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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 필자는 지난해 11월 타계한 독립운동가 이강훈 선생(전 광복회장)의 사당동 자택을 두어 번 방문한 적이 있다. 필자가 선생을 찾아뵌 것은 친일인사들의 이면사를 듣고 싶어서였다. 선생은 청년 시절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을 모셨다.

친일파 연구에 가장 큰 어려움은 관련자료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또 이항녕씨같은 양심고백자가 아니고서야 관련 증언을 듣기는 더욱 어렵다. 그럴 경우 할 수 없이 그들과 반대편에 서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을 통해 관련 얘기를 듣곤 한다.

언젠가 한번은 낮에 선생의 자택을 방문을 했더니 선생께서 "낮에는 방문자가 많으니 긴요한 얘기를 하려면 밤늦게 찾아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 뒤에 한번은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날 밤이 늦도록 이런저런 얘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선생께서 혼잣말로 "내가 젊은 사람 같으면 내 손으로 끌어내려 버리겠는데…" 하시면서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건 한 친일인사의 동상이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버젓이 서있는 것에 대한 탄식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청주 삼일공원에 서있던 친일목사 정춘수의 동상을 두고 한 얘기였다. 그 뒤 필자는 순국선열유족회에서 발행하는 <순국>지에 이 내용을 소상히 소개한 바 있는데 정춘수 동상 철거는 이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청주시 상당구 수동에 위치한 우암산 기슭에는 1919년 3.1 의거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충북지역 출신 6인(손병희·권동진·권병덕·신홍식·신석구·정춘수)의 동상이 서있다. 이 동상들은 지난 80년에 건립됐다.

그런데 현재 이곳에는 맨 오른쪽 동상은 인물상은 없고 좌대만 서 있다. 지난 96년 2월 8일 이 지역시민단체 관계자들이 3.1절을 앞두고 정춘수의 동상을 철거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정춘수 동상 철거를 두고 논란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분명한 친일행적 앞에서 그 누구도 동상 철거를 막을 명분을 찾지 못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춘수 동상은 애초에 세우지 말았어야 했다. 즉 정춘수가 충북지역 민족대표 6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는 해도 그의 친일행적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있는 상황에서 동상 건립을 강행한 것은 잘못이었다.

친일문제를 논할 때 불거지는 사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친일전력자들의 동상을 공공장소에 버젓이 세워 마치 존경의 대상인양 미화하는 행위이다. 이같은 사례는 민족·역사문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부족했던 시기에 주로 자행돼왔다.

그러다가 지난 95년 해방 50주년을 맞아 과거사 청산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곳곳에서 친일인사들의 동상(흉상) 철거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해당인사의 친일행적이 문제가 돼 동상(흉상)이 철거된 사례는 이미 적지 않다. 친일작품을 남긴 극작가 유치진의 흉상이 96년에 철거됐으며, 지난 2000년 7월에는 서울 중앙여고에 서 있던 여성교육자 황신덕의 동상이 철거됐다. 황씨는 일제말기 제자들을 정신대로 내보낸 사실이 밝혀졌다.

이어 2001년 연말에는 서울 관악구 광신고교 교정에 서있던 이 학교 설립자이자 초대 재단이사장을 지낸 박흥식의 동상이 철거된 바 있다. 박흥식은 해방후 반민특위에 제1호로 검거됐던 친일기업인이다.

지난 2000년 11월 5일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등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행적 등을 문제삼아 서울 영등포구 문래공원에 서있던 박 전 대통령의 흉상을 철거한 바 있다.(이후 구청 당국에서 제자리로 원위치 시킴)

또 박 전 대통령이 쓴 서울 종로 탑골공원의 현판('삼일문') 역시 이듬해 11월 철거됐으며, 박 전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사업 역시 현재로선 불투명한 상태다. 충분한 국민적 합의없이 무리하게 기념관 건립을 추진한 것이 결국 고인을 두 번 죽이고 있는 셈이다.

수도권 지역 어린이들이 즐겨찾는 과천 서울대공원에는 <동아일보> 창업주인 인촌 김성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지난 4일자 <오마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 동상은 지난 91년 11월 '인촌 김성수 탄신 1백주년 기념사업추진회'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인촌은 어린이와 특별히 관계있는 인물은 아니다. 특히 그의 일제하 행적 등을 두고 논란이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인물의 동상을 서울대공원과 같은 공개적인 장소에 건립해 존경, 혹은 경모(敬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이제라도 공공장소에 건립된 역사적 인물들의 동상에 대해 그 타당성 여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또 필요한 경우 과감하게 철거조치를 취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 정립을 위해서도 마땅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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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