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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참전 조선족 1.
ⓒ 류상수
어떤 전쟁도 승자는 없다. 하물며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은 말해 무엇하랴. 일제 침략에 의해 중국으로 쫓겨가 중국의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해야만 했던 노장들은 타국에서 민족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한숨을 쉬고 있다. 그렇게 흘러간 50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류상수(38·중앙대 출강)씨의 사진전 '한국전쟁 참전 조선족, 그후 50년' 전(展)이 지난달 21일부터 3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김영섭 사진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사진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조선족 노인들이다. 이들은 일제 수탈에 의해 부모와 함께 남부여대(男負女戴)하며 중국으로 이주해야 했고, 중국의 국공내전이 벌어지면서 모택동의 홍군으로 참전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 인민군으로 참전한 인물들이다.

작가 류씨는 지난 2000년부터 2년 동안 중국 동북지역 연길과 용정 사이의 마을인 '동성용진'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을 흑백사진에 담았다. 한국과 중국의 두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전쟁의 기억과 육신의 고통에 의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 한국전쟁 참전 당시 모습.
ⓒ 류상수
류씨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초로의 노인이 된 그들은 초기 이주자들이 두만강을 월경하여 황무지 땅을 개간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한 곳에서 땅의 소중함을 중히 여기며 그들만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 모두는 역사의 희생물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희생물일지도 모른다. 한반도 분단과 분열은 전적으로 외세의 개입과 타의에 의해서 강요된 민족의 비극이다."

큐레이터 박성욱씨는 류씨의 사진전에 대해 "류상수는 이번 작품을 계기로 잊혀진 과거 역사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남과 북, 적과 아군의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한민족이라는 역사의 큰 틀로 보며 당시 살아온 모든 이들이 역사의 피해자임을 말하려 한다"고 평가했다.

류상수씨는 중앙대와 대학원 사진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 신라호텔(1997년)과 독일(2000년)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룹전으로는 '한일 포토비엔날레(2000년)' '공공정보전(2003년)', '새로운 시각정신(2003년)' 등이 있다.

친일파 처단 위해, 애인을 위해 참전... 참전한 마을 동료 대부분 전사

▲ 한국전쟁 참전 조선족 2.
ⓒ 류상수
류상수씨가 조선족 노인들에 대한 증언에는 식민지 백성과 분단의 아픔이 담겨있다. 이들 가운데는 인민해방과 통일을 위해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또는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를 일제에 잃은 사람은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참전했으며, 또는 사랑하는 애인을 지켜주기 위해 전쟁에 참전한 여성 노인의 증언도 있었다.

다음은 류상수씨가 동성용진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을 대상으로 사진작업을 하면서 직접 채록한 증언이다.

강홍도(77) "1946년 4월 조선족과 중국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인민해방군에 자원 입대했다. 1949년 7월 북한인민군 6사단 3연대에 편입됐고 1950년 9월 국군에게 포로로 잡혀 거제도에 수용됐다. 1956년 9월 중국으로 귀국했으나 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이유로 모든 혜택을 받지 못하고 멸시와 홀대를 받으며 외롭고 고통스러운 젊은 날을 보냈다."

장수학(81) "독립운동에 가담한 아버님이 친일파의 신고로 1930년 4월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을 당했다. 1945년 복수를 결심하고 일본 패망 후 잔존해 있던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중국해방전쟁에 참전했으나 3개월 후 동생이 찾아와 장남이니 어머니를 모시라고 지휘관에게 사정을 설명한 후 왕청으로 전출되어 정찰병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남한의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참전했으나 장남이라는 이유로 지원군 통역관 반장 임무를 수행했다."

▲ 전쟁은 끝났고 조국은 분단이 됐고 몸은 늙고 병들었다.
ⓒ 류상수
원용걸 "중국해방전쟁에 참전한 뒤 북한 인민군에 편입됐다. 북한 인민군 정예부대요원으로 발탁돼 한국전쟁에 참전, 전쟁 후 북한지역 복구사업에 동원되기까지 8년 정도 있다가 고향에 돌아와서야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8년이란 세월 동안 부모님과 아들을 위해 헌신한 아내가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한민족끼리 총을 겨누며 전쟁을 한 것이 매우 안타깝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기억들로 인해 가슴이 아프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남북한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최기성(73) "연길사범에 다니던 1946년 조선족과 중국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동북인민연군에 자원입대, 1950년 북한 인민군 중위로 참전해 대구-부산간 철도폭파 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매복 국군에 기습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난 뒤 남파간첩 교관으로 복무하다 1958년 중국으로 귀국했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해 전쟁 당시 싸웠던 곳을 찾아다니면서 말문이 막혔다. 적국이었던 남한은 잘사는 반면, 젊은 날 목숨을 바쳐 싸웠던 북한은 오늘날 굶주림과 가난으로 중국으로의 탈북자들이 늘고 있으니 가슴 아플 뿐이다."

유정애(여·68) "한국전쟁 발발 후 사랑하는 남자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그 남자를 보호하기 위해 1950년 중공 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이듬해 인민군 군의관 연락병과 인민군 최고사령부 직속 출판서 소속으로 복무했다. 1953년 전쟁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왔는데 나중에 그 남자는 선생님이 되었다."

석운하 "참전하고 싶지 않았으나 당시 사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나갔다. 1951년 연길에서 조선족으로 구성된 중공 인민지원군에 입대했으며 이때 함께 참전한 마을동료 13명 중 12명이 전사했다. 강원도 금성에서 조선족 동료들과 함께 미군 3명을 생포해 3급 훈장을 받고 1954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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