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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항일명장 홍범도 장군
ⓒ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일제 강점기 독립전쟁의 첫 승첩지인 봉오동 전투의 영웅, 여천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2005년 2월 25일에 출범할 예정이다. 아래는 여천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발기인 대표를 맡고 있는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초대의 말씀이다.

모시는 글

2005년, 올해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해입니다. 치욕적인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지 100년이 되었고, 또 민족이 해방된 지 60주년, 회갑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100년, 그리고 60년의 역사는 우리에게 시련과 분노와 용기, 희망을 동시에 준 기간입니다. 이제 역사적으로 큰 획을 긋는 시점에서 민족사의 거대한 발자취를 더듬어 하나하나 다시 찾아내는 일은 우리에게 남겨진 중요한 과제입니다.

우리에게는 수치스런 역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대하고 보람찬 기록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만 분단과 냉전으로 남북의 집권 세력에게 유리한 부분만 부각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매몰되거나 망각되었을 뿐입니다.

새롭게 역사를 찾는 올해의 첫 사업으로 여천 홍범도(汝千 洪範圖) 장군의 위대한 업적과 비극적인 투쟁의 삶을 다시 찾는 작업을 시작하려 합니다.

부디 이 작업에 참여하시어 힘을 보태어 주시기 바랍니다.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발기인 대표 이종찬

- 여천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출범식 안내 -

일시 : 2005 . 2. 25(금). 17 : 00
장소 : 세종문화회관 세종홀
문의 : 02) 735-4111~3



독립전쟁 첫 승첩, 봉오동 전투

▲ 봉오동 계곡, 치열했던 전적지가 지금은 저수지로 변하였다
ⓒ 박도
봉오동 전적지는 연변조선족 자치주 두만강변 도문에서 불과 30리 정도 떨어진, 우리나라와 중국 국경에서 무척 가까운 곳에 있다.

이곳은 1920년 6월 7일 항일 명장 홍범도를 사령으로 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부대를 결성한 군단) 부대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두만강을 넘어온 일본군 제19사단 야스가와 소좌가 거느린 부대를 참패시킨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최초 승첩지이다.

▲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 일제 헌병 순찰소대 옛 터가 지금도 두만강 건너로 보인다
ⓒ 박도
봉오동전투는 사흘 전인 1920년 6월 4일에 있었던, 두만강변 삼둔자전투에서 비롯되었다. 그 날 새벽 30여 명의 독립군 소부대는 국내 진공작전으로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으로 가서 일제 헌병 순찰소대를 습격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일본군 2개 중대는 이를 보복하려고 독립군 추격에 나섰다. 이들은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에 이르렀으나,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 분풀이로 애꿎은 양민을 무차별 살육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쪽 범진령 산기슭에 잠복하고 있다가 돌아가는 일본군을 섬멸해 버렸다.

이에 함경북도 종성군 나남에 주둔했던 일본군 제19사단은 독이 바짝 올랐다. 그들은 삼둔자전투 참패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월강 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였다.

이들 추격대대는 야스가와 소좌 인솔로 6월 6일 밤 9시부터 두만강을 건너 이튿날 새벽 3시 30분에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진격해 왔다.

이런 낌새를 미리 알아차렸던 홍범도 장군은 그들과 교전에 앞서 봉오동 주민들을 산중으로 미리 대피시켜 마을을 비우게 했다. 그러고는 봉오동 상동 험준한 사방 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시켜 놓은 다음, 일본군 추격대대를 이곳으로 유인하여 포위망 속에 가둬두고 일망타진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1개 분대를 월강 추격대대가 쳐들어오는 길목에 내보내 교전하는 척하면서 봉오동 골짜기로 후퇴케 하여 그들을 유인했다. 그날 아침 8시 30분 무렵에 월강 추격대 첨병이 독립군 분대의 뒤를 쫓아 봉오동 들머리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온 일본군 추격대 첨병은 독립군 분대를 놓치고는 봉오동 하동을 정찰한 결과, 독립군이 이미 겁을 먹고 죄다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추격대 본대를 불러서 하동 마을을 뒤지면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노약자를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 일본군 월강 추격대는 봉오동 하동을 실컷 유린한 다음 오전 11시 30분에 다시 대오를 정돈하여 중동과 상동을 향하여 진군했다.

그 날 오후 1시 무렵에는 일본군 전위부대가 사방 고지로 둘러싸인 상동 남쪽 300미터 지점까지 진출하여 완전히 독립군 포위망 속에 걸려들었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곧장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주력부대를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후 전위부대에 이어 주력부대도 독립군 포위망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 봉오골 반일 전적비
ⓒ 박도
그제야 홍범도 장군은 일제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을 발사했다. 이에 삼면 고지에 매복하고 있었던 독립군의 총에서는 일제히 불을 뿜었다. 뜻밖에 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돌격해 왔다.

하지만 유리한 지형을 미리 차지한 독립군의 맹렬한 집중 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일본군 추격대는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그들은 독립군 포위망 속에서 3시간 이상 끈질기게 버텼으나 이미 작전상 허를 찔려 시간이 흐를수록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전투는 무모했음을 알아차리고는 후퇴했다. 통쾌한 승전이었다. 봉오동전투에 대한 전상자 피해는 독립군 일본군 양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비교적 객관적 자료인 당시 중국〈상해시보〉에 따르면 독립군이 일본군 월강 추격대를 150여 명이나 사살하여 크게 이겼다고 보도했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

▲ 여천 홍범도 장군
ⓒ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음력), 평양 서문 안 문렬사 부근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홍범도 아버지 홍윤식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홍범도 어머니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그녀는 인물이 남달리 뛰어나 관기(官妓)로 뽑혀갈 처지에 이르자, 외가어른들이 서둘러 홍윤식과 혼인시켰다.

이들 가난한 부부는 생계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혼 이태 후에는 아들을 얻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뿐, 산모가 해산한 뒤 하혈이 심하여 이레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홍윤식은 동네 아낙네들에게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어린 아들을 길렀다. 그러나 그도 아들이 아홉 살 되던 해 열병으로 세상을 떴다.

일찍 부모를 여읜 홍범도는 머슴살이, 막일꾼 등 닥치는 대로 했다. 그는 공장에서 막일꾼 생활 중에 공장주가 품삯을 일곱 달이나 주지 않고, 도리어 먹고 입고 잠잔 값을 받아야겠다는 데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공장주를 둘러치고는 그 길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외금강 신계사 주지 스님 앞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때 홍범도는 수도 생활 중에 여승 옥녀와 정이 들어 뱃속에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옥녀의 고향인 북천으로 가고자 금강산을 떠났다. 하지만, 원산 교외에서 불한당으로부터 변을 당한 홍범도는 옥녀와 생이별을 하고 방랑객이 되었다.

그는 그때 남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고 살아가자면, 남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했기에 무예를 닦는 길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홍범도는 강원도 회양에서 만난 포수로부터 사냥총 한 자루를 구입했다. 그 길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서 사냥꾼생활로 생업을 삼으면서 사격술과 검술을 닦았다. 뒷날 일본군들이 홍범도란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간담이 오싹했던 백발백중 사격술과 신묘한 검술은 그때 익힌 솜씨였다.

홍범도의 사상과 인생길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은 1894년의 갑오 동학혁명과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특히 일제의 낭인무리들이 남의 왕궁을 마음대로 포위해서 명성 황후를 난도질해 죽이고, 그 시신마저 장작더미에 던져 태워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난 홍범도는 울분이 하늘을 찔렀다.

▲ 봉오동 들머리에 있는 봉오골 반일 전적지 표지석
ⓒ 박도
1895년 10월, 홍범도는 강원도 단발령에서 만난 포수 김수협과 뜻이 맞아 항일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맹세한 후, 곧 무장한 일본군 12명을 통쾌하게 처치했다. 이를 시작으로 홍범도의 맹렬한 항일 무장투쟁이 펼쳐졌다.

일제 강압에 따라 정미 7조약이 체결된 후인 1907년 11월, 홍범도와 차도선은 의병대를 만들어 함경남도 후치령에서 일제 북청수비대를 섬멸하여 첫 개가를 올렸다. 그 뒤를 이어 홍범도 의병대는 함경남도 삼수·갑산에서 일제 군경과 수십 차례나 처절한 격전을 벌여서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경술국치 이듬해 1911년 봄, 홍범도는 정예부대를 인솔하여 첫 국내 진 격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원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개가를 올렸다. 또 1919년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 만포진을 공략하여 일본군과 3일간 격전을 치르면서 70여 명을 살상했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신출귀몰하는 전술로, 지금도 홍범도 장군은 우리나라 게릴라전의 비조(鼻祖)로 불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독립 전쟁 효시(嚆矢)로 일컫는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는 홍범도 장군 지휘 아래에 이루어졌다. 아울러 우리나라 독립전쟁사에 가장 빛나는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 역시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의 연합작전으로 거둔 성과다.

홍범도 장군은 일제에게는 '나는 장군'으로 저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우리 겨레에게는 독립전쟁의 영웅, '백두산 호랑이'로 추앙 받고 있다. 장군의 거룩한 발자취는 조국의 산과 계곡에, 압록강 두만강 굽이굽이에, 백두산 밀림과 드넓은 만주 벌판에,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 황야에까지 남겼다.

홍범도 장군은 1943년 10월 25일, 러시아 카자흐스탄의 크질 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구국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 봉오동 전적지, 산봉우리가 초모정자산으로 그 아래 왼편이 봉오동 중동 마을이고 오른편이 봉오동 상동 마을이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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