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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안개가 사위를 감싸고 있다. 크고 작은 산 봉오리들이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다가오고 새들은 구름 속에서 노래하며 경쾌하게 날갯짓한다. 저만치 아래 계곡 가에는 초가집 서너 채가 오붓하게 앉아있다.

▲ 바타드로 트래킹 중인 리키와 진솔
ⓒ 최진호
우리는 산허리에 걸린 한적한 오솔길 따라 바타드를 향해 트레킹하고 있다. 릭키가 가이드로 앞장섰다.

어제 진솔이와 나는 사가다에서 3시간쯤 걸려 바나우에에 왔다. 다시 지프니로 갈아타고 한 시간을 달려 방아안 마을에 닿아 패밀리 인(Family Inn)에 여장을 풀었다.

▲ 방아안 마을의 전통 집
ⓒ 최진호
릭키는 패밀리 인 주인 할머니의 손자로 중학교 1학년생이다. 마침 학교를 쉬는 날이라서 아르바이트 삼아 가이드로 나선 것이다.

마을을 지나서 논둑길을 걷다가 가파르고 완만한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소나무와 야자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관목 숲 사이로 난 길 따라 네다섯 시간 걸어가니 바타드(Batad) 마을이 나온다.

▲ 바타드의 목공예 조각가 낼슨(Nalson)
ⓒ 최진호
눈앞에 펼쳐지는 라이스 테라스(rice terrace)의 장관! 산등성이에 서서 둘러보니 산 봉오리들이 사방을 성처럼 둘러 싼 분지 한가운데에 마을이 앉아있고 산의 경사면 따라 라이스 테라스, 즉 계단식 논 수십, 수백 단이 층층이 쌓여져 있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며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라이스 테라스. 이 지방의 논두렁을 이어놓으면 길이만도 지구의 반 바퀴가 넘는 2만2400km에 이른다고 한다. 60-70도로 경사진 산비탈의 등고선 따라 작은 논들이 가파른 계단처럼 쌓여져 있는 것을 보면 그 솜씨와 노력에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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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스 테라스' 일구는 말릭꽁 사람들

▲ 바타드의 라이스 테라스
ⓒ 최진호
2, 3천년 전 이푸가오(Ifugao)족은 다른 부족들과의 영토 싸움에 져서 산골짜기로 밀려 들어왔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산기슭을 경작했다. 너무도 가파른 산이라서 가축이나 수레도 이용하지 못하고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말이다.

가족이 늘어나면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더 높고 가파른 곳을 개간해야 했고 계단식 논은 산꼭대기를 향해 높이 올라갔다. 그래서 라이스 테라스는 ‘천국에 이르는 계단’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 바나우에 뷰 포인트에서 바라본 라이스 테라스
ⓒ 최진호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열대의 태양이 땅에 꽂힌다. 햇빛을 받은 라이스 테라스는 빛나는 자연의 팔레트이다. 나는 이 거대한 예술작품을 이룩해 낸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몸집도 작고 힘없는 그들이 거친 산을 자신과 가족과 동료의 양식을 산출해 내는 생명의 땅으로 일구어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삽질을 했으며 땀방울을 흘렸을까? 맨손으로 이 장관을, 이 위대하고 웅장한 걸작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대를 거쳐야 했을까?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와 자연에 대한 믿음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결코 해낼 수 없었으리라.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이 다 무어냐. 허울 좋게도 ‘문명’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그 기괴한 돌무더기들이 세워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채찍을 맞으며 강제 노동하다가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던가. 전제군주의 초호화판 묘를 짓기 위해, 왕과 귀족들의 사치스런 삶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은 죽음의 문화일 뿐이다.

▲ 바나우에 뷰 포인트에서 바라본 라이스 테라스
ⓒ 최진호
그러나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이 아름다운 장관은 가족의 양식을 마련하려고 작고 힘없는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한 삽, 한 삽 떠가며 땀 흘린 눈물겨운 노동의 소산이다. 생명과 사랑이 깃든 예술 작품인 것이다.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은 세월과 함께 무너져 내려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논 가운데에서 일하는 이들의 건강한 노동으로 이 계단식 논은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풍요롭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 전통 의상을 입고 포즈를 취해준, 방아안 마을 주민 레티샤(Leticia)
ⓒ 최진호
논에는 주먹만한 우렁이와 다슬기가 널려 있다. 이들에게는 비료나 농약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그저 모심고 물대고 추수할 따름이다. 하늘도 이들을 돕는다. 벼가 자랄 때 비가 알맞게 내리고 이삭이 패면 햇빛이 내리쬐며 추수할 때가 되면 건조한 날씨가 한동안 이어진다고 한다.

나는 벅찬 감동에 자랑스러운 이푸가오족의 후예 릭키를 바라보며 손을 꼭 잡았다.

▲ 바나우에 중심가
ⓒ 최진호
방아안 마을에서 이틀을 머무른 우리는 다시 바나우에 시내로 나와 피플스 로지(People's Lodge)에 자리 잡았다. 그 집에서 나흘을 지내며 시내와 가까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바나우에는 이푸가오 주에 속한 인구 약 만 명의 조그만 도시로서 아시아의 명소가 된 라이스테라스 관광의 전초기지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 숙소에서도 라이스 테라스가 가까이 보이며 시내와 가까운 곳곳에 라이스 테라스, 박물관, 전통부락들이 산재해 있다.

▲ 마실 나온 닭 일가족
ⓒ 최진호
우리는 일종의 전망대로서 바나우에 시내의 라이스 테라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뷰 포인트(View Point)에 올라가서 벅찬 감동을 다시 한 번 맛보았다. 학교를 찾아가 아이들과 놀다가 사진도 찍었고, 박물관, 전통 부락들을 방문하여 이푸가오족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깊은 산 중에서 원시적인 생활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부락까지는 돌아보지 못했다. 여행에서 때로는 아쉬움도 남겨 놓아야 하는 법. 그래야 다음에 또 오게 될 테니까 말이다.

▲ 바나우에 박물관
ⓒ 최진호
자연을 닮고 산을 닮은 사람들. 욕심 없는 순박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미소가 꽃처럼 피어난 사람들, 이고롯 족과 이푸가오 족 사람들의 넓고 따뜻한 마음을 가슴 한 가득 안고, 우리는 한 달만에 마닐라로 돌아왔다. 솔향기 그윽한 바람과 청아한 새소리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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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거의 날마다 오마이에 들어오는 중독자이지요. 특별히 자신있는 글쓰기 분야는 없고 글재주도 없지만 다른 분들의 글을 보면서 저도 그 정도는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나 여행기를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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