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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진상규명법 제정을 계기로 우리사회에 친일파 논쟁이 뜨겁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편집국장이 지난 98년부터 1년여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서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묶어펴낸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개마고원 출간)의 내용을 '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형식으로 다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 해방후 반민특위에 불려온 이근택의 손자 이원구의 '피의자 신문조서'. 이원구는 부친 이창훈의 작위를 습작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확인돼 불기소로 풀려났다.
ⓒ 오마이뉴스 정운현

반민특위가 해산을 1개월 정도 앞둔 49년 7월 하순 어느 날. 당시 공주중학교 현직교사 한 명이 반민특위로 붙잡혀 왔다. 이름은 이원구(李元九), 나이는 37세, 죄명은 반민법 제4조 2항 위반. 그는 부친 이창훈(李昌薰)이 일제로부터 받은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사결과 그의 부친 이창훈은 해방 후인 1947년 4월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그가 일제때 부친의 작위를 습작하였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결국 그는 불기소로 풀려났다. 벌써 50년도 넘은 이야기다.

‘공주갑부 김갑순(金甲淳)’ 취재차 공주를 방문한 기자는 우연히 공주에서 이들 부자(父子)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이창훈의 부친을 비롯해 이 집안 4대를 한꺼번에 만났다. 그리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후손이 제법 잘 단장한 자리에 차례대로 모두 누워 있었다.

'공주갑부' 김갑순 취재길에 우연히 만난 이근택 일가

그러면 이 집안의 ‘자작(子爵)벼슬’은 원래 주인공이 누구인가? 이창훈인가? 그의 부친인가? 그의 부친이다.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근택이 바로 이창훈의 부친이자 자작의 주인공이다. 부자가 자작을 지낸 이 집안의 친일내력을 더듬어보자.

▲ '을사오적' 이근택
이근택(李根澤. 1865∼1919년)은 원래 충북 충주 사람으로 집안은 대대로 무인가문이었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근택이 출세줄을 잡은 계기는 좀 특이하다. 그가 아직 서울로 올라오기 전인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자 민비(명성왕후)는 고향인 충주로 피난을 갔다.

마침 이근택은 민비의 친정 이웃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매일 민비에게 생선을 잡아다 바쳤다. 당시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민비로서는 이 일을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환궁 후 민비는 이듬해 그를 파격적으로 발탁, 남행선전관에 임명하였다. 1884년 무과에 합격한 이후 그는 10년간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중앙무대 진출을 모색하였다.

이근택이 대한제국기에 중앙무대에서 요직을 역임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고종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그가 우연히 일본 상점에 들렀다가 비단으로 만든 띠(帶) 하나를 발견하였다. 화려한 수를 놓아 만든 것이 첫눈에 보아도 기품이 있어 보였는데 군데군데 검붉은 흔적은 핏자국이 완연했다.

순간 그는 이 허리띠가 민비의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거금 6만 냥을 주고 사서 고종에게 바쳤다. 고종과 태자는 비명에 간 민비를 다시 만나기라도 한 듯이 반가워했다.

이 일로 그는 고종의 총애와 신임을 독차지하였고 날로 벼슬은 높아졌다. 대한제국기에 그는 경무사·경위원 총관·헌병사령관·원수부 검사국장 등을 지내면서 경찰·군사부분에서 그는 최고의 실력자로 행세했다.

단돈 만원에 일본공사의 첩자노릇

한편 대한제국 초창기 이근택은 친러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우선 출세의 은인인 민비를 일본 사람들이 시해했기 때문에 일본과는 개인적인 감정이 좋지 않았다. 또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본 까닭도 있었다. 조선 내에 친일세력 부식에 혈안이 돼 있던 일본측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급기야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내 친러파 대신들을 매수·회유키로 방침을 세웠다. 여기에 제일 먼저 걸려든 사람이 ‘한일의정서’ 체결 당시 외무대신 서리였던 이지용(李址鎔)이었다.

그는 단돈 1만 원에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 매수돼 궁중의 비밀을 낱낱이 하야시에게 보고하는 첩자노릇을 하였다. 일제는 회유와 협박이 통하지 않는 이용익(李容翊)은 일본으로 납치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산이 보이자 한국 내에서 그들의 기세는 갈수록 당당해졌다. 정부대신들 가운데서도 일본 쪽으로 기우는 자가 한둘씩 늘어갔다. 이근택 역시 친러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일본세력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로서는 대세가 기울고 있다는 것을 감잡기 시작했고 그러자 이를 틈타 또 다른 출세를 계획하였다.

당초 친러파였던 그는 친일파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하였다. 그는 일본공사관으로부터 기밀비로 30만 원을 받고는 그 대가로 궁중의 기밀사항을 정탐하여 이를 일본측에 제공하였다.

1905년 9월 ‘을사조약’ 체결을 앞두고 그는 군부대신직에 올랐다. 이 무렵 그는 완전한 친일파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그 공로로 이듬해 일본정부로부터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을 받았다.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퇴궐한 이근택은 집안 식구들을 불러모아놓고 조약체결 광경을 설명하면서 “내가 오늘 을사5조약에 찬성을 했으니 이제 권위와 봉록이 종신(終身)토록 혁혁(赫赫)할 거요”라고 자랑하였다.

이근택 집 계집종의 '호통'

▲ 충남 공주시내 외곽 모처에 있는 이근택의 묘지. 1979년에 조성된 이근택의 묘지를 시작으로 내림차순으로 4대가 누워 있다.
ⓒ 오마이뉴스 정운현
순간 부엌에서 식칼(饌刀)로 도마를 후려치는 소리가 나더니 한 계집종이 마당으로 뛰쳐나오면서 호통을 쳤다. “이 집 주인놈이 저렇게 흉악한 역적인 줄도 모르고 몇 년간 이 집 밥을 먹었으니 이 치욕을 어떻게 씻으리오” 하고는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

계집종이 집을 나가자 이어 오랫동안 같이 지내오던 침모(針母)도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대한매일신보』, 광무 9년 11월 25일자·제86호). 일개 계집종이 이러했을진대 민중들의 분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조약체결 이듬해 2월 그는 취침중 자객들의 습격을 받고 13군데나 자상(刺傷)을 입었으나 겨우 목숨은 건졌다. 거의 회를 쳐놓다시피 한 그를 한성병원에서 한 달 만에 살려낸 것이다. 그를 치료한 주치의는 나중에 2등 태극장을 받았다.

한번 친일로 들어선 그의 친일행각은 1910년 ‘한일병합’ 때까지 지속됐다. ‘병합’ 후 일본정부는 공로자들에게 공적에 따라 작위와 ‘합방은사금’을 공채(公債)로 주었다. 이근택은 같은 을사오적인 권중현(權重顯)·박제순(朴齊純) 등과 같이 훈1등 자작(子爵, 4등급)과 매국공채 5만원을 받았다.

‘병합’ 후 그 해 10월 중추원 고문으로 취임한 그는 1919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 그의 작위는 장남 이창훈(李昌薰)이 이듬해 2월 20일 습작(襲爵), 해방 때까지 유지하였다. 이창훈 역시 일제하 몇몇 친일단체에서 활동하였는데 말하자면 대(代)를 이어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된 셈이다.

이근택 3형제 모두 일제 작위받은 친일파
3형제 모두 아들에 작위 세습... 친일귀족 6명 배출한 셈

이근택은 형 이근호(李根澔)와 동생 이근상(李根湘) 등 3형제가 ‘한일합병’ 후 작위를 받았다. 이근택은 자작, 형과 아우는 각각 남작을 받았다. 일제시대를 통틀어 3형제가 작위를 받은 경우는 이 집안이 유일하다. 또 이들의 사후 작위는 모두 자식들이 습작하였다.

이 집안의 ‘스타’는 단연 이근택. 이근택이 출세길에 들어서자 형제들이 뒤이어 벼슬길에 올랐다. 1892년 진사에 급제한 동생 이근상은 군부 주사를 거쳐 1906년 궁내부 대신이 되었다.

다시 시종원경과 구한국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그는 ‘한일병합’ 때 훈2등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일제하에서 중추원 고문과 식산은행 감사를 지냈다. 1920년 1월 사망하자 그의 작위는 장남 이장훈(李長薰)이 그해 5월 10일자로 습작하였다.

이근택의 형 이근호는 1878년 무과에 급제하여 경무사, 충청·전라·경기 감사, 교육참모장, 법부대신을 역임하고는 1906년 시종무관장을 지냈다. ‘병합’때 훈1등 남작을 받았다. 그의 작위는 아들 이동훈(李東薰)이 습작하였다. 습작자까지 포함하면 한 집안에 귀족이 6명이나 나온 셈이다.

『조선귀족열전』을 편찬한 오무라(大村友之丞)는 이들을 두고 “3형제가 모두 왜목림(倭木林) 가운데 3회(會)로서 대신에 올라 일문의 성망을 현양하고 권세를 장악했으니 영광이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고 했다. 그러나 당시 세인들은 나머지 두 형제를 포함해 이 집안 5형제를 ‘5귀(鬼)’라고 불렀다고 한다. / 정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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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