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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친이 윤동주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 부친이 윤동주와 연전 동기동창이라는 사실이 정말 놀랍고 반갑다. 부친의 모습이 야위긴 했지만 윤동주 못지않게 시적감성이 넘쳐 보인다 
ⓒ 김형순
 
1부, 1970년 5월을 다 넘기지 못하고 귀천

부친 김갑권은 1918년생이니까 쉰을 조금 넘기신 1970년 5월6일 귀천하셨다. 사업실패와 지병인 악성 기관지염 때문이었다. 내가 고2였고, 누이가 대학교 2학년, 동생이 중3이었으니 우리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구원' 나는 부친의 죽음을 계기로 죽음이 뭔지, 왜 인간은 허무를 맛보아야 하는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무엇인지 등 인생 전반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긴 숙고 끝에 부친이 저 세상으로 가신 지 꼭 10년이 되는 1980년 봄, 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구원받는다'라고. 나는 드디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연전 이과에서 '화공학' 전공 부친은 경기도 파주에서 있는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조부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고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으나 몸은 늘 약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연전까지 다녔으니 큰 자랑거리였음이 틀림없다. 최근 어머니가 내게 건네준 부친의 졸업장을 다시 보니 '이과 본과 졸업, 大正 7년 2월 15일 생으로, 졸업 일자가 소하 16년 12월 27일'로 적혀 있다.

송우혜가 쓴 <윤동주 평전>을 읽다가 나는 우연히 송몽규의 조카이기도 한 소설가 송우혜가 쓴 <윤동주 평전>을 읽다가 '소하 16년'이 1941년이라는 것과, 원래 졸업식이 1942년 3월 예정이었으나 일본이 1941년 12월8일 새벽을 기해 미국 진주만 기습을 계기로 앞당겨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시 졸업생은 상과 50명, 문과 21명, 이과 18명이었다니 부친은 큰 특혜를 받은 사람이다.

부친이 졸업 당시 국내외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식민시대의 어둠은 극에 달했을 것이고 시국은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였을 것이다. 일제는 삼엄한 감시 속에 극악무도한 탄압과 찬탈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부친 졸업자 명부에는 이미 창씨개명이 되어 있었다. 부친이 윤동주와 동기동창이라니 올 3월 나는 중고시절부터 죽마지우처럼 지낸 윤인석(성대 건축과 교수)을 오랜만에 상가에서 만났다. 그는 윤동주의 조카다.

그와 이야기 끝에 우리 아버지 얘기를 하다가 아무래도 윤동주 시인과 우리 부친이 연배가 비슷해 연전 동기일지도 모른다는 추론을 하게 되었고 윤 교수가 마침 큰 아버지 졸업앨범이 있으니 한 번 확인해보겠단다. 며칠 후 전화가 왔는데 정말 부친은 윤동주의 동기동창이었다. 복사한 부친의 졸업앨범사진을 보내준 것이다. 부친이 윤동주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정말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앨범 속 부친의 모습은 좀 야위긴 했지만 시적 감성이 넘치는 멋진 청년이었다. 부친이 윤동주 시인과 관계가 궁금해지고 이 사실을 알고 나니 궁금증이 생긴다. 부친이 윤동주 시인을 알았을까 또는 교양학부에서 서로 같이 수업을 받았을까 혹은 친분이 있었을까 아니면 서로 전혀 몰랐을까 등등. 당시 비록 일본강점기였지만 상당히 자유로운 학문풍토와 개화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미국계 사립학교에서 부친과 윤동주가 같이 학교에 다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참회록'에서 식민지 지식인 고뇌 토로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 보면 1941년 12월 말 졸업식을 치른 윤동주는 다음해 1월 29일 일본 도항증명서(유학 비자) 신청 건으로 어쩔 수 없이 '平沼, 히라누마 東柱'라고 창씨개명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그는 19편의 시를 묶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포기하고 일본유학을 결심한다. 윤동주에게 이런 선택은 정말 부끄럽고 힘들고 괴로웠을 것이다. 시인이니 그 치욕감과 참담함은 어찌 말로 다하랴. 윤동주는 이런 참담한 심정을 '참회록'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1942년 1월 24일
 

2부, 부친은 말을 타고 학교를 다니셨고

 
▲ 1940년경 비록 어두운 일본강점기였지만 말을 타고 등교하는 부친의 모습은 늠름하고 당당해 보인다 
ⓒ 김형순
 
다시 부친 이야기로 돌아와서 위에 사진에서 보듯 그는 서울 친척집에서 말을 타고 학교를 다니셨다 한다. 그 모습이 늠름하고 당당해 보여서 좋다. 당시 풍경을 엿볼 수 있는 이런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다니 기적 같다. 당시 말을 타고 다녔다면 요즘 고급 승용차 타고 다닌 이상으로 특권을 누린 셈이다.

부친은 20대 후반에 해방을, 30대 초반에 6·25를 부친은 20대 후반에 해방을 맞이했고 30대 초반에 6·25를 맞아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러야 했고 모든 사업은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가족은 뿔뿔이 헤어졌고 위로 형 둘을 폭격을 맞아 죽었다. 어머니 말로는 부친의 생사를 모르다가 1년만에 기적적으로 밀양 근처에서 상봉했다고 한다. 나는 휴전 직후에 태어났다. 전후 염색기술자로 대한민국 최고 연봉수령자

전후 폐허 속에서 당시 방직업은 요즘 IT 산업처럼 첨단 기술로 최고의 유망 사업이었다. 연전 화공과 출신답게 대한모방에서 염색전문가로 대한민국 최고 연봉을 받았다. 아버지를 따를 만한 기술자가 없었다. 1957년 엽서에 보면 당시 주소가 영등포 앙평동 1가 23번지로 되어 있는데 지금의 롯데제과 자리가 아닌가 싶다.

어려서 영등포 공장 사택에서 살았는데 지금도 그때의 퀴퀴한 염색냄새가 어렴풋이 생각난다. 위 사진은 그 당시 누이와 내가 살던 사택 뒷마당에서 찍은 것이다. 나와 누이가 입은 옷은 어머니가 직접 주어주신 것이다. 어려서지만 그 까칠까칠한 옷감의 특이한 촉감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1956년에 독일, 스위스 회사 초대를 받고 유학을

 
▲ 1956년경으로 보이는데 독일 유학 시 특별한 외국인의 날인지 모두 특이한 모자를 쓰고 갖은 폼을 다 잡고 있다. 제일 가운데가 부친이다 
ⓒ 김형순
  
▲ 1956년 가을 정도에 제네바 레만 호수에서 역광으로 찍은 사진으로 보이는데 이 세상에서 이렇게 멋진 중년 남자의 사진이 있을까 싶다. 나의 부친이라 믿어지지 않는다 
ⓒ 김형순

그러던 중 부친은 독일과 스위스 화학회사에서 마침 초대를 받고 또한 회사의 지원을 받으며 1956년 초에 유럽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유럽의 유수한 화학회사인 독일의 바스프(BASF)와 스위스 바젤에 있는 시바(CIBA)에서 연수를 받기 위해서였다. 기술연수와 연구 그리고 여행도 겸했던 것이다. 독일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시며 전혜린이 1955년 가을부터 1959년 봄까지 뮌헨 대학에 유학하고 있었으니 부친은 그 중간 기간에 독일에 체류하신 것이다. 당시 부친은 독일에서 홈스테이를 하셨는데 멀리 동양에서 드물게 온 이방인을 그들은 잘 대해주신 것 같다.

 
▲ 독일체류 시 한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셨는데 꽤 인기가 있으셨나보다! 부친이 한국 귀국 때 추억앨범을 선물로 받았단다. 그 중 2장의 사진 
ⓒ 김형순

사진에서 보듯 부친과 독일 안방 주인의 표정이 참 밝다. 인기가 좀 있었나보다. 이 가족은 부친이 귀국할 때 선물로 추억앨범을 받았다는데 자세히 보니 '1957년 6월13일 벨가르트 가족(Familie Bellgardt)이'라는 친필사인이 들어 있다. 그 앨범에는 부친이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찍은 사진을 비롯하여 이름 모를 독일 도시와 스위스 일대의 찍은 사진들로 그득하다. 지병인 기관지염이 악화되어 다시 귀국하고 그러나 30대 후반의 기혼자에다가 지병인 기관지염이 유럽 날씨로 더욱 악화되어 유럽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도 그리웠겠지만 건강 문제로 유럽에 그리 오래 체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둘러 귀국하게 되셨다.

 
▲ 부친이 런던공항에서 누이에게 귀국 소식을 알렸던 사진엽서. 스탬프 도장이 1957년 6월 21일으로 찍혀 있어 귀국 날짜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 김형순
 
부친의 귀국 날짜는 정확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귀국하면서 런던공항에서 누이에게 보낸 엽서가 지금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위에 보는 사진엽서가 바로 그것인데 부친은 '런던' 공항 표기를 '론던' 공항이라고 써 놓아서 웃음이 나왔다. 스탬프 도장이 1957년 6월 21일으로 찍혀 있으니 적어도 한국에 6월 25일 이전에는 도착하신 것 같다. 아버지가 독일에서 귀국하면서 내게 준 선물 중 지남철과 가죽 구두가 제일 생각난다. 독일제 구두는 정말 단단하고 견고해 보여 몇 년을 신을 것 같았다. 그러나 동물모양이 새겨진 지남철은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잊어버린 것 같다.

1959년 1월 1일, 물 좋고 공기 좋은 마산으로 이사 부친은 유럽 귀국 후에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고 영등포 공장 환경도 기관지염에 좋지 않아 마침 연전 출신인 마산 고려모직 사장의 초대를 받고 1959년 1월1일 마산으로 이사하셨다. 마산은 일제 때부터 요양도시로 물 좋고, 공기 좋고, 꽃이 아름답게 피는 도시이다. 아침 햇살의 눈부심은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김춘수의 유명한 시 '꽃'은 마산과 연관하지 않고 생각할 수 없다.

1960년대 마산에서 천국경험과 부친 절명 나는 마산에서의 천국경험을 잊지 못한다. 그 추억이 내가 시를 좋아하고 시를 쓰게 하는 정신적 원천인지 모른다. 우리집은 멋진 앞바다가 훤히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일본식 정원과 대나무 밭이 있는 300평짜리 가옥이었다. 잔디 깎는 기계도 있었고 그 당시 드물게 출근용 자가용도 있었다. 경찰에서 이 지프를 빌려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 이 사진은 부친이 유럽에서 귀국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내가 4-5살 쯤에 회사 야유회에서 찍은 사진 같다 
ⓒ 김형순
 
그땐 그만큼 차가 드문 시대였다. 부친은 이런 공기 좋고 꽃과 나무와 바다와 햇살이 아름다운 이곳의 천국 같은 생활을 경험하셨지만 악성지병인 기관지염으로 이곳에 온지 10년만에 돌아가셨다. 말년에 회사를 그만두시고 잠시 사업을 하셨지만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고 모든 재산은 저당을 잡혔고 시대조류보다 앞선 원단은 팔리지 않았다.

부친이 암시한 부자는 마음의 부자 결과적으로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재산은 거덜 났고 파주 땅은 남겼으나 여러 사정으로 큰집 땅이 되어버렸다. 아버지 생존 시 누구 하나 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좀 있다고 해서 남에게 위엄을 부리거나 과시하는 적은 없었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부친의 은혜를 못 잊어 나에게 가족 회식비라며 상당한 돈을 보내곤 한다. 부친은 이렇게 유형재산은 별로 남기지 않았지만 무형재산을 많이 남긴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두 가지 추억 아버지에 대한 두 가지 추억이 있다. 내가 8살 때인가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어린 마음에 참 무서웠고 충격이 컸다. 결국 경찰에 연락이 닿았고 하루 후에 다행히 도둑이 잡혔다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부친은 그들을 풀어주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부친은 이렇게 도둑의 입장도 넓게 품어 안으려는 포용성이 있었다.

또 하나의 추억은 당시 우리 가족은 청교도적 신조를 철저히 따르는 크리스천들이었다. 토요일이 되면 다음날 교회 출석준비로 이발소, 목욕탕뿐만 아니라 손톱도 잘 깎아야 했다. 주일에는 늘 빳빳한 새 돈만으로 헌금을 했고 점심에는 일부러 간소한 식탁을 차렸다. 식탁보 레이스에는 시편이, 은수저에는 성경말씀이 새겨져 있었다.

한편 부친은 손님초대를 좋아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일요일엔 교인들이 우리집에 북적거렸다. 늘 잔칫집 같았다. 어머니는 손님 치르기에 정신이 없었다. 부친은 교회재정부장으로 헌금을 가장 많이 하는 측이었으나 자신의 아픈 개인사로 장로가 되는 것은 절대 사양하셨다.

이런 면모를 볼 때 그의 인격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가훈은 '참을성을 기르자'였지만 남을 도우며 살라는 부친의 유언 우리집 가훈은 '참을성을 기르자'였지만 부친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분이 남긴 정신은 '남을 도우면서 살라는 것'이었다. 당시는 더 더욱 취업이 어려운 때라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부친은 많은 사람을 도왔다. 그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러니까 지금도 이를 감사하는 사람들과 연락이 되지 않는가.

 
▲ 1960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찍은 가족사진. 마산에서의 천국경험을 잊지 못한다. 산타 할아버지의 인형과 장식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왼쪽에서 2번째가 나다 
ⓒ 김형순
 
 
▲ 마산시 평화동 4-2번지 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찍은 부모사진 
ⓒ 김형순
 
부친이 미국여행 중 내게 보낸 엽서 한 장에 눈시울이 할 말은 많지만 지면상 이 정도로 줄이고 부친이 돌아가시기 2년 전인 1968년에 과거 스위스에서 일했던 시바(CIBA) 미국지사에서 초대를 받아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하게 되셨다. 그 때 내게 보낸 엽서 한 장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부친이 내게 남긴 유일한 친필 엽서를 최근 발굴하고는 나는 여기서 지금까지 몰랐던 부성애의 체취를 흠뻑 느꼈다.

"아빠는 지금 '시바' 미국지사를 방문하고 있다. 이곳은 벌써 날이 덥구나! 학교 다니느라 얼마나 피곤하냐! 용기를 내서 몸조심하고 열심히 공부해라! 너희들 졸업하면 미국에 보낼 생각이다. 큰 희망을 가지고 노력만 남은 숙제이다. 누나, 동생도 학교 잘 다니겠지? 그럼 안녕. 1968년 5월 아버지로부터! 샌들 브루크에서(Saddle Brook, New Jersey, Marriotte Hotel)"

50년을 100년처럼 살다간 사나이 부친은 건강으로 50년을 조금 넘게 사셨지만 짧게 굵게 멋지게 사셨다. 그가 남긴 재산은 없어도 그는 우리에게 '남을 먼저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몸소 보이셨다. 나는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너무 어려서 그런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나이 들면서 자꾸 눈물이 난다. 내가 아버지 돌아가신 나이가 되었는데도 아버지 산 것의 100분의 1도 못사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를 기점으로 내 인생의 제2의 출발을 해야겠다. <오마이뉴스>가 있어 큰 위로가 된다. 이런 내 마음도 네티즌(누리꾼)들과 나눌 수 있으니 기쁘다.

태그:#김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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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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