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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된 "특제 18번" 라면. 정말 먹음직스럽다.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격언을 실감했다.
ⓒ 박철현
장면 1

골든 위크 마지막 날 "작은 에도"라 불리우는 '카와고에'를 다녀온 다음, 우리 부부는 한층 사이가 좋아졌다. 사이가 좋아진 것에는 물론 오랜만에 데이트를 했다는 아주 당연한 이유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항상 어디를 가려면 돈 걱정부터 해야 했던 과거의 몇 차례 여행 경험에서 비로소 벗어났다는 즐거움이 더 크지 않았나 생각한다.

연애를 막 시작했을 때 아내는 일본의 잘 알려진 곳, 이를테면 디즈니랜드, 하꼬네 온천 같은 관광 명소를 전혀 몰랐던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가이드를 해 주었다. 지금도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때마다 '만엔' 단위의 데이트 비용이 꽤나 큰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우연찮게 경험한 4680엔짜리 카와고에의 저렴한 도보 여행은 "앞으로 우리 부부의 데이트는 이래야 한다"는 확신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카와고에를 다녀온 지 2주만에 다시 3천엔짜리 여행에 나섰다. 이번에 간 곳은 잘 알려지지 않은, '진미(眞味)의 거리'라 일컬어지는 낡은 동네 '오기쿠보(荻窪)'였다. 신주쿠에서 전철로 불과 12분이면 갈 수 있지만, 일반 여행객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 그곳에서 만난 특제 라면을 독자 여러분들께 소개한다.

장면 2

흔히 동경 시내 라면의 격전지라고 하면 타카다노바바나 시부야, 이케부쿠로 등을 떠올린다. 개중에는 심바시나 긴자의 고급 라면집을 꼽는 사람도 있지만, 라면은 어디까지나 라면이다. 한국인의 감각에 '라면'과 '고급'은 어울리지 않는다.

일본 라면은 종류가 엄청나게 다양하다. 국물에 들어가는 양념이 간장인가 소금인가 된장인가에 따라 쇼유, 시오, 미소 라면으로 구분된다. 그 안에 다시 '돈코츠(豚骨)'라 불리는 돼지 뼈를 우려낸 국물이 들어가게 되면 그건 돈코츠 라면으로 특화되어 불린다. 마늘, 파, 시금치 등 라면에 들어가는 야채의 종류에 따라, 그리고 면발의 종류에 따라 이름이 다시 변화하기도 한다.

여름이 거의 없는 추운 지역인 홋카이도의 라면은 대개 맵기 때문에 국물이 붉은 빛깔을 띠고, 큐슈 지방의 라면은 돼지 사골을 상당히 많이 우려내기 때문에 흰 색을 띤다. 그래서 붉은 빛을 띠는 라면을 가리켜 '홋카이도 라면', 돈코츠 라면은 '큐슈의 라면'이라고 통칭해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아내와 내가 찾은 오기쿠보의 라면은 이런 '상식적'인 맥락과는 좀 떨어져 있었다. 일본 라면을 다룬 한국의 가이드북(동경편)에는 흔히 타카다노바바의 '나의 하늘(俺の空)'이라던가 하라주쿠의 '쟝가라(ジャンガラー)', 시부야의 '코류라면' 등을 동경 제일의 라면으로 꼽고 있다.

일본의 라면 마니아들도 대강 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긴 먹는 음식을 가지고 일반적인 결론을 내려 동경 제일의 라면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긴 하다. 나도 위의 라면들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기쿠보의 라면은 무언가 색달랐다.

그 색다름은 바로 '라면만 30년 이상'이라는 간판과 명예로 먹고 사는 장인들의 일편단심을 느꼈을 때 우러나오는 존경과 감탄에서 나온다.

장면 3

카와고에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흐린 날씨. 한바탕 비라도 쏟아져 내릴 듯한 우중충한 하늘도, 우리의 여행을 막지는 못했다. 집에서 전철로 두 정거장만 가면 되는 간단한 교통편도 이럴 땐 도움이 된다.

일요일에는 항상 늦게 일어나는 아내를 위해 모처럼 솔선수범하면서 집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했다. 전날 새벽녘까지 영화를 보는 바람에 늦게 잠자리에 든 아내는 오후 3시쯤 느지막하게 눈을 뜬다.

깔끔한 방안과 깨끗하게 치워진 주방을 보고 칭찬 받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는데, 아내가 그런다.

"빨래는?"
"(뭐냐?) 아니, 밖에 날씨가 우중충해서…."

주섬주섬 일어난 아내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향하다가 요리 재료가 떨어졌다면서 사오라고 한다. 칭찬 받지 못해 의기소침해진 내가 자전거 열쇠를 들고 말없이 문으로 향하는 뒷모습이 안스러웠던 것일까? 아내는 나를 부른다.

"아니다. 밖에서 먹자. 오빠. 오기쿠보에 라면이나 먹으러 갈래? 내가 살께."

아내의 제안에 의기소침했던 기분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말로만 듣던 오기쿠보 라면. 나름대로 라면 마니아인 나로서는 절로 입에 군침이 돈다.

약 20분 후 오기쿠보역 북쪽 출구로 나온 아내와 나는 나오자마자 닭꼬치집의 빽빽한 손님들을 보고 감탄한다. 역 왼쪽의 상점가 거리에 들어선 가게의 80%가 식당인 진미의 거리.

서민적인 분위기의 중화 요리점, 스시집, 한국 가정 요리집, 야끼니꾸 전문 식당 등 아시아권의 음식점이 즐비하다. 그러나 기대했던 라면집이 없다. "라면집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는 나에게 아내는 씨익 웃으면서 자기만 따라 오라고 한다.

상점가의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와! 라면이다! 그렇다. 세상에 라면전문점이 하나 건너 하나씩 자리잡고 있다. 가지각색의 종류. 기본은 간장, 소금, 된장 라면이지만, 각 가게마다 특색이 있는, 이른바 가게의 프라이드를 건 라면이 메뉴판의 상단에 커다랗게 표시되어 있다.

어디를 선택할까? 즐거운 고민을 하다가 라면 골목 끄트머리에 있는 '특제 18번' 라면 전문점을 선택했다. 가게에서 풍겨나오는 마늘 냄새에 호감이 갔기 때문이다. 마늘 냄새를 꺼려하는 일본인들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마늘이 듬뿍 들어간 라면을 내놓을 수 있는 주인장의 호기로움이라니….

▲ 올해 60살이 되었다는 메구로. 라면과 벗삼아 살아온 40년 세월에 존경을 표하면서.
ⓒ 박철현
▲ 주방 한켠에 놓여 있는 다진 마늘. 아내는 저 마늘이 한웅큼 들어가는 순간, 절망의 눈빛으로 변했다.
ⓒ 박철현
▲ 라면 18번이라는 간판이 커다랗게 걸려 있다. 저녁 시간이 되니 손님들이 금세 들어차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 박철현
아내와 나는 급하게 "특제 18번"을 주문했다. 훤히 보이는 주방의 한쪽에서는 라면 국물이 끓고 있고, 올해 60세를 맞이했다는 주방장 메구로는 능숙한 솜씨로 칼질을 했다.

왜 특제 18번이냐고 물어 보니 18가지 재료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18번은 '가장 능숙하다'는 의미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딴건 몰라도 라면은 능숙하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웃으며 답한다.

가게 내부를 감싸고 도는 구수한 라면 내음. 마지막에 마늘을 한웅큼 털어 넣는 것으로 라면 완성이다. 먼저 내 것에 마늘이 엄청나게 들어가는 것을 본 아내는 기겁을 한다.

"저기, 저는 마늘 빼주세요."
"마늘 넣으면 특제 18번이 아니기 때문에, 마늘을 넣어야 해요."

웃으면서 한웅큼 보다 더 많이 집어 넣는 메구로.

나는 마음 속으로 "나이스!"라고 외치고 있었다. 모처럼 제대로 된 가게를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라면에 자존심을 걸고 있는 아저씨의 미소가 너무나 매력적이다.

맛? 이건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나름대로 라면 마니아인 내가 첫손에 꼽는 라면을 발견했다는 그 말이라면 제대로 설명이 될까?

그렇게 맛있게 라면을 먹으면서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가게를 한 지 얼마나 됐냐는 질문에 메구로는 "35년 정도 되었지요. 제가 라면 가게에 처음으로 들어간 것이 20살 정도였으니까, 그때부터 따진다면 40년 정도 라면을 만들고 있는 셈이네요"라고 한다.

세상에! 40년이다. 40년. 과연 오기쿠보의 '색다름'은 다른 곳들과 차원이 틀리다.

"요즘에는 체인점도 많이 생기고 해서 전통적인 테즈쿠리(직접 손으로 만드는) 방식의 가게가 많이 줄었어요. 그래도 오기쿠보는 꽤나 오래된 가게들이 많지요. 저 골목(라면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50년 된 가게도 있는데…. 난 아직 한참 멀었지요(웃음)."

국물까지 단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전부 먹은 나를 아내는 감탄의 눈빛으로 쳐다본다. 라면 국물을 잘 먹지 않는 아내도 반 정도는 먹었다.

어! 근데 마늘이 보인다.

"마늘 안 먹어?"
"어? 응. 아무래도…."
"이리 줘."

아내의 라면 그릇을 뺏어서 마늘만 건져 먹었다. 그런 나를 보는 아내의 놀란 눈빛.

"안 매워? 냄새 나지 않아?"
"한국인의 힘은 마늘 파워지, 하하하!"

크게 웃는 나를 가게의 손님들이 웃으며 쳐다본다. 아내가 도리어 머쓱해 하며 빨리 나가자고 그런다. 메구로도 "한국분이세요? 역시 마늘을 그렇게 잘 먹는 것을 보고 좀 신기하다고 생각했어요"라며 미소짓는다.

한그릇에 850엔. 그러나 전혀 아깝지 않다. 탁월한 맛과 사람 사는 인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색다름'은 충분히 850엔의 가치가 있었다. 사실은 아내가 내 것까지 지불했다는 것이 더 큰 이유이긴 하지만.

라면 가게를 나온 후 다시 오기쿠보 골목 이곳저곳을 돌아 다녔다. 인적이 드문 곳에 자리잡은 신사와 타이, 인도식 물건들을 팔고 있는 조그만 가게들을 보는 재미는 짭짤하다. 사람이 없는 조그만 골목과 상점가를 유유히 산보하는 재미.

일본으로 오는 많은 한국사람들이 시부야나 신주쿠 등 번화가 말고 이런 조용한 곳을 다녀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그 가이드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나는 다음 주에도 일본의 조그만 동네들을 싸돌아 다닐까 생각 중이다.

장면 4

어제 라면을 먹은 후, 아내와 뽀뽀 한번 못했다. 마늘 냄새가 지독하긴 지독한가 보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들! 마늘 많이 드세요! 그게 한국인의 파워니까요.

▲ 오기쿠보 북쪽 출구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상점가. 1층 가게의 80%가 전부 식당인 신기한 거리.
ⓒ 박철현
▲ 오기쿠보 뒷골목에 자리잡은 하쿠산 신사. 아무도 없는 그 조용함에 조금 무서워지기도 했다.
ⓒ 박철현
▲ 오기쿠보 북쪽 출구에 나오자마자 보이는 닭꼬치 집. 언제나 만원인 이곳은 오기쿠보의 명물이기도 하다.
ⓒ 박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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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도쿄거주. 소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 에세이 <이렇게 살아도 돼>, <어른은 어떻게 돼?>,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를 썼고, <일본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를 번역했다. 최신작은 <쓴다는 것>. 현재 도쿄 테츠야공무점 대표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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