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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평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 1946년 4월 26일자. 이한빈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은 허성택 위원장의 대회사가 실려있다. (신문의 왼쪽 박스)

꼭 58년 전인 1946년 5월 1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20만 노동자와 군중이 모인 가운데 해방으로 되찾은 메이데이 기념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일제치하인 1923년부터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지하에서 숨죽여 기념해오던 만국 노동자의 생일을 해방된 조국에서 맞이하는 감격스런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당시 57만 노동자를 거느린 노조 전국조직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허성택 위원장은 대회사에서 자신과 함께 일제치하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도중 105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이다 죽어간 한 노동자의 비통한 죽음을 알렸다.

전평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 1946년 4월 26일치에 실린 허 위원장 대회사 가운데 관련 대목을 요즘 말투로 옮기면 이렇다.(○표시는 판독이 어려운 글자)

"특히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하려는 것은 함남 신흥 출생 李翰○(이한○) 동지입니다. 이 동지는 1929년 신흥 탄광 습격 사건으로 망명했다가 1936년 검거되어 5년형을 마치고 다시 강도 일제가 만들어 놓은 정치 예방 구금소에 구금되었습니다.

이 동지는 감옥에서 '정치 운동가를 석방하라', '예방구금소를 철폐하라', '야만적 박해와 비인간적 취급을 하지 말라'는 등 일곱 가지 요구를 들고 두 번 단식 투쟁을 진행해 적지 않은 승리를 하였으나, 놈들은 제일로 미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온갖 모략, 위협, ○○무고와 테러를 하였기 때문에 분을 이기지 못하여 1943년 3월 1일 단식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놈들은 단식한지 20여일 후에도 (그를 향해)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국 일본에 반역자임으로 죽으라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능욕을 가하였습니다. 그는 단식한지 백 오일 만인 6월 13일에 39세를 최기(最期)로 영원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뼈만 남았던 그는 죽기 삼일 전에 나에게 부탁하기를, 나는 더 살 수 없으니 나의 뒷일을 동무들이 계승하여 조선 독립을 완성하기를 바라며 만일 동무가 살아 나가거든 동무들에게 일제가 이같이 나를 죽인 것을 전하여 달라고 하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 후 기회를 얻지 못하여 여러분에게 알려드리지 못하고 오늘 이 기회에 소개합니다

그는 적과 가장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비참하게도 장렬하게 전사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선배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이와 같이 싸웠습니다. 우리들은 선배들의 위대하고 장렬한 투쟁을 본받아 이 기념을 통하여 더욱 굳게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전평 위원장과 같은 형무소에 수감되지 않았다면 한 노동자는 죽음조차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터이다. 그 후 안타깝게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전평을 파괴하고 대신 반공노동체제인 어용 대한노총을 세우면서 그는 다시 역사에 파묻히고 말았다.

단 하나 <전국노동자신문>에 실린 전평 위원장 대회사가 유일한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었는데, 이 조차도 그 뒤 40여 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해방전후사 연구 열풍이 학계를 휩쓸던 1980년대에도 그의 죽음은 빛 바랜 노동자 신문 활자 속에 잠긴 채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이름 석 자 중 마지막 한 자마저 잃어버린 채-.

역사 속에 묻혔던 한 노동자

▲ 노동자 이한빈 신상기록카드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역사는 우연의 반복인가. '105일 옥중단식 노동자 이한○의 죽음'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다시 일어선 노동자들이 메이데이 기념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그를 알아본 사람은 역사학연구소 박준성 선생이었다. 박 선생은 1989년 4월 메이데이 행사를 앞두고 특집논문을 쓰려 관련자료를 준비하다 '이한○ 기사'를 읽게 된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어렵사리 구한 전국노동자신문 복사본을 읽어 나가다가 한 기사에서 한참 동안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허성택이 소개한 '이한○ 동지'의 삶과 투쟁을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105일 동안이나 먹지 않고 목숨을 지탱할 수 있을까?'하는 호기심 어린 의문이었다. … 또 하나는 이한○의 온 이름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함이었다. 복사본으로는 李翰 다음에 이름 한 글자가 보이질 않았다.… 이한○ 동지의 보이지 않는 이름 한 글자가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허성택이 소개한 까닭에 '이한○ 동지'는 이름 세 글자 가운데 두 자는 알 수 있지만, 그것이 마치 역사 기록의 뒤편에서 온 몸으로 역사를 책임지고 역사를 만들어 나갔던 사람들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기록된 역사의 뒤편에는 얼마나 숱한 노동해방 민족해방의 전사들이 ○○○으로 숨겨져 있을까."


'이한○ 찾기'에 나선 박선생은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함께 공부하던 안태정의 도움으로 <해방일보>에도 같은 기사가 실렸음을 알고 '李翰○'의 마지막 한 글자 '彬'(빈)을 알아냈다. 또 도서관을 뒤져 일제시대 검거 투옥된 인사들의 신상기록을 모은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한빈의 사진과 신상자료를 찾아냈다. 박선생은 이 순간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 여기에 이한빈의 신상기록 카드가 실려 있지 않은가.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 찡할 사이도 없이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맞다. 본적이 함남 신흥이고, 1905년 생이니까 단식 투쟁 끝에 목숨을 잃은 1943년이 우리 나이로 39살이다.

허성택은 신흥 탄광 습격 사건을 1929년이라고 했는데, 16년 전 일이라 연도를 잘못 기억한 모양이다. 1930년 6월에 함남 신흥 탄광 노동자 1백50여명이 탄광시설을 파괴한 사건을 말하는 것 같다. 신흥탄광습격 사건 뒤 망명할 때는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 속성반을 수료하기도 하였다.

이한빈이 5년 동안 감옥살이 한 것은 1925년부터 식민지 조선에 적용하기 시작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이었다. 치안유지법은 일본에서 사회주의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식민지 조선에서는 사회주의운동을 포함한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던 악법이었다.

5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 나왔다가 다시 잡혀 들어간 정치예방구금소는 일제가 1941년에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제정하여 전향하지 않은 사상범을 검거하여 격리 수용한 서대문구치소 안의 강제수용소였다."


박준성. 등에는 커다란 배낭, 가슴에는 수동 사진기를 맨 차림으로 1990년대 후반 내내 노동현장에서 이한빈을 알리고 눈물과 감동 없이는 앉아 있을 수 없는 명 강의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의 역사'로 숱한 노동자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한 주인공이다.

40여 년 만에 이한빈, 그 이름을 찾아 노동의 역사 그 질긴 동아줄을 잇고 21세기 노동자 가슴 속에 부활케 했던 박 선생은 안타깝게도 지금 이 순간 몹쓸 병마와 싸우고 있다.

이 자리를 빌어 쾌유를 빌면서 박선생이 2004년 2월 13일자로 쓴 <투병일기 3 - 오늘은>(www.ihs21.org) 한 대목을 옮겨본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김남주 시인이 49살 나이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날입니다 … 때로는 기분이 예민해지고 마음이 약해지는 나를 달래고 추슬르면서 다시 1980년대 즐겨 외우고 다니던 김남주 시들을 소리내어 그리고 가만 가만히 읽었습니다."

빼앗긴 노동절

▲ 이미 고인이 된 혁명시인 김남주.
ⓒ 민족문학작가회의
박 선생 말대로 영원한 전사요, 혁명시인인 김남주는 지금부터 꼭 10년 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된 오랜 징역살이 후유증으로 얻은 병마와 싸우다 눈을 감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사 김남주가 갇혀있던 80년 9월부터 88년 12월까지의 세월은 노동자들에게는 아직 '빼앗긴 노동절'의 시대였다.

날짜를 빼앗은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선전하는 5월1일을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함께 즐기고 축하할 필요는 없다"며 1959년부터 노동절을 5월1일에서 어용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10일로 옮긴 이승만이었다.

5.16 군사 쿠테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껍데기만 남은 노동절 그 이름까지 못마땅했는지 1963년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근로자의 날'로 바꿔치기 했다.

허덕허덕 보릿고개 넘어 미싱을 타던 누이들의 60년대, 다락방 공장에서 피를 쏟고 시들어 가는 소녀를 구하려 몸부림치다 끝내 몸을 불살라야 했던 전태일의 70년대를 넘어, 거제에서 구로까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찬란한 노동의 새벽을 향해 꿈틀꿈틀 대던 1985년 구로동맹파업·대우자동차 파업까지, 노동의 역사는 모진 시대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빼앗긴 노동절'의 시대를, 시인은 감옥에서 우윳곽에 칫솔을 갈아 써서 간수의 눈을 피해 몰래 밖으로 내보낸 시 '깃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오늘은 3월 10일 근로자의 날이다
그동안 일년 삼백육십오일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출근을 해줬다고
하루도 빼먹지 않고 야근을 해줬다고
거스름돈을 긁어모아 자본가가 근로자에게
상 하나 큼직하게 내려주는 날이다 치하의 말씀 곁들여
개근상도 주고 야근상도 주는 날이다
오늘은 5월 1일 메이데이 날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리인 세계를 끝장내기 위해 노동자들이
민주의 깃발을 치켜든 날이다
노동삼권 보장을 위하여 자주노조 결성을 위하여
형제의 결속과 투쟁을 개시한 날이다
- 고 김남주 시인의 '깃발' 가운데서


시인은 노래한다. 저들이 빼앗아 간 건 날짜만이 아니고, 이름만이 아니다. 저들은 메이데이에 담긴 단결 투쟁 해방의 정신을 빼앗아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자,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끝장내자, 투쟁의 무기를 치켜들자! 고-.

시인이 만 9년의 징역살이 끝에 가석방돼 남민전 동지이자 옥바라지하던 색시 광숙과 한참 늦은 혼례를 치른 것은 1989년이었다. 앞서 얘기했듯 박준성이 이한빈을 찾아내 다시 세상에 알린 해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 해부터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주인공들은 '3월10일 근로자의 날'을 박차고 5월1일 노동절 메이데이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실로 40여 년 만에. 어쩌면 이 자리에 는 노동자 이한빈의 영혼도 환하게 웃으며 참가했으리라.

▲ 고 김남주 시인 민주사회장 자료(1994.2.16)
영웅은 요절하는가. 시인 김남주는 마흔 여덟의 젊은 나이에 온 몸에 췌장암이 퍼져 눈을 감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눈망울 초롱초롱한 네 살 박이 아들 토일이를 남겨둔 채-. 시인이 잠든 그 해 김영삼 정권은 '생일을 돌려달라'는 노동자들의 아우성에 못 이겨 3월10일을 5월1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이 빼앗은 노동절 날짜를 꼭 35년 만에 돌려 받은 것이지만, 박정희가 앗아간 '노동절' 이름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연거푸 들어섰지만 돌려주겠단 얘기조차 없다.

이한빈이 스러진 지 61년, 혁명시인 김남주가 잠든 지 10년, 2004년 5월1일 메이데이를 코 앞에 두고 있다. 1886년 5월 1일 미국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일하고도 먹고 살 수 있게 해달라'며 들고 일어선지 118년 되는 해이다. 미국 노동자의 함성을 되살려 5월 1일을 만국 노동자 단결의 날로 정하고 1890년 5월 1일 전 세계에서 일제히 단결투쟁에 나선 뒤 이를 기념하기 시작한 지 114주년 되는 해이다.

돌아보면 '빼앗긴 노동절'로 상징되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국내 자본 집단과 분단의 질곡도 모자라 일본과 미국이라는 당대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를 상대해야 했던 고난의 세월 그 자체였다. 짧은 승리 뒤 긴 패배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한국 노동운동은 정치적 공간이 확대되는 조건에서만 활성화의 계기를 찾고 전투성을 발휘하다가 곧 해체의 과정을 걷게 되는 게 특징"이라며 절망했다.

해방공간과 이승만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전태일 이래 노동운동 과정에서 분신 자살한 노동자만 44명, 투신자살에 의문사까지 목숨을 잃은 노동자는 모두 100명이 넘는다. 노태우 정권이래 노무현 정권 첫해까지 16년 동안 일주일에 다섯 명 꼴로 3701명의 노동자가 구속되었다.

그러나 어둠을 넘어 죽음을 넘어 감히 희망이란 단어를 꺼내기도 어려웠던 긴 겨울 공화국의 차가운 얼음장을 온 몸으로 깼던 이들이 있었기에, 역사속에 스러져간 또 다른 '이한빈'의 눈물과 땀과 피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동트는 노동의 신새벽을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2004년 메이데이를 맞아, 이 땅에 참다운 노동의 역사를 이어온 수많은 '이한빈'에게 머리숙여 큰절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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