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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미국 대선에 이어 2004 미국 대선은 양극화되고 있는 미국 사회를 보여준다. 미국 사회내 블루(blue)와 레드(red)의 대립은 단지 서로 의견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서로를 증오하는 수준까지 심화되고 있다. 이 같은 양극화는 정치는 물론 지역, 인종, 경제, 문화, 심지어는 스포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 원인은 묘하게도 세계화(globalization)에 있다.

세계화의 엔진이자 진원지인 미국이야말로 세계화의 영향을 가장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크게 받고 있다. 어느 때보다 치열한 선거전이 예상되는 2004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사회의 양극화된 이면을 현장취재한다. 블루와 레드는 미국대선 개표 때 주별로 민주당이 이긴 지역은 블루, 공화당이 이긴 지역은 레드로 표현한 데서 착안한 것이다... 필자 주



아칸소 주에서 고속도로 40번을 타고 오클라호마 주를 지나가는데 '눈물의 길(The Trail of Tears)' 사적 표지판이 보였다. 대륙의 가슴에 길고 깊게 패인 흉터라는 그 눈물의 길이다.

160여 년 전 미 남동부에 살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미군의 총부리에 못 이겨 애팔라치아 산맥을 넘고, 미시시피강을 건너, 멀고 먼 지금의 오클라호마 주까지 끌려온 길이라고 막연히 알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실제 그 길을 따라 가고 있는 중이다.

갑자기 '체로키 네이션 정보 센터(Cherokee Nation Information Center)'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체로키라고 하면 인디언 부족 이름일 테고 네이션이라고 하면 나라라는 뜻일 텐데 이 근처에 무슨 나라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Cherokee Nation Capital Tahlequa(체로키국의 수도 탈레쿠아)'라는 이정표가 나왔다. '진짜 나라가 있나 보다. 그러니까 수도가 있지'하고 생각하는 동안 그 쪽으로 갈 수 있는 출구를 놓쳤다.

눈물의 길은 한 줄기가 아니고 북쪽 루트(Northern Route), 물길(Water Route), 벨 루트(Bell's Route), 벤지 루트(Benge's Route) 등 여러 줄기다. 짧게는 수백 킬로미터에서 길게는 조지아 주에서 오클라호마 주까지 2천 킬로미터에 이른다. 한 부족이 아니라 여러 부족들이 추방됐기 때문에 종착지도 여러 곳에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종착지가 바로 체로키국(Cherokee Nation)의 수도인 탈레쿠아(Tahlequah)였다.

인디언 보기 힘든 체로키국의 수도

▲ 체로키 문화 유산 센터 앞에 있는 '눈물의 길'의 종착지 표지판
ⓒ 홍은택
탈레쿠아가 보고 싶어졌다. 인디언 부족이 나라를 건설하고 거기에 번듯한 수도까지 있다면 근사할 것 같았다. 도심은 머리에 깃털을 꼽고 상체를 훤히 드러낸 사람들로 붐비지 않을까. 그러나 원래 예정한 곳이 아니어서 차를 돌려서 가기는 무리라고 생각해 '눈물'을 머금고 지나쳤다.

그 때는 텍사스에 가던 길이었는데 텍사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불현듯 탈레쿠아가 떠올랐다. 탈레쿠아를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거기에 있는 체로키 문화유산 센터의 야외 극장에서 마침 '눈물의 길: 나라의 재건(Trail of Tears: Rebuilding a Nation)'이라는 제목의 연극이 상연된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그 연극도 볼 겸해서 탈레쿠아를 들르기로 결심했다. 텍사스 애빌린(Abilene)에서 출발, 꼬박 7시간반이 걸려 공연 시작 시간 직전에 야외극장에 도착했다. 훌륭한 극장이었다. 울창한 숲 속에 1800명이 앉을 수 있는 관람석이 있고 무대는 최대한 자연을 활용, 바위와 돌로 돼 있다. 선전하는 대로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외 공연장 중 하나에 꼽힐 만했다. 여름에 더울 때는 가는 수증기를 공중에 뿌려 기온을 낮춰주는 시설까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없다. 비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있으니까 몇몇 관람객들이 왔다가 우두커니 비가 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야외 극장은 이게 안 좋다. 극장 측에서는 지난 6월에 공연을 시작한 이후로 공연을 못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위안은 커녕 더 기분이 안 좋다. 비의 첫 피해자가 되다니…

이튿날에도 비가 내렸다. 연극은 포기하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5만평의 숲 속에 있는 문화유산 센터의 구석구석을 관람했다. 우리로 치면 민속촌인 고대 마을도 있어서 고대의 민속을 재연해 보였고 19세기 체로키 마을도 애덤스 코너 마을(The Adams Corner Rural Village)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돼 있었다. 문화유산 센터 안에 있는 박물관은 시청각적 효과도 곁들여서 간결하고도 효과적으로 체로키 유산을 전시하고 있었다.

▲ 체로키 문화 유산 센터 안에 있는 야외 원형 극장
ⓒ 홍은택
2000년 인구 센서스에서 체로키는 72만9533명으로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인디언 부족이었다. 이중 25만 명 정도가 체로키국의 국민이라고 한다. 체로키 부족은 아칸소, 미주리, 캔자스, 테네시, 노스 캐롤라이나 등 8개 주에 퍼져 있다.

그런데 수도인 탈레쿠아는 완전히 기대와 달랐다. 맥도날드 햄버거,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월마트와 같은 체인점들에다 대형 쇼핑 몰로 가득 찼다. 미국의 어느 소도시와 다를 바 없거나 오히려 소비도시의 성격이 더 유난스러워 보였다. 인디언 나라의 수도라는 흔적은 체로키국의 특색 없는 정부 건물들이 몇 채 있는 것뿐이었다.

더구나 머리에 깃털은 꽂지 않더라도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시내 피자 집에서 일하는 청년 조셉 블랙번(Joseph Blackburn)이 그날 저녁 유일하게 마주친 인디언이었다. 하지만 그는 체로키 족이 아니다. 수(Sioux) 족 출신이다. 와이오밍 주에 있는 리버톤(Liverton)에서 살다가 15년 전 부모와 함께 탈레쿠아로 이사했다. 보호구역(reservation)에 만연한 범죄와 도박, 음주 등을 피해서 왔다는 것이다.

▲ 수도 탈레쿠아 도심에서 만난 아메리칸 인디언 청년 조셉 블랙번
ⓒ 홍은택
“왜 여기서 인디언들을 보기 힘든가.”
“여기서는 모여 살지 않기 때문이다.”

인디언 부족들은 주로 보호구역(Reservation)이라고 불리는 곳에 모여 살지만 이 체로키 부족은 보호구역이 따로 없다. 그래서 대단위로 모여 살지 않는다. 탈레쿠아만 해도 인구 1만4천명의 소도시다. 그 중 인디언 인구는 4천명도 안 된다. 명색이 체로키국의 수도인 여기에서도 인디언은 소수다. 60%가 백인이다. 그러니 안 보일 수밖에.

아메리칸 인디언의 조상이 베링해를 건너온 아시아(몽고) 인종이라는 설이 다수설이라고 한다. 하지만 먼 옛날 유럽에서 건너온 코카서스 인종과도 섞였다는 학설도 최근에 나오고 있는데 근대 코카서스 인종의 북미 대륙 침입을 합리화하기 위한 제국주의적 음모가 숨어있는 학설이라는 의심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체로키국에 와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기왕에 알고 있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이미지를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화 유산 센터의 고대 마을에서 일하는 데보라(Debora)도 인디언 같아 보이지 않았다.

▲ 체로키 문화 유산 센터의 고대 마을에서 과거의 요리 민속을 재연하고 있는 데보라
ⓒ 홍은택
“미안하지만 당신은 인디언 같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독일계 인디언이다. 아버지가 인디언이었다. 부족의 어르신께서 중요한 것은 핏줄보다 자신의 선택이라면서 체로키가 되기로 선택한 것을 명예스럽게 생각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핏줄은 데보라가 얘기한 것보다는 더 심각한 문제다. 다음 회에 이 말 뜻을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일단 미 정부의 관청인 인디언부(Bureau of Indian Affairs)에서 정한 기준은 인디언이 되려면 첫째, 미 연방정부가 인정한 인디언 부족에 속해야 하고 둘째 이 부족의 피가 절반 이상 섞이거나 또는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최소한 4분의 1은 섞여야 한다.

고대 마을에서 돌로 화살촉을 쪼고 있는 드사이즈는 아일랜드와 독일 그리고 체로키의 피가 섞였다고 말했는데 그의 경우 다른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정부에서 인정하는 인디언은 될 수 없다.

‘개화된’ 체로키 부족

체로키 부족은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말을 타고 창으로 들소를 잡아서 먹고 사는 그런 부족은 아니었다. 사냥도 했지만 농사를 지으며 한곳에 정착해 살았고 동물의 가죽으로 만드는 원뿔형 천막(Tepee) 대신 흙으로 된 집을 짓고 살았다.

▲ 돌을 쪼아 화살촉을 만드는 시범을 보여주는 드사이즈
ⓒ 홍은택
그들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개화된 5개 부족(five civilized tribes)'중 하나로 불린다. 특히 1809년 세쿠오야(Sequoyah)라는 문자를 만들어 내 1828년부터 영어와 섞어서 체로키 피닉스(Cherokee Phoenix)라는 신문을 찍어낼 정도로 '선진적'인 부족이었다.

이 문자는 세쿠오야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이 사람은 자신도 문맹이었지만 여섯 살 난 딸 아요카(Ahyokah)의 도움을 얻어 문자를 창제했다고 한다. 이 문자를 가만히 보면 영어 알파벳과 유사한데 발음은 전혀 딴판이다. 일테면 'S'는 '데', 'G'는 '와', 'R'은 '슨'으로 발음된다. 이것은 영어를 전혀 모르던 세쿠오야가 영어 알파벳을 자신의 말을 기록하는 기호로서만 부분 차용했기 때문이다.

문맹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남이 만든 문자를 익히거나 자기가 하나를 만드는 것이기는 하지만 후자는 말처럼 쉽지 않다. 세쿠오야는 창제 과정에서 무모한 짓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조롱에 시달렸고 또 문자를 발명하면 문자를 쓰는 백인처럼 '나쁜 사람'이 된다는 협박도 받았다. 무엇보다 부인의 반대가 심해 그가 자리를 비우기만 하면 그녀는 그가 만들어놓은 문자들을 갖다 버렸다고 한다.

어쨌든 이에 굴하지 않고 문자를 만들어낸 그의 덕택에 체로키 부족은 문자를 갖게 됐고 근처에 사는 백인들보다 훨씬 문맹률이 낮았다. 이쯤 되면 누가 야만인이고 문명인인지 그 기준이 모호해진다. 체로키 부족은 여러 가지로 생각한 것과 달랐는데 그 중 하나는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성경과 찬송가까지 부족어로 번역해 암송했다는 점이다.

또 한가지는 백인들처럼 흑인 노예를 부렸다는 점이다. 당시 남부 사회의 기준에서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흑인의 관점에서는 체로키 부족도 인종차별의 가해자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백인이 아메리칸 인디언에게 가한 고통이 묻혀져서는 안 된다.

처음 아메리칸 대륙을 찾아온 백인들은 인디언들의 호의에 의존해 삶을 연명하다가 담배 재배에 성공, 처음으로 환금 작물을 수확하게 되자 떼지어 몰려와서 대륙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인디언들에게 수없이 많은 조약의 체결을 강제하면서 땅을 빼앗아갔다.

▲ 체로키 부족은 기독교를 받아들여 교회를 지었다.
ⓒ 홍은택
많은 인디언 부족들이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 편을 들었다. 이미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 새 나라를 세우겠다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영국은 인디언들에게 살 땅을 보장해주겠다고 유혹해 같이 미 독립군을 협공했다. 하지만 미국이 이기면서 인디언들의 설 자리가 좁아졌다. 미국은 점점 넘쳐나는 백인 이민자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동부 인디언들을 애팔라치아 산맥 서쪽으로, 그 다음엔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몰아냈고 그 다음엔 보호구역 안으로 몰아넣거나 땅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렸다. 백인들이 퍼뜨린 천연두와 수두에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점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금광의 발견과 추방

1828년 조지아 주의 워드(Ward) 계곡에 살던 한 인디언 소년이 백인 장사꾼에게 갖고 놀던 금덩어리를 판 것은 체로키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이었다. 금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백인들은 금광 일대의 땅을 보유하고 있는 체로키 부족의 추방을 더욱 서둘렀다. 조지아 주 의회는 체로키 땅을 몰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개척민 출신의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대통령이 이끄는 연방정부는 인디언 강제 이주 법안을 통과시켰다.

▲ 체로키 문화 유산 센터 정문. 그 앞에 있는 3개의 원주 기둥이 미시시피 강 서쪽에서는 처음 생긴 여성고등교육기관의 기둥이었다
ⓒ 홍은택
그러자 체로키 부족은 개화된 부족답게 세련된 구제절차를 밟아 미 대법원에 위헌 심판을 청구했다. 계기는 체로키 부족을 돕던 선교사 새뮤얼 워체스터 목사(Reverend Samuel Worcester)가 조지아 주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건이었다. 이른바 워체스터 대 조지아 주정부의 사건에서 1832년 미 대법원은 당연하게도 구속의 근거가 된 조지아 주의 체로키 부동산 몰수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건국 이후 불안정했던 미국의 법체계를 바로 잡은 대법원장으로 유명한 존 마샬(John Marchal)의 판결이었다. 자국의 이해에 어긋난다고 해도 법적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정신이 신생국가인 미국에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소식을 들은 잭슨 대통령의 말은 두고두고 기억되는 ‘망언’이 됐다.

"어 그래, 마샬이 그렇게 결정했어? 그럼 그 사람보고 그렇게 해보라고 그래."

잭슨 대통령은 대법원의 판결을 깡그리 무시했다. 판결이 난 지 1년이 지난 뒤에도 워체스터 목사는 풀려나지 못했다. 1838년 5월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장군은 7000명의 병사들을 풀어 조지아 주 뉴 에코타(New Echota)라는 곳에 모여 살던 체로키 부족을 포위하고 1만6천여명을 임시 수용소에 강제 수용했다.

그 뒤 체로키인들은 병사들의 감시 하에 인디언 영토(Indian Territory)라고 불리던 오클라호마 주의 탈레쿠아까지 1600킬로미터의 거리를 마차를 타거나 또는 걸어서 왔다. 도중에 겨울을 만나 모진 추위와 영양부족으로 4천명이 숨졌으니 총만 안 쐈을 뿐 사실상 대량 학살이다.

당시 인디언들을 호송하던 미군 사병 존 버넷(John Burnett)은 80세에 당시를 회상한 글을 남겼다.

"차가운 비가 내리던 1838년 10월의 어느 날 그들은 무슨 짐승처럼 645대의 마차에 태워졌다. 그 날 아침의 비애와 엄숙함을 잊을 수 없다. 추장 존 로스(John Ross)가 인도한 기도가 끝나자 나팔이 울려퍼졌다. 이어 마차가 구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작은 손들을 흔들며 정든 산과 집들에 작별인사를 했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버넷은 '눈물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이라고 썼다. 1839년 3월26일 탈레쿠아에 도착할 때까지 눈물의 길을 따라서 무덤이 행렬을 이뤘다는 것이다. 희생자 중에는 추장 존 로스의 부인도 있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녀는 하나밖에 없던 이불을 아픈 아이한테 주고 결핵에 걸려 숨졌다.

박물관에 전시된 체로키들의 기록을 보면 담담하게 당시의 고통이 기술돼 있다.

"3주가 지나고 남매 5명이 매일 한 명씩 차례로 숨졌다. 우리는 그들을 묻고 계속 갔다."

다음 구절에서 감동을 받았다.

"마차에서는 매일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노인과 아이들이 죽어나갔다. 매일 눈물과 슬픔의 범벅이었다. 나는 살아있는 동안 웃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하늘 아래 새 땅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나를 다시 찾았고 환희에 가득 찬 웃음을 터뜨렸다."

나라의 재건

▲ 19세기 체로키 부족의 학교 교실. 체로키 부족은 교육은 중시해 문자해독률이 인근 백인들보다 높았다.
ⓒ 홍은택
새 땅이 주는 축복은 고통을 치유하는 힘이 있었고 그들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감수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 땅은 그렇게 축복 받은 땅은 아니었다. 겨울에는 강추위, 여름에는 살인적인 더위가 교차하는데다 봄에는 돌풍이 불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척박한 땅에 당당한 체로키국을 건설했다. 1839년 8월 존 로스는 체로키국의 최고 추장으로 선출됐다. 2년 만인 1841년 무상 교육을 제공하는 남녀 공학 학교를 설립해 또다시 이곳에서도 아칸소나 텍사스 주의 백인들보다 훨씬 낮은 문맹률을 기록했다. 90%가 읽고 쓸 줄 알았다.

체로키 문화유산센터 정문 앞에는 3개의 원주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건국 후 11년 만인 1850년 미시시피 강 서쪽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여성 고등교육기관(Cherokee Female Seminary)의 남은 자취다. 체로키의 교육기관들은 탈레쿠아에 있는 노스이스턴주립대(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의 모태가 됐다.

추장 로스는 오늘날 인디언부의 기준에 따르면 아메리칸 인디언이 아니다. 피의 8분1만 체로키인이었다. 하지만 순수 혈통의 체로키인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특히 백인들의 회유에 넘어가 고향 땅을 미 정부에 헐값에 넘겨준 뉴 에코타 조약(Treaty of New Echota)에 서명한 몇몇 순수 혈통의 체로키 지도자들과 명확히 대비됐다. 그는 마치 모세와 같은 지도자다. 고난 속에서 분열되기 시작한 부족을 흩어지지 않게 하나로 묶고 유배지에서 '체로키국의 황금기'를 이끌다 1866년 세상을 떠났다.

공간적으로 눈물의 길은 탈레쿠아에서 끝나지만 시간적으로, 역사적으로 눈물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제몰수와 추방, 대량학살에도 불구하고 거친 평원에서 나라를 건설하는 저력을 보여준 체로키인들은 이곳에서도 점점 늘어나는 백인들에게 포위되고 있었다.

체로키인들은 개인적으로 땅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땅을 개인적으로 소유한다는 개념은 낯설었다. 땅은 공동체가 관리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체로키인들에게 땅을 개인적으로 할당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야 땅을 사고 팔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1880년대 헨리 도즈(Henry Dawes) 상원의원이 체로키의 땅을 조사하러 왔다. 체로키국에는 빈민이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부족은 단 한 푼의 빚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기심을 장려하지 않는 부족의 시스템이 잘못 됐다고 설파한다. 이기심이야말로 발전의 동력이며 문명의 기초라고 말했다. 그리고 워싱턴으로 돌아가 1887년 땅의 개인적 할당을 의무화하는 법을 만들었다.

우리가 평소에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할 때 '그런 법이 어딨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마치 그런 질문에 대비라도 하듯 미국은 어떤 일도 법을 만들어서 한다. 1898년에는 커티스법(Curtis Act)를 만들어 부족의 땅 소유를 아예 금지해버렸다. 그리고 1908년 오클라호마가 46번째 주가 되면서 인디언 영토(Indian Territory)는 소멸돼 버렸고 체로키국도 사실상 와해됐다.

▲ 체로키 문화 유산 센터 안에 전시된 '눈물의 길' 재연 동상들
ⓒ 홍은택
체로키인들은 그 이후 '눈물의 길'보다 더 험한 길을 걸어왔다. 기댈 언덕이 없어졌고 1930년대 대공황이 닥쳤을 때는 살길을 찾아 각자 눈물의 길을 떠났다. 체로키의 언어인 세쿠오야는 더 이상 쓰는 사람이 없어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

"법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해로운 법뿐이었고 우리는 미국의 법정신에서는 보이지 않은 투명인간이었다."

데보라의 말이 계속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공존(co-existence)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한 짓을 잊지 않는다.”

체로키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미 정부의 '관료적 제국주의'에 맞서 체로키국을 인정받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 끝에 1969년 리차드 닉슨 대통령이 체로키인들이 지도자들을 다시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법에 서명함으로써 재건의 발판을 닦았다. 그 때 체로키국의 '공무원'은 불과 3명, 예산은 1만 달러. 오늘날 공무원은 4천명, 예산은 2억7천만 달러로 늘어났다.

아름다운 국정연설

체로키국은 사실은 특이한 나라다. 국토도 없이 마치 망명정부처럼 정부청사만 있다. 그래도 국민은 있다. 세금도 걷는다. 체로키인들은 이중국적자다. 주정부에는 세금을 안 내지만 연방정부에는 세금을 내고 체로키국에도 세금을 낸다. 하지만 체로키국의 주요 재원은 연방정부의 보조금과 카지노 운영 수익이다.

▲ 체로키국의 최고 수반 채드위크 콘터셀 스미스 추장. 콘터셀은 옥수수수염이라는 뜻이다.
체로키국의 수반은 여전히 최고 추장(Principal Chief)으로 불린다. 채드위크 콘터셀 스미스(Chadwick Corntassel Smith)다.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늑대와의 춤을’을 보면 인디언들이 '주먹쥐고 일어서', '늑대와의 춤', '발로 차는 새', '머릿속의 바람'과 같이 보통명사를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스미스 추장의 경우 콘터셀이 그렇다. 옥수수수염이라는 뜻이다. 옥수수수염은 법학 박사 학위가 있는 인디언 법 전문가다.

체로키국도 나라인 만치 일년에 한번씩 최고 추장의 국정(State of the Nation) 연설이 있다. 올해는 9월3일이었다. 옥수수수염은 이 연설에서 체로키국의 목표가 10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눈물의 길이 100년 전으로 돌아가야 끝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닐 것 같다. 시간을 거꾸로 걷는다고 상상해보라.

“지금부터 100년 뒤 우리가 100년 전의 상태로 돌아가 있다면 우리가 나라를 성공적으로 재건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가 말하는 100년 전이란 오클라호마 주가 생기기 전의 체로키국. 문자해독률이 90%에 이르고 넘치지도 않지만 부족할 것도 없었던 공동체 생활을 누리던 그 상태다. 그는 그 상태를 '삶의 질'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삶의 질이란 둑방에서 낚시하는 겁니다. 호화 보트를 타고 알래스카로 원정낚시하는 게 아닙니다.”
“삶의 질이란 우리의 아들딸과 손주들이 조그만 공을 갖고 마당에서 노는 것을 지켜보는 겁니다.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를 구단주 특석에서 보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시작한 삶의 질에 대한 연설은 "우리가 지구 상에 있는 순간들을 사랑하고 즐기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게 삶의 질입니다. 불평하고 남을 탓하는 불안정한 함정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와 같은 생활철학으로 이어졌다.

마지막은 "삶의 질은 존재하는 것이며 행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Quality of life is being and doing, not having)"로 끝났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언어와 일, 그리고 공동체를 중심단어로 던졌다. 언어를 잃으면 문화를 잃는 것이다. 눈물의 길도 원래 체로키의 말로는 'Nunna dual Tsuny(The Trail where they cried)'다. 그들이 눈물을 흘린 길이라는 뜻이다. '눈물의 길'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짧게 해야 하기 때문에 줄여서 'The Trail of Tears'라고 했겠지만 체로키 말에서는 아직도 피눈물이 나는 것 같은 동태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반면 영어로 표현된 눈물의 길에는 눈물이 왠지 결정되고 메마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데보라도 "영어로 옮기면서 의미를 상실한 듯한 느낌"이라고 동의했다. 체로키도 영어식 표현이고, 원래는 다스라게(Tas-La-Ge)로 마을이라는 뜻이다.

옥수수수염은 언어를 통해 풍요로운 문화와 역사를 간직하면서 일을 통해 자립하며 공동체를 통해 함께 나누는 삶을 기약하자면서 연설을 마쳤다. 세계의 어느 나라의 국가수반으로부터도 듣기 어려운 내용의 연설이다. 이 연설은 '당신의 초라한 종(Your humble servant)'이라고 자신을 낮추는 말로 끝난다. '그러면 그렇지, 인디언들의 나라는 정말 다른 나라와 다르구나'하는 것을 비로소 느꼈다.

그러나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다. 많은 인디언들이 사회 부적응자로, 알코올 중독자로, 정부의 구호대상으로 현대를 살아간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인디언들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흐름이 엄연히 살아 있다.

이번에 오클라호마 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한 공화당의 톰 코번(Tom Coburn) 하원의원은 "미 연방정부와 인디언 국가들과의 조약은 원시적이고 웃기는 합의"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인디언의 정부를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의 말은 '독립국 안에서는 독립국이 있을 수 없다'는 미국 내 반 인디언의 오랜 전통을 대변하는 것이다.

'눈물의 길'이 현재 진행형인 '눈물을 흘리고 있는 길'로 바뀌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눈물의 길'은 미국의 가슴에 패인 깊은 흉터가 아니라 아직도 피가 흐르는, 아물지 않은 상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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