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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재를 털어 '자주통일비'를 세운 정효순(80)씨.
ⓒ 오마이뉴스 심규상
"내 죽으면 통일비 인근에 묻힐 생각이여.”

2003년 5월 8일, 태조 이성계의 태(胎)를 봉안했던 금산 태봉(지금의 만인산) 자락에 비가 세워졌다. 정효순(80) 할머니(대전시 중구 대사동)가 수천만원의 사재를 털어 세운 통일비다.

앞면에는 ‘민족자주통일비’(높이 220㎝, 너비 80㎝, 기단 90㎝), 뒤에는 `7.4남북공동성명 중 조국통일 3대원칙'과 `6.15남북공동선언문 중 5개항'이 새겨져 있다. 이후 정씨는 시간이 날 때 마다 이곳을 찾아 공을 들었다. 지난해에는 비문 주변에 축대를 쌓았고 올해는 주변에 백일홍과 느티나무를 심었다. 입구엔 장승을 세워 찾는 이들을 맞이하게 했다.

정씨는 "남과 북이 하나라는 것을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학생들이 찾기 쉽게 대학교(중부대) 뒷산에 통일비를 세우게 됐다"고 말했다.

‘통일비’ 건립비는 친정어머니가 평생 모은 쌈지돈

정씨는 24살에 말 그대로 청상과부가 됐다. 300년 넘게 대대손손 살아온 고향(금산군 복수면)을 19살 나이에 등졌다. 일제의 위안부 징용을 피하기 위해 타지 사람과 서둘러 결혼한 때문이었다. 식을 올린 지 두 달 만에 남편이 징용됐다. 이듬해 해방을 맞아 남편이 무사히 돌아왔다. 하지만 남편은 몇 년 후 이름모를 병을 얻어 삼 개월 된 아이와 정씨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이어 터진 전쟁과 보릿고개를 넘으며 홀로 자식을 뒷바라지 하는 동안 세월은 그를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로 변하게 했다.

20년 전 친정어머니는 눈을 감기 전 평생동안 틈틈이 모은 돈을 아무도 몰래 정씨에게 쥐어 주었다. 하지만 정씨는 그 때부터 그 돈을 ‘통일비’ 건립에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재작년 어버이날에 맞춰 친정 선산이 인접해 있는 이곳에 비를 세운 데는 이 같은 사연이 작용했다.

정씨는 여자는 많이 배우면 팔자가 드세진다는 집안의 반대로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했다.

그런 그가 ‘통일’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 것은 우연히 들은 죽산 조봉암 선생의 연설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몇 년 후 어느 날, 아이 손을 잡고 대전천변에 나갔다가 대통령 후보로 나선 조봉암의 연설을 듣게 된 것.

나라의 미래를 미국의 원조와 좌익 척결 등을 통해 해결할 것을 촉구한 다른 후보들과는 달리 남북의 힘을 합쳐야만 살길이 열린다는 조봉암의 연설은 정씨의 생각을 일순간에 바꿔놓았다.

이를 계기로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정씨는 1970년 초 중립화 통일론을 내건 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에 가입, 대전 중구 여성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전천변에서 우연히 들은 죽산의 연설이 삶 바꿔

1977년에는 유신독재를 비판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년3개월 동안 징역을 살았다. 80년대 중반에는 대전지역에서 처음으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를 결성해 군사정권에 맞서다 구속된 학생들의 뒷바라지를 도맡았다.

▲ 지난 2003년 5월 8일 세워진 '민족자주통일비'
ⓒ 심규상
그 당시 전경과 시위학생 사이에서 싸움을 말리다 누군가가 던진 화염병에 맞아 옷자락이 살에 엉겨 붙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범민련 활동을 벌이던 1997년에는 조총련을 통해 북한동포돕기 성금을 송금한 혐의로 또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통일운동 세력이 이런 저런 이유로 갈라져 속이 상하다는 정씨는 “독립운동에 좌우가 없듯 통일운동에도 좌우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6.15선언 첫돌을 맞아 금강산에서 이북 사람들과 어우러져 춤추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정씨의 바람은 여전히 ‘통일’이다.

정씨는 “내가 조봉암 선생의 강연을 듣고 통일을 기다려왔듯 젊은이들이 통일비를 보고 남북이 ‘하나의 조국’임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정씨는 오는 7일 오후 1시 민족자주통일비건립 2주년 기념식을 가질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관련문의: 042-257-6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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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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