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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북한의 핵무장은 핵위기 악순환 '종식'시킬 것

정욱식 기자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께 드리는 공개편지에 대한 반론
05.03.10 15:52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평화네트워크의 정욱식씨는 오마이뉴스 기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께 드리는 공개편지, 북한은 '악순환의 늪'에 빠지고 있습니다'에서 북한은 '지금과 같은 북의 대미 전략으로는 미국의 대북정책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핵무장으로 북한은 '군비경쟁의 늪', '악순환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고, 때문에 '북이 오판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조선반도의 핵문제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의 산물이고, 최소한 북측의 핵 포기가 미국의 적대정책 철회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정욱식 씨의 주장에 대체적으로 공감하면서 위 기고에 대한 몇 가지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북한의 붕괴나 정권교체는 미국의 일관된 전략

'북의 붕괴나 정권교체'는 북한이 핵무기를 가졌든 안 가졌든 미국의 일관된 전략이다. 분단 이후 지난 60년 동안 미국의 대북전략은 단 한번도 바뀐 적이 없으며, 북한붕괴전략은 부시 행정부의 독창적인 발명품도 아니다.

만약 '북의 붕괴나 정권교체'가 부시 행정부와 신보수주의자들의 전유물이라면 소위 '비둘기파'라는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 시절 발생한 2차례의 전쟁위기-93·94년, 98·99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94년 북한과 제네바 합의를 채택했던 클린턴 정부는 90년대 말까지 소위 '3·3·3론'-3일, 3개월, 3년 안에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는 주장-에 매달려 집요하게 북한 붕괴를 추구했다. 클린턴 정부는 집권 마지막해인 2000년까지 경수로 건설의 20%도 진행하지 않았으며, 중유공급을 제외하곤 북미기본합의를 대부분 이행하지 않다.

클린턴 행정부가 북미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온 것은 98년 8월 북한의 광명성 1호 발사 이후의 일이다.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으로 위기감이 높아진 클린턴 정부는 98년 11월 윌리암 페리가 이끄는 '북한정책 검토팀'을 구성하고 북한에 대한 정책을 광범위하게 검토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페리는 99년 5월 25일에서 28일까지 북한을 방문하여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강석주 외무성 부상 등과 회담한 이후 9월 15일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 지침서라 할 수 있는 페리보고서를 발표하였다.

페리보고서에 기초하여 99년 말 워싱턴과 베를린에서 북미대화가 재개되었고 이는 2000년 10월 '북미공동코뮤니케'의 채택으로 이어져 북미관계 정상화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만약 북한이 광명성 1호를 발사하지 않았다면 클린턴 정부 역시 합의 이행을 차일피일 미루며 '북의 붕괴나 정권교체'를 지속적으로 추구했을 것이다. '북의 붕괴나 정권교체'는 북한의 핵무장과는 무관하며,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일관된 미국의 대북정책일 뿐이다.

대화냐, 대결이냐는 북미간의 힘의 역학관계에 따라 결정되었지 백악관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되지 않았다.

정욱식씨는 '부시 행정부는 있지도 않은 대량 살상무기 정보를 왜곡하면서 이라크 침공을 강행했'으며, '유럽연합과 이란 사이의 핵 협상이 진전을 이루자 이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면서 이란의 인권, 정치체제를 집중적으로 문제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미국의 본질이고, 미국의 생리다.

대량살상무기의 유무는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적대정책, 군사적 위협의 원인이 아니다. 대량살상무기가 있건 없건 미국은 '정보를 왜곡'해서라도 자신들의 정치, 군사적 목표를 실현했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졌건 말건 미국은 '북의 붕괴나 정권교체'가 실현될 때까지 결코 대북정책을 전환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의 방어능력이 한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이라크처럼 북한을 공격할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핵무장 이전에 이미 '북의 붕괴나 정권 교체를 유도'하고 있었다. 북한은 미국이 '북의 붕괴나 정권교체를 유도'하려 하기 때문에 핵무장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북한의 핵무장으로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은 없다. 오히려 북한의 핵무장은 북미간 힘의 균형을 가져와 북미대화를 촉진하는 결과는 낳게 될 것이다.

부시 정부가 미사일방어체제 등 군사패권주의를 추구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물론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은 '북위협론'을 구실로 군사패권주의를 강화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장을 하건 말건 이들은 무슨 구실을 붙여서라도 자신들의 군사적 목표를 실현할 것이다.

정욱식씨는 '부시 행정부는 미사일방어체제(MD) 등 군사패권주의를 추구하는데 '북위협론'을 최대 구실로 활용 해 왔'다고 했지만 북한이 핵무장을 하기 전부터 미국은 미사일방어체제를 추구해왔고, 미군 재배치 등 미국의 신국방전략은 부시 정권의 출범이후 급작스럽게 등장한 것도 아니다.

북한 핵무장이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의 원인이 아니라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북한 핵무장의 원인이다.

북한의 핵무장은 불가피한 악순환의 결과

북한은 이미 80년 말 대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목표로 하였다면 적어도 80년대 말 일정량의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었으며, 90년대 후반부터는 핵무기를 다량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21세기가 시작되기 전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한 군사대국이 되었을 것이다.

북한은 1975년 IRT-2000형(열출력 2메가와트급) 연구용 원자로를 만들어 처음으로 그램 단위의 플루토늄을 자체 기술로 추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1980년 7월부터 5MWe 흑연감속원자로 설계에 착수하여 86년 10월부터 영변의 5MWe 원자로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하였고 95년과 96년 완공 목표로 영변-85년 착공-과 태천-89년 착공-에 2기의 대용량 원자로 건설을 추진하였으며 635MWe의 대용량 원자로 건설을 계획하고 있었다.

북한은 1985년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였고 북한의 핵능력이 증대되자 88년 말 미국은 북미대화를 재개-54년 제네바 회담 결렬이후 최초로-하였고, 결국 북한의 동시사찰론에 밀려 미국은 91년 말 한반도에서 전술핵무기 철수를 선언하고 팀스피리트훈련을 중단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은 92년 1월 국제원자력기구와 핵안전협정에 서명을 하였다.

그러나 92년 부시 1세가 재선에 실패하고 새로 집권한 클린턴 정부가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는 등 북한에 대한 정치, 군사적 압력을 강화하자 북한은 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였고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시험이후 93년 6월 북미대화가 재개되면서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잠정 유보하였다.

그러나 94년 또다시 위기가 고조되자 북한은 94년 5월 영변의 5MWe 원자로의 폐연료봉 교체작업에 돌입하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김일성 주석과 카터 전 대통령 간의 극적인 합의에 따라 94년 북미기본합의가 채택됨에 따라 모든 핵시설을 동결하고, 50MWe원자력발전소, 200MWe 원자력발전소 건설도 중단하였다.

북한이 만약 미국과의 대화를 회피하고 96년까지 예정된 2기의 대용량 원자로를 완공하였다면 97년부터 연간 최대 270Kg 이상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핵탄두 1기를 생산하는데 2∼3Kg의 플루토늄이 소요된다고 할 때 연간 100여기 이상의 핵탄두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96, 97년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정치, 군사적 압력이 최고조에 이른 해다. 생존을 위해 북한에게는 핵무장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제네바합의와 미국의 선의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핵동결을 유지하였다.

이것은 핵무장이 북한의 목표가 아니라 미국의 체제보장이 북한의 목표라는 점을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나, 미국은 94년 합의에도 불구하고 대북전략을 변화하지 않았다. 때문에 북한은 98년 인공위성 발사로 미국을 압박했고 북한의 군사적 능력이 증대되자 결국 클린턴 정부는 협상을 선택하였다.

핵위기의 '악순환'는 여기서 종결되는 듯 했지만 새로 당선된 부시 정부는 지난 10여 년 간의 과정을 모두 무시하고 상황을 원점으로 회귀시켰다.

부시 대통령은 집권 이후 6개월 간의 침묵을 깨고 지난 2001년 6월 6일 '핵, 미사일, 재래식무기' 문제를 의제로 한 북미대화를 제안하였다. 부시가 '핵, 미사일, 재래식무기' 문제를 의제로 북미대화를 제안한 것은 94년 북미기본합의와 2000년 북미공동코뮤니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부시 정부의 대북적대정책이 가시화되는 시점에 9·11사건이 발생한다. 역사상 유례 없는 대참사로 미국 내 분위기는 급격히 보수화 되었으며, 탈 미국화를 추구하던 서방 동맹국들은 분노한 미국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백악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9·11사건을 빌미로 중앙아시아의 전략적 거점인 아프간을 침공하였고, 반미성향의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켰다.

전쟁승리에 도취된 백악관의 신보주주의자들은 2002년 1월 '핵태세검토보고서'(NPR)에서 비핵국가에 대한 핵선제공격을 포함한 새로운 핵전략을 공식 채택하였다. 2002년 1월 30일 부시는 국정연설에서 '전쟁의 해'를 선포하고 '북한,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지목하였다. 이것은 북한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것이며, 이로써 북한이 미국의 핵선제공격 대상임이 확인되었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북미합의는 파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2002년 9월 20일 부시 정권은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을 통해 소위 '부시 독트린' 혹은 '럼스펠드 독트린'로 불리는 선제공격전략을 확정하였다.

이에 따라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하였고 이때부터 '이라크 다음에는 북한'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2003년 2월에는 노무현 정부에 제한적 북폭계획을 통보-물론 현 정부를 길들이기 위한 목적이었지만-하기도 하였다.

2003년 3월부터 제2의 팀스피리트 훈련이라 할 수 있는 한미연합전시증원·독수리 통합훈련이 시작되었고 8월에는 그동안 컴퓨터 시뮬레이션만으로 진행되었던 을지포커스 렌즈 훈련을 실전훈련으로 전환하여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2004년에는 사상 최초로 휴전선 인근에서 미 해병대 8000여명이 참가한 '프리덤 배너 04'가 진행되기도 했다.

또 미국은 작전계획 5026, 5027, 5028, 5029, 5030 등 선제공격 시나리오를 연일 쏟아 놓으며 한반도 정세를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몰고 갔다.

부시 정권은 막후에서 북한침공계획을 추진하면서 2002년 10월초 북한과의 첫 대좌를 갖는다. 2002년 10월 켈리 방북의 목적은 미국의 전쟁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한 정치적 환경을 마련하는 것, 즉 북미기본합의를 공식적으로 파기하는 것이었다.

켈리는 강석주 외무성 부상과의 회담에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고농축우라늄방식 핵개발의혹'을 끈질기게 제기하였고, 북한이 '대량살상무기와 탄도탄 미사일 개발 및 수출, 주변국에 대한 위협, 테러 지원, 북한 주민에 대한 비참한 처우 등과 같은 현안에 대해 입장을 전향적으로 바꾼다면'이라는 단서를 대화의 전제로 달았다.

미국 측의 무리한 요구로 대화는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없었고 켈리의 강압적인 요구에 강석주 부상은 핵무기보다 '더 강력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고 맞받아 쳤다. 미국은 강석주 부상의 발언을 두고 북한이 핵개발을 시인하였다며 2002년 12월분 대북중유공급을 일방적으로 중단하였다.

미국이 북미기본합의 중 유일한 이행사항이었던 중유공급마저 중단함으로써 94년 합의는 완전히 파기되었다. 부시 집권 2년 만에 결국 한반도 핵문제는 94년 10월 21일 이전 상황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이것은 부시 정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사태다.

북미기본합의가 파기된 조건에서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미국의 요구대로 무장해제를 하고 굴복하든지 아니면 핵무장으로 자국의 안보문제를 해결하든지 둘 중 하나 뿐이다. 적대국가의 군사적 위협이 증대되는 상황에서 무장해제는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 만약 북한이 무장해제를 선택하였다면 이라크 상황이 한반도에서도 재연되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핵무장뿐이었다.

북미기본합의가 파기되자 결국 북한은 2002년 12월 14일 핵동결 해제를 선언하고 2003년 1월 10일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였다.

2월 14일 영변핵시설 재가동, 3월초 폐연료봉 교체작업 시작, 6월말 폐연료봉 교체작업 완료까지 핵공정이 진척되는 매 단계마다 북한은 미국 측에 이를 통보하였고 대화와 협상을 촉구하였다.

3월초 폐연료봉 교체작업 통보 이후 4월말 베이징 양자회담이 개최되고, 6월말 폐연료봉 교체작업 완료 통보 이후 8월말 1차 6자 회담이 개최되었지만 미국은 일방적인 무장해체만을 거듭 주장하며 회담을 고의적으로 지연시켰다.

결국 대화와 협상을 위한 노력이 무산되자 북한은 2003년 9월 3일 최고인민회의에서 '핵억제력 강화'를 선언하고 북미기본합의의 만료시한을 하루 앞둔 2003년 10월 20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재처리된 플루토늄의 용도변경 작업이 성과적으로 완료되었음을 공식 선언하였다.

북한의 플루토늄 용도변경 작업이 완료되자 2003년 11월부터 2차 6자 회담설이 흘러나왔지만 미국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북한은 2차 6자회담의 성사가 불투명해진 12월 15일 노동신문 논평을 통해 미국이 동시행동 일괄타결 방식의 제1단계 조치를 합의한다면 '핵무기를 더 만들지 않으며 시험도 하지 않고 이전도 하지 않으며 평화적 핵동력 공업까지 멈춰세우는 동결'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핵무기 보유를 공개적으로 시사하였다.

북한이 '핵억제력 보유'를 거듭 천명하자 미국은 그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비공식 대표단을 북한에 파견하였다.

스탠포드대 존 루이스 교수와 로스 알라모스 국립핵연구소 전 소장 핵커 등 미국의 핵물리학자들은 2004년 1월 6일부터 10일까지 북한을 방문하고 영변의 핵시설을 참관하였다.

북한은 미 대표단이 영변 핵시설 '참관을 하도록 한 것은 우리의 핵 활동과 관련한 억측보도들과 모호성이 당면한 핵문제해결에 지장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즉,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질질 시간만 끌고 있기 때문에 대화의 진전을 위해 그 진상을 미국이 직접 확인하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북한은 미국 인사들에게 자신의 핵억제력을 공개함으로써 핵보유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루이스 교수 일행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던 잭 프리처드 전 대북특사는 2004년 1월 21일자 뉴욕 타임즈 기고 '내가 북한에서 보고 온 것'에서 자신은 1월 8일 영변에서 '8천 개의 폐연료봉이 저장되어 있던 영변의 핵시설을 볼 수 있'었으며 '8천 개의 연료봉이 모두 옮겨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프리처드는 기고에서 북한이 94년 합의 이전 1∼2개의 핵무기를 획득하였다면서 지난 1년 동안 북한의 '핵 비축량은 4배가 더 늘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계관 부외상의 말을 인용 '시간은 미국 편이 아니'라며 이것은 '실패한 대북한 정책의 묘비명이자 미 정보계에 대한 고발장이나 마찬가지'라고 부시 행정부를 강력히 비판하고 '지금은 북한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면서 부시 행정부의 대북한정책 전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북한의 핵보유가 기정사실로 확인되자 2004년 2월 미국은 다시 2차 6자 회담에 나왔다. 미국은 북한의 핵무장이 임박해지자 마지못해 회담장에는 나왔지만 그들은 협상할 준비도, 의지도, 대안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요구하는 선핵포기 안을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다시 회담은 공회전되었고 참가국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 갔다. 2004년 5월 12일부터 14일까지 베이징에서 6자 회담 실무그룹회의가 진행되었지만 상황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북한은 핵 동결의 대상, 기간, 시점과 검증방법 등 구체적인 사항들을 실질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안을 가지고 나왔지만 미국은 '완전하고도 검증가능한 되돌릴 수 없는 폐기'(CVID) 후 안전보장이라는 선핵포기론만을 고집하였다.

결국 미국의 근본적인 태도변화가 없는 한 6자 회담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북한은 마지막 기대를 가지고 부시 2기의 출범을 지켜봤지만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미국담당 부상은 부시 취임식 직전 방북 했던 커트 웰던 미 하원 군사위 부위원장을 비롯한 미 의원단에게 북한은 핵무기 보유국가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부시 정부에 보내는 최후 통첩이었다.

웰던은 이 같은 사실을 부시 행정부에 전달했지만 백악관은 북한의 핵보유선언이 임박했다는 현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 2기의 실세로 일컫는 콘돌리자 라이스는 제2의 악의 축 발언과 다름없는 '폭정의 전초기지', '폭압국가' 발언으로 분위기를 험악하게 몰고 갔다. 2월 2일 국정연설에서 부시는 마지못해 대북발언수위를 낮추기는 했으나 대북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결국 북은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핵무장선언이라는 예정 수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2001년부터 현재까지의 과정을 돌이켜 보면 북한이 핵무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부시 자신이다. 미국은 수 차례의 협상 기회를 아집과 오만, 독선에 빠져 스스로 집어 던지고 말았다. 북의 핵무기는 사실상 부시와 신보수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 군사적 위협을 철회하지 않는 조건에서 핵무장은 북한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일 수밖에 없다. 아프간, 이라크의 정부가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사태를 보면서 북한이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핵무장 뿐이었을 것이다.

미국은 4차례 이상 북한의 핵무장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단지 대북적대정책을 철회하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미국은 그것을 거부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북한은 핵무장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한의 핵무장은 미국의 패권정책이 빚어낸 필연적인 결과다. 또 90년대부터 반복되어온 핵위기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일 뿐이다.

미국의 '악의적인 무시' 전략은 성공할 수 없다

정욱식씨는 북한이 '핵시위를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철회를 압박하는 동시에, 미국과의 협상이 실패할 것에 대비해 대미 억제력의 확보도 염두'에 두는 '양면 전략'을 취해 왔지만 '이 두 가지 전략 가운데 어느 것도 성공하기 쉽지 않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정욱식씨의 전망과는 다르게 북한의 대미 전략은 이미 성공하고 있다. 북한의 핵무장은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전쟁 발발 가능성을 현저하게 감소시키고 있다.

2002년 하반기부터 북미관계가 크게 악화되면서 거의 매달 전쟁위기설이 흘러 나왔다. 그러나 북핵문제가 '금지선'-미국은 북한이 폐연료봉 교체작업에 돌입할 경우를 금지선으로 설정했었다-을 넘어 '임계점'에 도달했지만 지금은 누구도 한반도 전쟁 위기를 논하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핵무장선언 직후인 지난 2월 17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은 이라크와 다른 상황"이라면서 "지금은 (북핵) 해결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우방 및 동맹국들과 협의해 이 문제에 어떻게 공동으로 대처할지를 결정할 때"라고 말했다. 북한 핵문제를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겠다는 뜻이다.

6자 회담 미국측 수석 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주미대사도 2월 18일 고려대 주최 간담회에서 "미국은 북핵 문제를 외교적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으며 북핵 과정이 성공적으로 마쳐질 수 있기를 원한다"고 말해 군사적 카드의 사용을 배제하였다.

북한이 핵무장에 성공함에 따라 미국은 이에 대한 군사적 대응수단이 확보되기 전까지 군사적 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

정욱식씨는 전쟁보다는 군비경쟁의 악순환과 신냉전의 가능성을 우려하면서, 미국이 '중장기적으로 북을 붕괴시킬 수 있는 군사적·비군사적 수단을 차곡차곡 준비해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이것은 북한의 핵무장 이후 최소한 단기적인 전쟁가능성은 현저히 감소하였다는 점을 인정한 부분이다.

이것만으로도 북한으로서는 커다란 성공이다. 북한의 핵무장으로 미국은 한반도에서 이라크와 같은 방식을 더 이상 추구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이 '악의적인 무시'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북한의 핵무장이 미국의 군사적 카드를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북한이 핵무장으로 얻어낸 가장 실질적이고 중요한 성과이다.

이미 북한의 대미전략은 1차 적인 성공을 거뒀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문제는 미국의 '악의적인 무시'전략이 과연 성공할 수 있는가다. 정욱식씨는 '부시 진영은 북이 핵무장을 하더라도 그 파장을 줄일 수 있다면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는 판단도 갖고 있는 것 같'다며, '북이 핵 물질과 기술을 외부로 이전하는 것을 '금지선'(red line)으로 설정해 이를 봉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론을 억제할 수 있다면 부시 행정부로서는 실보다 득이 클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이 실제적으로 북한 핵무장의 파장을 줄이고 '금지선'을 유지할 수 있는가다. 정욱식씨의 분석처럼 미국의 두 가지 전략, '봉쇄와 억제' 중 억제전략은 일시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압도적인 정치·경제적, 군사적 영향력을 고려할 때 부시 정부는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을 일정기간 억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봉쇄는 문제가 다르다. 북한이 적극적으로 '핵 물질과 기술을 외부로 이전'하려 한다면 과연 미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제2의 쿠바 위기와 같은 상황이 전개될 경우 미국은 더 이상 '악의적인 무시' 전략을 지속할 수 없다. 북한과 협상을 하든지, 전면전 하든지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한다.

북한이 앞서 언급한 2기의 대용량 원자로 건설을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한 2003년 1월부터 재개하였다면 50MWe 원자로는 2004년 중, 200MWe 원자로는 2005년 중 완공이 가능하다. 늦어도 2006년부터 북한은 연간 270Kg 이상의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게 되며 연간 100기 이상의 핵탄두를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또 2000년 중단한 장거리미사일시험을 재개할 경우 2005년을 고비로 북한은 '대량살상무기, 대량생산체제'를 갖추게 되며, 미국의 비확산 정책은 중대한 고비를 맞게 될 것이다.

정욱식씨는 '부시 행정부는 근본적으로 위협을 필요로 하는 정권'이라고 했지만, 부시 행정부가 필요로 하는 위협은 '실질적 위협'이 아니라 제압이 가능한 '가상의 위협'일 뿐이다.

만약 북한이 '실질적 위협'으로 등장하여 미국의 비확산 정책을 위협한다면 상황은 지금과 다르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미국의 '악의적인 무시'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앞으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군비경쟁 문제도 북한보다는 오히려 미국의 부담이 크다. 정욱식씨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실질적인 대미 억제력을 갖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면서 ▲핵무기를 탄도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소형 핵탄두 제조 기술의 확보, ▲상대방의 선제공격으로 핵무기가 파괴되어도 보복공격을 할 수 있는 '여분의' 핵무기 확보, ▲상대방의 선제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경보 즉시 발사' 태세 확보, ▲상대방의 동향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는 정보력의 확보 등을 들었다.

'이러한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과 첨단 기술, 그리고 오랜 시간이 요구'되며, 또한 북은 영토가 작기 때문에 핵무기의 분산 배치가 어렵고, 지하시설 깊숙이 은폐시킬 경우 신속한 대응 공격이 어려워진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력을 확보'하기 위한 엄청난 돈과 오랜 시간은 개발 초기 단계의 부담일 뿐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북한은 핵과 탄도미사일 분야에서 모두 초기 개발단계를 벗어났기 때문에 추가 비용부담은 현저히 줄어 들 수밖에 없다. 오히려 핵억제력의 보유로 재래식 군비감축이 가능해 60년대부터 대폭 증가한 군비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더구나 방어를 목적으로 한 북한의 핵능력이 선제공격을 목적으로 하는 미국과 '대칭적 균형'을 이룰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핵전쟁을 위한 초과학적 선제공격 수단-MD, 지하관통소형핵무기 등-을 개발해야 하는 미국에 비해 비용 면에서 오히려 부담이 적다.

미국이 북한을 핵선제공격하기 위해서는 '일방적 확증파괴'가 실현되어야 한다. 즉 북한의 모든 핵시설을 초기 공격에서 완전히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단 한두 발이라도 북한의 핵무기가 살아 남는다면 미국은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미국은 MD와 지하관통소형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의 첨단무기 개발계획은 천문학적인 비용을 필요로 하는 반면 성공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오히려 군비경쟁의 '악순환'은 미국의 늪이 될 것이다. 또한 미국이 '북한의 경제적 취약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더라도 성공가능성은 미지수다.

북한 경제의 최대 약점은 에너지와 식량문제다. 그러나, 2005년을 전후로 2기 대용량 원자로가 완공되면 북한은 연간 약 1000MWt의 전력을 확보할 수 있으며, 이 정도의 전력이면 에너지 문제를 대체로 해결할 수 있다. 식량 문제도 대체로 위기 상황은 넘어선 것으로 분석되고 있으며, 90년대 말부터 추진하고 있는 대규모 토지개조사업이 완결되면 근본적인 타개가 가능하다.

최악의 경우라도 95-97년의 '고난의 행군'과 같은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다. 90년대 최악의 위기상황을 견뎌낸 북한 체제가 그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붕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더구나 중국이나 러시아가 북한 봉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극히 낮기 때문에 미국이 '북한의 경제적 취약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더라도 큰 실효성을 거두기 어렵다.

북한의 핵무장은 대화와 억제, 두 가지 측면에서 결국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미국은 소련의 대륙간 탄도탄 실험에 성공한 이후 미소대화를 시작하였고, 64년, 67년 중국이 핵과 수폭 실험 성공한 이후 중미관계 개선에 나서 결국 대만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1979년 외교관계 수립했다.

미국은 자신의 패권전략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의 핵무장을 계속 무시할 수는 없다. 결국 미국은 대화의 명분이 마련되는 시점에서 북한과 협상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스타워즈'(SDI)를 통해 소련이 붕괴'된 것이 아니라 '스타워즈'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공포감이 소련을 붕괴시킨 것이다. 소련 지도부의 미국에 대한 환상과 공포감이 스스로를 붕괴시킨 것이다.

물론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다. 그러나 영원한 제국은 있을 수 없다. 미국의 강대성 신화는 20세기에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다. 미국을 과소평가해서도 안되지만 과대평가해서도 안 된다.

정욱식씨는 핵무장으로 북한이 군비경쟁의 '악순환의 늪'에 빠질 것이라고 지적하면서도 핵무장 외에 핵위기의 악순환을 끊어낼 대안에 대해서는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

북한의 핵무장을 포기하는 것은 결국 리비아식 해법 또는 이라크 방식을 따르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한반도를 더 큰 위협으로 몰아넣는 무책임한 주장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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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자는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정책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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