm' 등의 산술적인 규정이 있기도 하고, '머리가 옷깃에 닿지 않을 정도'라는 애매한 규정이 있기도 하다는데 목이 긴 여학생과 짧은 여학생 간에 희비가 엇갈린다는 웃지 못 할 코미디도 있다고 한다.

남학생의 경우 스포츠형 머리로 짧게 깎으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빡빡 밀어버리면 그것 역시 권위에 도전하는 불량 학생으로 비춰진다고 하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학생들의 '두발제한 반대' 집회를 앞두고 국가인권위가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와 교육부 관계자를 불러 토론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거기에서 나온 교사들의 발언이 또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교육적 차원의 두발 제한은 인정해야 한다."
"대안적인 명확한 규정 마련 없이 막연한 제한 철폐는 또 다른 부작용을 부를 것이다."

아니, 그럼 지금까지 실시했던 두발 제한은 교육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리고 또 다른 부작용이라는 게 도대체 뭔가.

아울러 한국교총 소속의 한 교사가 했다는 발언 역시 나를 실망시킨다.

"교육적 차원의 두발 제한까지 인권침해라고 볼 순 없다. 학생 가운데에는 자기조절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이 많아 가치관이 형성되기도 전에 외모에만 치중하는 단순함에 빠질 수 있다. 그러면 무절제한 성인의 모습을 추구하게 돼 비행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물론 우리 아이들은 아직 미성숙하다. 하지만 어른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거수 일투족을 규정해야 할 만큼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허약하지는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요즘 아이들'에 대한 지독한 염려는 이미 옛날 로마시대 때부터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어른들의 그런 걱정은 진정 '기우'일 뿐이다.

하긴 과거에 '야간 통행금지' 조치를 없애려고 할 때에도 얼마나 말이 많았던가.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통행금지가 마침내 37년 만에 폐지되었을 때 사람들은 또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던가. 마치 야밤중에 범죄가 들끓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기본적으로 두발 자율화의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자율적으로' 맡겨두는 게 상책일 것이다. 교육부나 학교가 개인의 머리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학교 선생님들은 왜 머리 길이를 문제 삼는 것일까. 왜 머리 스타일과 머리 색깔에 대해 엄격하게 규제를 하려는 것일까.

아이들에 대해 믿고 맡겨보자. 어른들이 걱정하는 자기조절 능력의 부족은 비단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른들도 자기 조절이 안 되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은데 그렇다면 이런 '무절제한' 성인들에 대해서도 국가가 나서서 교화를 시켜야 한단 말인가.

서로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이런 소모적인 논쟁은 이제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정말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말자. 국가 경제력이 세계 11위라고 떠들어 대는 대한민국이지만 아직도 경직되고 촌스러운 사고로 우리의 '미래'들을 얽어매는 모습을 보면 좀 한심하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다본다면 어른들은 알 것이다. 모범생 같은 단정한 머리만이 정상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게 아니고, 또한 성공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고로는 21세기의 다양하고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낼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간혹 삐딱하게 딴죽을 거는 사람들이 꼭 있다.

'두발 자율화를 실시한다고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냐.'

물론 두발자율화와 비판적인 사고가 같이 움직이는 것은 분명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웬만한 것은 좀 눈감아주고 큰 틀 안에서 큰 그림을 그리도록 하자는 것이다.

두 딸들의 학교생활과 관련하여 이따금 짜증나는 일이 있다. 그건 바로 머리 검사에서 '걸렸다'고 퉁퉁 부은 얼굴로 집에 온 아이들을 보는 것이고, 혹시 머리 검사에서 '걸릴지 모르니' 귀밑머리를 재 달라고 자를 내미는 딸들을 볼 때이다.

아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귀밑머리 5cm를 주장하며 아이들을 주눅 들게 한단 말인가. 반드시 머리는 검정 고무줄로만 묶어야 하고, 흰 양말에 꽃무늬도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인가.

"선생님, 우리 아이들이 사소한 일로 선생님과 원수가 되지 않도록 해 주세요. 또, 학교와 우리나라에 대해서 적개심을 품지 않도록 해 주세요. 저들의 마음속에 꿈과 비전을 심어 주어 우리의 미래인 저들이 이 나라를 잘 이끌어 갈 '동량지재'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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