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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1991년 9월 초순, 나는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은 내가 평생 처음 가보는 외국이었다. 당시 내게 한국은, 미국이라는 이상화(理想化)된 존재의 적자(嫡子)였다. 경제적으로 성장했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실현한 사회였다. 그리고 한국은 불안이 가득한 소련과 대조되는 행복하고 안정된 사회였다. 무너져 가는 소련에서 온 내게 이러한 이미지는 그야말로 소련 사회가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스승으로 생각되었다."

ⓒ 인물과 사상사
박노자에게 한국은 매우 이국적이고 이질적인 사회였다. 한국 사회의 정신적인 기둥은 유교라고 배웠기 때문에 한국인의 말이나 행동은 뭔가 유교적인 지혜와 관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한국은 '미지의 유교적 왕국'이라는 극히 이상화되고, 이국화된 이미지로 박노자에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노자가 처음 가본 외국은 바로 한국이었다.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한 그가 짐을 푼 곳은 고려대학교 기숙사였다. 박노자가 머문 방의 동숙생 하나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에 관심이 많았고, 고학생이었던 다른 한 명은 아르바이트와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코리아를 이상적인 유교적 왕국으로 생각했던 박노자가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당연했다. "<논어>를 언제 마지막으로 읽어보았습니까?" 그런데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엉뚱한 것을 물어 본다는 눈빛이었다.

애초 김일성 종합대학교로 떠나야 했던 유학길이 우연히 고려대학교로 바뀌면서 시작된 한국과의 인연은 그러나 박노자의 운명을 바꿨다. 그리고 그는 한국으로 귀화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세상에 눈을 뜨게 했던 것일까? 박노자는 그 체험을 이렇게 정리한다. 그것은 '경계선(境界線) 뛰어넘기'였다고. 그래서 이념, 체제, 민족, 동서양에 대한 구분 너머에서 인간을 발견했고, 인간의 자유를 향한 여정에 나서게 되었다고….

박노자에게 깨달음을 준 무대가 한국이었다면 고종석에게는 파리와 유럽이 그 무대가 되었다. 박노자가 입국한 그 이듬해인 1992년 가을, 고종석은 파리 근교 샤를 드골 공항에 발을 디뎠다. '유럽의 기자들'이라는 이름의 저널리즘 연수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수에 바쳐진 그 아홉 달의 유럽 체류는 그 뒤 고종석과 그의 가족의 삶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서울로 돌아온 지 아홉 달만에 그는 유럽 바람에 휘둘려 아내와 아이들을 모두 이끌고 다시 파리로 갔고, 그 곳에서 네 해 남짓을 살다 왔으니 말이다.

고종석은 20세기의 마지막 나날들을 대부분 유럽, 그 중에서도 파리에서 보내면서 20세기를 되돌아보고 21세기를 내다볼 수 있었다고 한다. 유럽에서 20세기의 이미지를 얻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기자들' 연수를 받던 시절에는 서울의 친구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파리의 공기에는 자유가 묻어 있는 듯하다."

고종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편지는 파리에 대한 오랜 허영심이 담겨 있다고 했지만 아무튼 그는 파리에서라면 뭔가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당시 유고에서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그리고 보스니아가 민족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참혹한 내전을 치르고 있었고, 파리에서는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와 흔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고종석의 글은 이렇게 끝난다.

"순수에 대한 열정이라는 것은 말을 바꾸면 근본주의, 원리주의다. 순수에 대한 열정은 좋게 말하면 진리에 대한 열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한 무시무시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소수파나 이물질을 배제한다. 진리에 대한 사랑을 줄이고, 열정의 사슬을 자유로써 끊어내며, 광신의 진국에 의심의 물을 마구 타도록 하자. 흩어져 싸우는 개인들이란 결국 세계시민주의자들이고, 세계시민주의의 실천 전략은 불순함의 옹호다. 섞인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20세기의 교훈이다."

정혜신의 젊은 날을 사로잡았던 것은 정신과였다. 의대 본과 2학년 때 의료봉사를 떠나면서 정신과에 대한 이유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오로지 그의 삶을 지배한 것은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다는 열정 하나였다. 임상 실습 기간 중에는 정신과 병동에 홀로 남아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비밀스런 무의식 세계를 엿보고자 했다. 부적절한 진지함은 부적절한 가벼움보다 더 우스꽝스럽지만 그는 당시 정신과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던 학과장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끝내 정신과 전공의가 된다. 집요함과 집착과 눈물겨운 열정이 거둔 '작은 혁명'이었다.

이후 정신과 전공의가 된 정혜신은 정신과에서 의사 지망생들에게 하는 권유를 받아들여 정신분석을 받는다. 그리고 낮에는 의사로, 밤에는 정신분석을 받는 환자의 입장에서 2년을 보낸다. 그 통제불가능한 정신분석의와의 게임에서 발견한 자신의 모습! 그 과정에서 정혜신이 깨달은 것은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에 어떤 격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정혜신은 말한다. 그동안 만난 8천여 명의 환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모르지만 정신과로부터 가장 큰 도움을 받은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조정래, 홍세화, 박홍규, 장회익, 김진애, 고종석, 손석춘, 정혜신, 박노자. 이들은 <젊은 날의 깨달음>(인물과 사상사 펴냄)이란 책에 그들의 소중했던 시간을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털어 놓는다. 그것은 인생의 북극성을 만났던 순간의 감격이자, 살아 있는 20세기의 이야기이다. 그때 그들은 '내 인생의 카메오(cameo)'를 보냈다. 독자 여러분도 부디 그런 북극성을 만나시기를 ….

글을 마감하려는데 책머리에 쓴 박홍규의 글이 또 여운을 남기며 다가온다.

"당당하게 산다는 것은 홀로 자신만의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떤 인연의 무리든 간에 그 속에 뒤섞여 자아를 잃고 살지 말라. 어려서부터 무리 속의 삶에 지쳤던 나는 부모·형제·처자까지 남들과 똑같이 대하고자 노력했다. 기타 혈연, 지연, 학연, 지연 따위는 철저히 무시했다. 따라서 동창회든 종친회든, 등산회든 골프회든, 친목계든 관혼상제든, 교회든 절이든 일체의 모임에 가지 않는다. 젊은 벗이여, 고독해라!"

덧붙이는 글 | <젊은 날의 깨달음> I 조정래·장회익·홍세화·박홍규·김진애·고종석·손석춘·정혜신·박노자 지음 I 인물과사상사 펴냄 I 1만원

홍석봉 기자는 <젊은 날의 깨달음>을 펴낸 인물과사상사의 편집장입니다.


젊은 날의 깨달음

조정래.홍세화.정혜신 외 지음, 인물과사상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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