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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희복 차장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비롯한 분들은 진정한 역사의 승리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 이민우
"국가정보원이 과거사 진상규명을 하겠다면서 민족일보는 뺐는데, 그래선 안 되죠. 민족일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국정원은 지금이라도 모든 재판기록을 공개해야 합니다. 또 정부와 국회는 민족일보사건을 국가폭력사건으로 규정해 진상을 밝혀야 합니다. 역사에 대한 정확한 진상규명 없이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역사발전을 기대할 순 없기 때문입니다."

25일 오후 서울 향린교회에서 <조용수와 민족일보> 출판기념회를 연 경향신문 원희복 차장은 민족일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선 우선 재판기록의 공개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용수와 민족일보>는 지난 1994년 쓴 <조용수 평전>의 서문에서 자료를 추가 발굴해 계속 보완해 나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올해 1월 제가 심장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누워있을 때였어요. 아직 개정증보판을 내지도 못했는데 쓰러지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퇴원해서 몸이 회복되자마자 모아놨던 자료를 정리해 글을 썼습니다."

▲ <조용수와 민족일보> 책 표지. 표지인물은 조용수 사장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을 당하기 바로 전 모습이다.
ⓒ 이민우
초판인 <조용수 평전>이 민족일보와 조용수를 역사 현실 속으로 끄집어 낸 것이라면, 이번 책 <조용수와 민족일보>엔 그 후 10년간 발생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1994년 <조용수 평전>이 나온 뒤 불붙기 시작한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탄원과 진상규명위의 결성을 비롯해 두 차례의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1961년 당시 이른바 '혁명재판부'의 판사)와 관련된 논란 등 생생한 기록이 추가됐다.

"84, 85년에 군대엘 가 있었지요. 그런데 학교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했던 동료와 선·후배들이 검거됐습니다. 그때 함께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부채의식도 있고요. 또 오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주셨던 많은 분들이 겪으셨던 고난에 비해 너무 편하게 살고 있진 않나 하는 생각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거지요."

10년 전 <조용수 평전>을 쓴 건 "80년대 대학에 다녔던 사람이 느끼는 일종의 죄의식에서 비롯됐다"며 원희복 차장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대한 뒤 복학해서 86년에 '4·19 이후 5·16까지 학생차원의 통일론에 관한 연구'란 제목으로 졸업논문을 준비했어요. 대학도서관을 뒤지다 '민족일보'와 조용수란 이름을 만났지요. 채 100호도 되지 않는 그 신문 제본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조용수 사장이 사형집행 당했을 때 서른두 살밖에 안됐거든요. 그 뒤 조용수란 이름은 늘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원희복 차장은 "초판이 나온 뒤 민족일보 사건 재판기록을 찾기 위해 정말 많이 뛰어다녔지만 일부만 찾을 수 있었다"며 아직까지도 국가정보원이 진상규명은커녕 자료공개조차 하지 않고 있음을 질타했다.

"지난 김대중 정부시절 국정원이 사건 기록의 일부를 공개하긴 했습니다. 1961년 당시 경찰조사 기록이었죠. 그런데 조사기록에 번호가 매겨져 있는 걸 자세히 보니까 앞뒤에 상당히 많은 자료가 있는 가운데, 일부만 공개한 거였습니다. 국정원엔 사건의 진상과 관련된 더 많은 자료들이 틀림없이 보관돼 있습니다."

최근 과거사 진상규명에 대한 여론이 조성돼는 것과 관련해 원희복 차장은 "일부 언론에서 진상규명의 발목을 잡고 있지만 진상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며 힘주어 말했다.

"해방 후 지난 60년간 민주주의와 통일을 요구했던 수많은 사람이 정치권력에 의해 죽고 고난을 받았습니다. 시대의 패배자이자 시대를 앞서 간 패배자였지요. 하지만 전 그분들이 진정한 역사의 승리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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