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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조사관
친일청산 문제를 놓고 여야가 정면대치 하고 있는 가운데 1948년 제헌국회 당시 반민특위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한 정철용(79)씨의 '회고록'을 단독입수,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할 예정입니다.

정씨의 회고록에는 반민특위에 몸담게 된 계기, 친일문인 이광수 등 반민 피의자 체포 경위, 현 정치권에 보내는 고언 등이 담겨 있습니다. 반민특위 관계자들이 거의 작고한 상황에서 정씨의 '기억들'은 귀중한 사료가 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 반민특위에서는 자체 '인지'는 물론 투서를 받아 피의자 검거에 나섰다. 사진은 반민특위 전남 조사부에서 설치한 투서함.
ⓒ <격동기의 현장>
1949년 2월 하순 경으로 기억된다. 당시 특별검찰관 서용길 의원의 부름을 받고 검찰부로 갔더니 체포영장과 수색영장을 건네주면서 투서의 의한 것이나 죄상이 의외로 중대한 사건일 수 있으니 우선 피의자를 연행해 오라고 했다. 내가 일제 때 청주에서 공부했고 그 곳 사정에도 밝다고 생각해서 나더러 다녀오라는 것 같았다.

투서의 내용인 즉 피의자 김00은 일제하 청주에서 철공소를 운영하면서 일제에 아부하여 자금을 지원받아 소총, 대포의 탄환을 만들었고 또 총포 수리로 돈을 벌어 국방헌금도 많이 한 친일파라는 것. 또 그는 철공소가 아닌 군수공장을 경영한 사람으로 종업원을 군의 졸병같이 취급하여 혹사하고 공장엔 헌병들이 감시도 하고 순찰도 하였다고 했다.

이밖에도 그는 일제 말기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쇠붙이 등을 강제로 수집할 때 면 서기, 공장종업원 등이 이 앞장서서 빼앗은 유기그릇으로 탄환을 만들어 이를 일본군에 납품하여 부자가 되었고, 또 그의 아들은 대학까지 졸업한 친일파라고 했다.

나는 특경대원 2명을 대동하고 청주로 향했다. 그 당시 지방출장은 최소 3~4일이 소요되고 피의자 부재시 또는 도피시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요즘처럼 각 기관에 자동차 등의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이동수단은 주로 철도를 이용하였다. 청주에 도착하니 벌써 낮 12시가 넘었다.

친일 군납업자 체포하러 청주로 출장

우리는 대충대충 점심을 마치고 문제의 철공소부터 수배에 나섰다. 수소문 결과 공장이 청주 역전에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러나 공장 규모는 투서 내용과는 달리 소규모였고, 시설도 보통의 공장 정도였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소총과 대포의 포탄을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투서 내용이 조금은 미심쩍었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니 휴업중인 듯 기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종업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큰 소리로 “아무도 없습니까?” 하니 공장 한 구석방에서 젊은 사람이 자다 깬 사람처럼 눈을 부비며 나왔다. “왜 일은 안 하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밥만 얻어먹고 공장만 지킨다며 공장 문을 닫은 지 두 달이 됐다고 했다.

우리는 그 청년을 앞세우고 공장 주인, 즉 피의자의 자택으로 갔다. 혹시 그 청년에게 화가 미칠까 하여 문앞에서 그를 돌려보내고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 기척이 없었다. 우리는 다시 문을 두드리면서 “아무도 안 계십니까?”하고 소리쳤다.

그제서야 60대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문틈으로 내다보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농기구를 사려고 왔다. 사장님도 잘 안다”고 하니 그 때서야 그 아주머니는 문을 열어 주었다. 우리가 대문을 들어서자 그녀는 매우 긴장된 모습으로 “손님이 왔어요!”하고 안방을 보고 소리쳤다.

나는 무조건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김 사장님, 나를 몰라보십니까? 공장 문을 왜 다 닫았습니까? 농기구를 사러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김 사장은 매우 당황한 듯 했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우리 일행을 소개했다.

"우리는 서울 반민특위 본부에서 나왔습니다. 일제 때 김 사장께서 군수공장을 차려 포탄을 만들어 일본군에 납품하고 또 종업원을 학대했으며, 유기그릇을 강제로 빼앗아 큰 돈을 번 악질 친일분자라고 해서 연행하러 왔습니다. 지금 반민특위에서 친일행위자들을 조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김 사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우리공장은 군수공장이 아니고 농기구 공장입니다. 포탄 만드는 기술도, 기계도 없습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그는 입에서 거품을 내며 변명을 해댔다.

“모든 사실은 조사하면 밝혀질 것이니 오늘은 같이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준비하시지요. 옷도 두둑한 솜옷을 입어도 좋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서둘러 주십시오.”

그의 변명만 듣다가는 반항도 할 것 같아 우선 수갑을 채워 청주역으로 갔다. 청주역으로 가는 데 누군가 뒤에서 ‘아버지!, 아버지!’하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가까이 달려오는 사람을 보고 나는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상대도 나를 보았다. 가까이 다가와서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된 그 순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아니, 선생님...” “아니, 자네가...” 우리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선생님, 웬일이십니까?”
“자넨 웬일인가”

“이 분이 누구십니까”
“나의 아버님이시네.”

순간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체포해서 연행중인 피의자가 내 은사의 아버님이었던 것이다. 나는 입장이 아주 난처했다. 나는 특경대원에게 눈짓으로 수갑을 풀어 드리라고 했다. 그리고는 "선생님, 미안합니다”하고 인사를 건네고는 반민특위에서 일을 한다고 나를 소개했다.

이어 나는 얼마전 이러이러한 내용의 투서가 있어 조사를 명령받고 왔으니 이해하시라고 애원 아닌 애원을 했다. 조사 후 사실이 밝혀지면 바로 돌아오실 수 있으니 너무 걱정마시라고 설명했다. 늦겨울의 해는 바로 저문다.

체포한 피의자는 알보고니 옛 은사의 부친

이런 와중에 또 한 사람이 무슨 보따리를 싸들고 달려와 “아버지 이게 웬일입니까...”하고는 김 사장을 붙들고 흐느낀다. 선생님은 “나의 형님일세. 아마도 아버지를 따라가실 모양일세. 성질이 외고집이라서 미안하지만 아버지와 동행케 해주게...”한다.

나는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니 서울로 면회를 오시라고 했다. 그러나 그 형님이란 분은 펄펄 뛰면서 기어코 우리와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그러면 내일 조치원경찰서로 10시까지 오라'고 약속하고 간신히 그들과 헤어졌다.

날이 저물어 청주경찰서에 피의자를 일시 유치시키려고 했으나 할 수 없이 그 계획을 바꾸었다. 한 시도 빨리 이 곤혹스러운 청주 땅을 떠나 조치원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우리는 조치원경찰서에 피의자의 신병을 맡기고 다음날 출발했다.

김 선생님의 형님은 보따리(이불)을 들고 찾아왔다. 우리는 기차로 서울에 도착, 피의자를 서대문형무소에 인계하고 임무를 마쳤다. 그런데 또 난처한 일이 생겼다.

그 분, 즉 김 선생님 형님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 나의 집에서 묵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나는 단신으로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하는 형편이었고 항상 비상대기 상태의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난처했다. 막무가내로 우기는 바람에 어찌할 도리가 없어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 분은 이틀간 나와 숙식을 같이 하다 청주로 돌아갔다.

그 후 김 사장은 검찰 조사결과 무고임이 판명돼 석방되었다고 들었다. 문득 '인생하처 불상봉'이라고 한 옛말이 생각났다. 나는 특위에서 활동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청주에 갔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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