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금은 아스라한 시간의 극락에서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을 나의 고등학교 시절 헤르만 헤세는 내겐 정신적인 밥이었다. 나는 <데미안> <황야의 이리> <크눌프> <향수> <유리알 유희> 등 수북히 고봉으로 담긴 그 밥을 게걸스럽게 떠 넣곤 했다.

"신은 죽었다!"라고 제법 호기 있게 떠들고 다니던 니체라는 나물과 곁들여 먹던 그 밥은 제법 잘 차려진 진수성찬이었다. 내 사춘기의 정신적 기아는 그렇게 헤르만 헤세라는 한 이방의 작가에 의해 채워졌다.

▲ 안데르센 홀 입구
ⓒ 안병기
▲ 전시장 내부
ⓒ 안병기
세상은 늘 새로운 일거리를 덥석 던져주고 달아나 버린다. 그리고 그 일거리에 치이고 저도 모르게 삶에 찌들어버린다. 그렇게 해서 잊혀진 헤르만 헤세를 남이섬 <안데르센 홀>에서 다시 만났다.

그가 직접 그린 수채화와 그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들과 백남준이 조각한 <싯달타상>, 헤세에게서 답장을 받고 뛸 듯이 기뻐하는 전혜린의 일기 등 많은 볼거리가 관람객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전시장인 텅 비어 한산한 나머지 쓸쓸함이 감돌기까지 했다.

▲ 헤르만 헤세 기념관의 싯달타. 백남준 작
ⓒ 안병기
많은 사람들은 헤세를 소설가로서만 알고 있다. 그러나 헤세는 마흔 살이 되던 해 부터 갑자기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해서 만년에 이르도록 붓을 놓지 않았던 화가였다. "내가 화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현상 세계에 푹 빠져서 완전히 나 자신을 잊는다는 것은 귀중한 체험입니다"라고 그림에 대한 뿌리칠 수 없는 애착을 나타냈다.

또한 음악에 대해서도 풍부한 지식을 지녔던 다재다능한 작가였다. 지식을 넘어서 때로는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가 음악적 소양이 깊다는 것은 그의 작품 곳곳에 나타나 있으며 때때로 그는 작품에 음악적 요소를 도입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소설 <싯다르타>인데 이 소설은 제시부와 전개부, 재현부로 구성되어 소나타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 1919년 베를린 피셔 출판사에서 발간된 <데미안-에밀 싱클레어의 청춘에 대한 이야기>.
ⓒ 안병기
독일 시인 헤르만 카자크는 심지어, <데미안>은 비가적이고, <싯다르타>는 격정적이며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는 발라드 풍이요, <황야의 이리>는 장타령 속의 희비극, <동방 여행>은 로망스풍이라고까지 평했을 정도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의 가장 뚜렷한 정치적 원인이었던 민족주의적 입장에 섰던 헤세는 처음에는 심정적으로 독일을 지지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벨기에로 침공해 들어가자 헤세는 비판적 자세로 돌아서서 <친구여, 제발 그쳐다오!>라는 글을 발표했다.

▲ 헤세와 해바라기
"사랑은 마음 보다 크고 이해는 노여움 보다 높으며 평화는 전쟁 보다 고귀하다"라고 했던 평화주의자 헤세였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국인 독일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나치들에게 조국을 배반한 작가로 낙인찍힌 그는 결국 나치들의 집요한 박해와 추적을 견디지 못하고 1923년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중립국 스위스로 귀화하고 말았다.

▲ 정원사 헤세. 종이에 펜, 수채
ⓒ 헤르만 헤세
▲ 종이에 펜, 수채
ⓒ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박물관 건립 위원회가 마련한 이번 전시회는 헤세가 이주해 살았던 몬타뇰라 근교의 자연 풍경을 그린 수채화들이었다.

나치와 같은 인간들에게 신물나고 혐오증을 느낀 때문이었을까. 그의 그림에는 사람이나 동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나무와 구름, 꽃, 호수 등 녹색과 푸른색이 가득한 풍경들이 대부분이다. 이번 전시 작품 중 <정원사 헤세>가 유일하게 사람이 등장하는 작품일 정도이다.

나치에 찍혀 스위스 몬타뇰라로 이주해서 은둔 생활을 하던 헤세의 집 대문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실례지만 방문할 수 없습니다."

'알'의 파괴를 역설했던 그 역시 알 밖으로 나오는 일은 두려움이었던 모양이다. 이 위대한 작가에게도 역시 세계라는 '알'은 파괴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일생에는 여행에 대한 기록이 꽤나 많이 나온다. 그러니까 여행도 "꿩 대신 닭"의 변형인 것이다. 이 점이 내가 헤세에게서 느끼는 동류의식이다. 사실 사람의 삶이란 "도진 개진"이 아니던가. 특별한 삶이란 희귀하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 삶이란 본디 구태의연함을 그 기본 내용으로 하기 때문이다.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헤세는 내게 묻는 듯 했다. 이젠 "너를 감싸고 있던 알을 깨트렸느냐"라고. 나는 여전히 그 알을 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라 했다. 그리고 세계라는 알을 감싸고 있는 단백질의 두꺼움에 차츰 지쳐가고 있는 중이라고 실토했다.

헤세는 알을 깨지 못하는 새는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없지만 알 속에 갇혀 사는 것도 삶의 한 방법이라고 내 등을 또닥또닥하며 위로했다.

"꿩 대신 닭이다." 내 생애를 망친 것은 이 말이었다. 삶에 대한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난 서둘러 그 말 속으로 도피하곤 했었다. 꿩은 꿩이고 닭은 닭이다. 그러나 닭에다 꿩의 터럭을 붙인다해서 꿩이 될 리 없건만, 닭에다 억지로 꿩의 터럭을 붙이며 살아온 날들이 무릇 기하였던가. 그렇게 자기 합리화에 맛들이고 그때마다 불면으로 몸을 뒤채고 잠꼬대를 하며 나는 차츰 삶에 이력을 붙여왔다.

헤르만 헤세가 펼쳐놓은 삶에 대한 생태학들을 되새기는 시간은 기쁨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상이라는 알의 안온함을 차마 팽개치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의 아트만을 들여다보는 동안 어느 새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아니, 땅에 깔리던 건 끝없는 도로(徒勞)를 반복한 내 일생에 대한 깊고 짙은 회한이었던가.

▲ 도보여행을 떠나는 헤세

도보여행을 떠나는 헤세를 뒤쫓아 남이섬을 떠났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는' 선착장에서 그와 헤어졌다.

가늘고 흰
부드럽고 조용한 구름이
하늘에 흘러간다
그대의 시선을 수그려
희고 시원한 구름이
푸른 꿈 속을 지나가는 것을….

헤세는 그날 하루 내 꿈 속을 지나간 구름이었다. 이제 나는 그 구름이 지나간 자리를 생각한다. 그 구름이 마음의 하늘 어느 편으로 흘러갔던가. 왼쪽이었던가, 오른쪽이었던가.

헤르만 헤세 연보

▲ 자화상(1919)
ⓒ헤르만 헤세
1877년 독일 뷔르템베르크 출생
1890년 괴팅엔의 라틴어 학교 입학
1891년 마울브론 신학교 입학
1892년 작가가 되기 위해 신학교 자퇴
1902년 어머니에게 헌정한 <시집 Gedichte> 발표
1905년 <수레바퀴 밑에서> 출간
1910년 장편 <게르트루트 Gertrud> 발표.
1911년 화가 한스 쉬틀제네거와 함께 인도 여행
1913년 동방여행기 <인도에서 Aus Indien> 출간.
1914년 장편소설 <로스할데 Ro halde> 출간
1919년 에밀 싱크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 발표
1922년 "인도의 시"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 <싯다르타 Siddhartha> 발표.
1927년 장편소설 <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 발표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 나치의 탄압으로 작품들이 몰수되고 출판 금지됨
1943년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를 2권으로 취리히에서 출간.
1957년 <헤세 전집 Gesammelte Schriften>이 7권으로 증보 출간됨.
1962년 몬타뇰라의 뇌출혈로 사망
/ 안병기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