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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청산 문제를 놓고 여야가 정면대치 하고 있는 가운데 1948년 제헌국회 당시 반민특위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한 정철용씨(79)의 '회고록'을 단독입수,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할 예정입니다. 정씨의 회고록에는 반민특위에 몸담게 된 계기, 친일문인 이광수 등 반민 피의자 체포 경위, 현 정치권에 보내는 고언 등이 담겨 있습니다. 반민특위 관계자들이 거의 작고한 상황에서 정씨의 '기억들'은 귀중한 사료가 될 것입니다...편집자 주)

반민특위 책임자 진용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회의'를 마치고 기념촬영한 모습. 좌측 상단의 원내는 반민특위 조사관 겸 총무과장을 지낸 고 이원용씨(2002년 작고). 앞줄 왼쪽 일곱번째가 신익희 국회의장, 그 다음이 이범석 국무총리, 한 사람 건너 김병로 대법원장 등이 보인다.
ⓒ 자료사진

나는 1946년 5월부터 신한공사 대전지점에서 근무하였고 논산 장항 농장을 거쳐 조치원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우리 농민들의 숙원이었던 자작농의 첫 단계인 농지개혁 업무로 아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제하 대지주(일본인 지주, 토지회사 포함) 소유 토지를 장기 분할상환 조건으로 현재의 소작인이 매수하여 소작인의 굴레에서 벗어나 지주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농지개혁의 주업무였다.

특히 대지주 중의 대지주는 지금의 신한공사의 전신인 동양척식회사(동척)였다. 해방 후 미 군정이 이를 해체하고 신한공사로 새출발을 한 토지관리 회사이다. 옛 동척 회사는 철저한 우리 농민 착취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신한공사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 공정한 소작료 부과, 수리 안전시설, 농지 정리, 특히 농지개혁을 실시하여 나름대로 우리 농민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일제시대는 소작료가 3:7제로 아주 가혹하였다.

신한공사 근무 시절 박우경 의원이 추천

1948년 12월 중순경 나는 생각지도 않은 한 방문객을 맞았다. 안면도 없는, 경찰간부 차림의 한 낯선 사람이 나를 찾아와 거수경례를 하더니 "박우경 의원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하고 편지를 건네주면서 회답을 받아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박우경 의원은 제헌 국회의원으로, 아버지하고도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한 두 번 만나 뵈온 적이 있었다. 내용인즉 '신생 대한민국 국회에서 일제시대 친일행위 반민족행위를 한 사람들을 조사, 처벌하는 반민족행위 조사 특별법이 제정되고 정군은 중앙 사무국 조사부 서기관으로 내정되었으며, 1949년 1월 5일 중앙청에서 시무식, 임명식이 있으니 만사 제쳐놓고 상경하라'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제안을 받고 나는 마음이 착잡하였다. 다니고 있던 직장도 안정적인데다 우리 농촌의 농민들을 하는 일이 그 나름으로 보람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민특위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편지 내용만으로는 선뜻 이해가 잘 안됐다. 이런 궁리, 저런 생각 끝에 3일 간의 휴가를 얻어 상경하여 박 의원을 직접 만나기로 했다.

박 의원을 만나보니 그는 편지내용과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는 서울로 올라오라고 재촉했다. 나는 친일 반민족행위자 조사업무나 형법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도 부족하여 감당하기 어렵다며 반민특위 근무를 고사했다. 자칫 나를 추천하여 주신 박 의원님에게 누를 끼칠까 걱정된다고 설명을 드렸다.

그러나 박 의원님은 "너무 걱정할 것 없다"고 하시면서 "자네는 패기 있고 매사에 착실함을 내가 잘 알고 있고 또한 많은 조사관 서기관들이 협력하여 일을 하게되니 너무 염려 말고 시무식에 꼭 참석하라"고 했다. 서기관이면 고위 공무원이다. 그러나 직위가 문제가 아니라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느냐가 내겐 문제였다.

나는 며칠간 말미를 주십사 하고는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반민특위 일이 자신이 없었다. 궁리 끝에 신한공사 대전지점장을 찾아가 상의를 했다. 그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고는 "이제 영감이 되셨네"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니 결심하라"고 권했다.

반민특위 조사관 임명장 49년 2월 1일자 경남조사부 김철호 조사관의 임명장이다.
1949년 1월 5일 중앙청 회의실로 갔다. 이범석 국무총리 이하 모든 국무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반민특위의 시무식 및 특위 요원들의 임명식이 거행되었다. 그날은 국무총리 초청으로 점심을 마치고 오후 3시경 이승만 대통령 초청 다과회에 참석했다.

처음 만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나의 인상은 아주 좋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특유의 서툰 우리말로 모든 일은 공정하게 해야한다고 간단히 격려 인사를 하였다.

다과회가 끝나고 나는 우연히 대통령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대통령이 손수 타이프를 치고 그 옆에 외국인 부인(프란체스카 여사)이 무엇을 거들고 있었다. 나는 '이런 서민적이고 열심히 일하는 대통령이면 믿을 수 있구나' 하는 존경심을 가졌다.

그런 이 대통령이 나중에 친일파를 비호하고 독재자로 변하여 우리 반민특위를 무력으로 해산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에는 신익희 국회의장 초청 만찬회에 참석하는 등 첫 출근 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무력으로 해산할 줄은 상상도 못해

임명식 때 나는 임명장 이외에도 반민특위 업무와 관련해 필요한 많은 증명서를 받았다. 예들들어 야간 통행증, 군부대 출입증, 권총 휴대증, 각종 정부문서 열람권, 흥행업소 출입증 등등.

출범 당시 반민특위 사무실은 중앙청 202호실이었다. 말하자면 임시사무실이었다. 이 대통령 집무실은 2층 중앙에 위치했고 우리 사무실은 2층 맨끝 방이었다. 이시영 부통령의 방은 바로 아래 층에 있었는데 우리는 매일 부통령실을 지나서 2층으로 올라 다녔다.

나는 몇몇 동료와 함께 이시영 부통령을 뵙고 인사를 드린 적이 있다. 그 분은 아주 소박하시고 마치 아버지 같은 친근감을 느껴졌다. 항상 단정한 한복차림이었고 자그마한 키에 그리 건강한 모습은 아니었다. 2층을 오르내릴 때는 힘이 드시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 부통령을 부축하여 모시곤 했다. 당시 비서관도 있었으나 나의 도움을 거절치는 않으셨다.

한번은 혼자서 2층을 오르시는데 내가 이 부통령을 업고서 오른 적이 있었다. 나는 공적인 입장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그 분을 존경하였기 때문에 그런게 영광스러웠다. 임시정부에서도 중책을 맡으셨고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라고 알고 있었다. 대통령실은 경비가 삼엄하였으나 부통령실은 한가하여 더욱 친밀감이 들었고 그래서 인사도 자주 드릴 수 있었다.

나는 반민특위 제2조사부에서 서상렬, 이원용 조사관과 같이 근무하게 되었다. 이씨는 총무과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반민특위 사무실은 나중에 지금의 을지로 입구 국민은행(구 제일은행) 자리로 옮겼다.

처음에는 특위의 조사 업무가 사전준비가 부족하여 미숙한 점이 많았으나 차차 업무에 적응하고 친일분자의 조사, 체포 등 활발히 일을 해나갔다. 우리 세 사람은 처음 만났으나 이심전심으로 매우 친밀하게 지냈고, 나이도 나보다 3, 4세 위였기에 마치 형님 동생같이 지냈다.

투서 분석, 피의자 체포 등으로 흥분된 나날

서상렬씨는 학도병 출신으로 중국에서 탈출하여 임정에서 신익희 선생을 보좌하였고 김구 선생과 귀국한 6척 장신의 늠름한 체구였다. 1949년 5월 하순경 이원용씨는 조사관 겸임이 해제되고 총무과장 업무만 전담하게되었다. 그의 후임 조사관으로 내가 승진 발령(1949. 8. 1일자)을 받았다.

우리가 처음 업무를 시작했을 때는 모든 것이 미숙하였다. 주로 미군정에서 얻은 친일행위자에 대한 자료, 임시정부 요인들의 조언,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의 제보, 그리고 일반인들의 투서를 근거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미군정 시절에도 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행위자 처벌을 위한 관련법을 만들었으나 미군정의 인준 보류로 실현되지 못했다.

업무개시 초창기에는 투서 분석 및 조사업무와 돌발적인 피의자의 체포 등으로 흥분된 나날이 계속되었다. 대부분의 요원들이 조사 업무나 법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었다. 반민특위 관계자 가운데는 독립운동가나 그 후손, 혹은 직간접으로 독립운동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엄혹한 일제하에서 민족적 양심과 지조를 지켜온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특위와의 인연을 맺은 나는 비록 경험과 지식 여러 가지가 부족하였으나 민족 정기를 위한 열정, 친일 행위자를 처벌하는 중책, 그리고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는 긍지로 열심히 일했다. 그간 친일 행위자의 연행, 조사 등 1949년 6월 6일 경찰 무력에 의한 와해의 쓰라린 체험을 하고 공소시효 만료로 그해 9월 경 완전 해산시까지 특위 요원으로 일을 했다.

정철용 반민특위 조사관은 누구인가?

▲ 정철용 조사관
ⓒ오마이뉴스 조호진
반민특위 관계자 가운데 생존자는 거의 없다. 지난 2002년 반민특위 총무과장 겸 조사관을 지낸 이원용씨가 작고함에 따라 이제 반민특위 당시의 일을 소상히 증언할 사람은 거의 없다.

정철용 조사관은 1925년 충북 영동 태생으로, 현재 생존 반민특위 조사관 2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44년 봄 청주상업(5년제) 졸업 후 곧바로 일제에 징병으로 끌려간 그는 서울 용산 주둔 일본군 20사단에서 8.15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5월 당시 미 군정이 관리하던 신한공사 대전지점에 들어가 2년여 근무한 그는 1948년 가을 박우경 제헌의원의 추천으로 반민특위에 들어가 조사관으로 활동하였다.

1949년 6월 친일경찰의 반민특위습격사건(이른바 '6.6사건')을 계기로 반민특위는 힘을 잃기 시작해 마침내 그 해 8월말 특위는 문을 닫고 말았다. 특위 해체 후 그는 반민특위 조사관 경력 때문에 '빨갱이'로 몰려 한동안 피신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하인 1950년 초 당시 윤보선 상공부장관의 알선으로 서울 영등포 소재 조선피혁 영업과장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하던 중 그해 6.25가 발발하면서 그는 다시 일자리를 잃게 됐다.

이후 지방공단 내 성호산업 등 5~6개 기업의 경영고문 등을 하면서 지내온 그는 지난 80년 일선에서 은퇴했다. 지난 93년 부인과 사별한 그는 슬하에 3남2녀를 두었으며, 현재 거주지인 청주와 자녀들이 살고있는 서울을 오가며 지내고 있다.

이밖에 그는 요즘 과거 반민특위 관계자들의 2세,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과 '민족정기를 이어가는 모임'(가칭)을 구성, 매월 모임을 가져오고 있다. / 정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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