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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의 군사전략가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최후 수단"이며 "전쟁은 정치적 수단과는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역으로 "정치는 전쟁의 선행 공정"이며 "정치는 다른 수단으로 전개되는 전쟁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외교란 엄밀한 의미에서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이다.

국제정치행위자들은 각기 상충적인 이익을 추구하거나 배타적인 국가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한다.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 지배하는 냉혹한 국제질서 하에서 국익 실현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물리력'은 매우 손쉽게 선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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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행정부의 신보수주의자들은 힘의 우위만이 '미국의 이익'을 보장하며, 전쟁이 국익 실현의 '최선의 수단'이라는 그릇된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미국의 아프간·이라크 침공은 신보수주의자들의 그릇된 신념 앞에 '국제주의적 이상'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단지 정치외교적인 수단만으로 각기 배타적인 국가 간의 이익을 조정할 수 있다는 '국제정치의 이상주의적 허상'은 언제나 힘을 선호하는 '국제정치의 현실주의자'들이 자신의 신념을 실천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으로 이용되어 왔다.

'폭력의 맹신자'들인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과의 외교에서 '물리적 억제력'은 가장 효과적이고 현실적인 '정치적 억제력'이다.

한국전쟁 이후 북미관계의 전 과정은 이 같은 사실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 준다. 미국은 54년 제네바 회담이 결렬된 후 북한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북한의 핵능력이 증대되자 미국 역사상 가장 보수적인 정부 중 하나였던 레이건 행정부는 88년 말 북한과 대화를 시작했고, 레이건의 계승자였던 부시 1세는 스스로 전술핵무기 철수를 선언하였다. 클린턴 정부 시절 북한의 두 차례 미사일시험(93년 5월과 98년 8월)이 북미협상의 직접적인 촉매제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부시 행정부도 지난 4년 동안 마치 '물리적 억제력의 자판기'처럼 행동하였다. 미국은 북한이 폐연료봉 교체 작업에 돌입하자 4월말 베이징 회담에 나왔고, '더 강력한 추가적 조치'를 공언하다가 북한이 '폐연료봉 재처리 완료'를 통보하자 부랴부랴 1차 6자 회담에 나왔다. 진통 끝에 2차 6자 회담이 성사된 것도 2003년 1월 미국의 핵물리학자들이 북한의 폐연료봉 재처리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 후의 일이다.

자판기에 동전을 집어넣으면 커피가 나오는 듯 북한의 '물리적 억제력'이 가동될 때마다 미국은 대화에 나왔다. 이 같은 미국의 행동은 핵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해 북한으로 하여금 '핵 억제력'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북-미 대결의 전 과정은 '물리적 억제력'이 '정치적 억제력'을 보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점을 잘 보여 준다.

정욱식씨의 우려와는 다르게 북한의 핵무장선언 이후 오히려 6자 회담의 중요성은 더욱 증대되고 있다. 그동안 미국은 6자 회담을 '시간 끌기와 명분 쌓기'의 공간으로 인식해 왔지만 핵무장선언 이후 미국은 매우 절박하게 6자 회담을 요구하고 있다.

북한의 핵무장 직후 부시 대통령은 '북한은 이라크와 다르며' 핵문제를 '우방 및 동맹국들과 협의해 공동으로 대처'나갈 것이라고 말해 6자 회담의 중요성을 확인하였다.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의 방북 이후 개최된 '한-미-일 북핵 고위급 협의'에서도 미국은 '추가 조치'나 '군사 옵션'이 아닌 북한에 '지체 없는 6자 회담 복귀'를 촉구했다.

이것은 미국이 현실적으로 6자 회담 외에 문제 해결의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북한의 '물리적 억제력'에 의해 인식했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의 물리적인 '추가적 조치'가 없었다면 미국은 계속해서 6자 회담을 '시간 끌기와 명분 쌓기'의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북의 붕괴와 정권교체'를 위한 '군사적·비군사적 수단을 차곡차곡 준비'해 결국 한반도에서 자국의 '배타적인 이익'을 실현했을 것이다.

무조건 회담 복귀가 능사는 아니다

핵문제 해결의 효과적 수단으로써 '정치적 억제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정욱식씨의 주장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정치적 억제력'은 '물리적 억제력'의 기초 위에서 '확고한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다. '물리적 억제력'이 '정치적 억제력'을 보장한다는 측면에 '물리적 억제력'과 '정치적 억제력'을 분리할 수 없으며, '비교우위적 관점'에서 논할 수 없다.

현 문제는 북한의 '피(被) 포위의식'이 아니라 미국의 냉전적인 혹은 패권적인 '포위강박관념'이다. 미국의 대북봉쇄정책이 변화하지 않는 한 '위기의 악순환'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미국이 북한의 핵포기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면 북한은 미국의 적대정책포기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매우 상식적인 문제이다.

문제는 회담의 횟수나 형식이 아니라 회담의 목표다. 6자 회담의 목표는 '한반도의 안전과 비핵화'의 실현이다. 이것 외에 다른 목표가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6자 회담을 추구할 이유가 없다. 만약 미국이 6자 회담을 북한의 일방적 무장해제나 선제공격을 위한 '시간 끌기와 명분 쌓기'의 공간으로 활용하려 한다면 6자 회담은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수단으로 전개되는 전쟁에 불과 하기' 때문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왕자루이 부장과의 회담에서 "6자 회담의 조건이 성숙된다면 그 어느 때든지 회담탁(테이블)에 나갈 것"이며 "미국이 믿을 만한 성의를 보이고 행동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지난 3월2일 외무성 비망록에서 ▶'폭정의 종식'발언에 대한 사죄·취소, ▶적대시정책 포기의 정치적 의지 표명·실천행동, ▶3차 6자 회담에서 합의한 '동시행동원칙'의 복원 등을 '회담의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미국이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지난 3차 6자 회담에서 스스로 공약한 합의를 존중한다면 얼마든지 회담에 복귀하겠다는 뜻이다.

만약 미국이 '한반도의 안전과 비핵화'라는 회담의 목표에 동의한다면 이 같은 북한의 제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미국이 북한의 제안을 거부하고 '지체 없는 회담 복귀'만을 요구한다면 미국은 6자 회담의 공간 내에서 '또 다른 불순한 목적'-북의 붕괴와 정권교체-을 추구하고 있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물론 정욱식씨의 견해처럼 북한이 핵무장보다 6자 회담에 복귀하여 주변국들을 설득하고 이를 통해 부시 행정부를 압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현실외교는 이상적인 논리의 설득 과정만은 아니며, 주변국에 대한 정치적 고려는 부시 행정부의 최우선적인 정책적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무조건 회담 복귀'를 통한 '정치적 억제력'이 얼마나 실효성을 가질지 의문이다.

북한이 현실적으로 미국의 '전략적 결단'-대북적대정책 포기-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물리적 억제력'과 '정치적 억제력'을 동시에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국제정치의 냉정한 현실 때문이며, 직접적으로는 부시 행정부의 패권적 대북정책 때문이다.

북한이 6자 회담에 무조건 복귀하게 되면 '오히려 미국의 시간 끌기와 명분 축적이 더욱 용이해지는 측면이 있'다. 미국의 입장 변화가 없는 조건에서 무조건 6자 회담에 복귀한다면 그것은 부시 행정부에 지난 4년간의 과정을 더 지속할 수 있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추구하는 진지한 탐구자의 처지에서는 '미국이 계속 적대정책으로 일관'하여 6자 회담이 지연된다면 '상황 악화 및 문제 해결 지연의 책임이 미국에게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 '정치적 억제력'의 측면에서도 '무조건 회담 복귀'보다 '조건 성숙 후 회담 복귀'가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6자 회담의 개최 여부가 아니라 6자 회담의 목표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북한과 미국이 6자 회담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면 6자 회담은 백 번을 해도 무의미한 회담이 될 것이다. 6자 회담은 미국이 하기에 달려 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의사를 포기하면 '그 어느 때든지' 6자 회담은 재개될 수 있는 문제다.

민족공조는 최선의 '정치적 억제력'

지금 우리 민족은 19세기말, 20세기 초와 같은 격동적인 역사적 시점에 들어섰다. 우리는 지난 백년간의 역사적 실패를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백년의 서막을 열 것인가라는 절박한 민족사적 문제를 올바로 해결해야 한다.

북미관계가 극한 대결점으로 치닫고 있는 현 상황에서 '남북관계가 정상화되지 못하면 민족공동체 운명은 타자화(他者化)될 수밖에 없'다.

민족공조는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최선의 '정치적 억제력'이며, 한반도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또 하나의 담보다.

독도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민족공조의 현실성을 절감하게 된다. 독도를 수호하기 위한 우리의 필사적인 노력을 지지하고 있는 우방은 미국도, 중국도, 러시아도, 유럽연합도 아닌 북한뿐이다. 21세기를 주도하기 위한 동북아 일대 각축전에서 우리의 유일한 우군은 동족뿐이라는 사실이 더욱 명확하게 확인되고 있다.

북한 핵무장 직후 체니 부통령과 월포위츠 부장관은 미국을 방문한 반기문 장관에게 대북지원 중단을 요구했다. 며칠 전 헨리 하이드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은 한국의 주적이 누구인지를 밝히라며 오만무례한 태도로 우리 정부를 협박하였다. 이 같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현 정부가 '북핵 문제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처해 나가'고 있는 것은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더 큰 용단이 필요할 때다. 북한이 '핵 억제력'으로 동북아 정세를 주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민족공조의 억제력'으로 한반도 문제를 주도해야 한다. '남북이 평화지향적인 민족공조에 나설 때, 외세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도전이자 기회'다. '핵무기 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민족공조의 위력이다.

지난 해 몇 가지 사건으로 지금 남북 관계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문파동, 대규모 기획 탈북, 북한 인터넷 차단 등 남북 간의 정치적 신뢰를 크게 훼손하는 지난 해 많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당국간 대화가 장기간 표류하고 있다.

3월 19~20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하고 3월 20일부터는 제2의 팀스피리트 훈련이라 일컫는 한미연합전시증원·독수리 통합훈련이 시작된다. 현 상황에서 대규모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더구나 라이스 장관의 방한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미국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끌려 다닌다면 한반도 상황은 더욱 어려운 국면을 맞게 될 것이다.

'한미동맹'은 더 이상 우리의 미래가 아니다. 이제 선험적인 '한미동맹 우선론'에서 벗어나 진정한 국익을 추구해야 하면 우리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족적 용단'을 내려야 한다. 정상회담이 필요한 시점은 핵문제 해결 이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다. 더 이상 미국의 눈치를 보며 정상회담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만약 지금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 민족통일의 획기적인 길을 열어 놓는다면 그것은 '핵무기보다 더 강력한 억제력'이 될 것이며,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결정적인 '정치적 억제력'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정책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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