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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확히 20년 전에 활자화하여 하느님께 참으로 간절하게 올렸던 내 '기도'를 소개할까 한다.

20년 전이라면 1984년, 전두환 5공 정권의 한창 시절이다. 모든 언로(言路)는 막혀 있었다. 그때는 진정한 의미의 방송도 신문도 없었다. 모든 언론이 정부 당국의 '보도지침'에 따라 움직이는 군사독재권력의 나팔수였고, 그 틈새에서 오직 <동아일보>만이 조금씩 '행간 읽기'가 가능한 곡예를 할 뿐이었다. 그런 동아일보가 오늘날에는….

어디에도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없었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천주교 각 교구들의 '주보'는 언어 소통이 가능한 매체였다. <가톨릭신문>같은 교회의 대표적 매체는 일반 언론매체와 마찬가지 상황이었지만, 각 교구들의 주보는 어느 정도 '자유'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속한 대전교구의 교구보인 <대전주보>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글을 쓸 수 있었다. 5공 시절 동안 나는 대전주보에 꽤 많은 글을 썼다. 비록 한정된 매체지만,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매체가 우리 교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내게 더 없는 위안이었다. 대전주보에 쓰고픈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그 숨막힐 듯한 암흑 시절을 살아낼 수 있었다는 말은 결코 과장된 허사가 아니다.

아무튼 그 시절에 대전주보에 썼던 글 하나를 오늘 소개한다.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1984년 12월 30일자 대전주보에 쓴 글이다. 총선과 관련하는 글이고, 내 절절한 소망을 담은 기도다.

당시 대전주보 편집책임 신부님은 내 글을 주보 8면 전체에 실으면서 '기도의 향연'이라는 꼭지 이름을 달았다. 그 고마움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런데 오늘 그 글(기도)을 찾아 읽어보니 눈물이 날 것만 같다.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거나 바뀐 것이 많건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도 많기 때문이다. 그 변하지 않은 것은 생명력이 참으로 완강하고 질기다. 그리고 그것들은 발전적인 변화를 방해하고 오히려 능멸하기도 한다. 그 기이한 현재진행형의 곡절이 내게 안겨주는 비감은 가혹하다. 정말 눈물이 난다.

하여 더욱 절절한 마음으로 20년 전의 기도를 오늘 다시 하느님께 바친다. 제17대 총선이 임박한 이 시점에서…. 그리고 절박한 상황에서….


*기도의 향연


하느님 전상서


하느님!
지난 한해도 우리의 땅과 하늘은 너무 맵고 뜨겁고 시끄러웠으며 눈물겨웠습니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이라는 것도 실로 무색할 지경이었습니다. 당신의 지상 대리자이며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최초로 이 땅을 밟으셨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마저도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흘리셔야 했습니다. 그런 최루탄 가스는 봄과 가을 내내 이 땅을 뒤덮고 하늘을 가렸습니다.

왜 우리의 봄은 화창한 날씨와 싱그러운 명지바람과 감미로운 꽃내음을 거스르며 맵고 뜨거운 최루탄 가스로 뒤덮여야 합니까. 왜 우리는 봄에 꽃잎들이 이울고 스러지는 소리와 핏빛 음영을 먼저 듣고 보아야 합니까. 왜 우리의 가을은 해마다 더 많은 페퍼포그와 최루탄과 돌멩이가 날아야 합니까. 왜 우리는 가을에 오롯한 거둠보다는 상실과 깨어짐과 무너짐을 더 많이 안아야 합니까.

하느님!
우리네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民草)들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어디에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이 지경이 계속되고 있는지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진실과 옳음이 앞서야 한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
어린 학생들에게 이성을 갖기를 요구하는 만큼, 그들에게 눈을 흘기고 욕설을 하기에 앞서,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특히 힘을 가진 어른들이 진실과 양심의 눈으로 사태를 바라보며 현명하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도록, 저희 한국 사람 모두에게 밝은 지혜를 주십시오.

언제나 저희에게 진정한 가치를 일깨워 주시는 하느님!
얼마 전 미국에서는 그 나라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의 대통령 선거가 우리에게는 참으로 부러운 것 중의 하나입니다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너무도 우리나라와 관계가 깊기에, 저희 한국 국민들은 그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사랑이시고 지혜이신 하느님!
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건 간에, 미국의 국가 이익이라는 정략적 차원에서 그들의 우방이 존재하지 않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똑같이 나누어 갖는다는 차원에서 그들의 우방이 존재하며, 그런 진정한 가치가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나라들에 현실적으로 구현되어지도록 미국의 정치가들과 모든 미국인들에게 좀더 밝은 지혜를 주십시오.

우리 구원자로서 우리에게 해방의 의미를 일깨워 주시는 주님!
지금 우리 교회의 안팎에서는 '해방신학'에 관한 논의가 계속 분분합니다.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교황청의 훈령도 국내 매스콤의 고의적이고 왜곡적인 확대 해석 보도로 말미암아 오해를 불러일으킨 바 있으며, 해방신학 자체에 대한 매도 현상도 나타난 바 있습니다. 또한 많은 외교인들이 지금도 우리 가톨릭의 분열을 점치듯이 거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인류의 해방자인신 주님!
우선 우리 가톨릭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해방신학의 본 뜻과 참 모습을 알도록 일깨워 주시옵고, 우리 한국 주교회의에서 공표한 바와 같이,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교황청의 훈령이 인간의 비참과 불의를 보고서도 냉담하고 무관심한 자들의 변명을 위한 구실로 이용되지 않도록, 저희 모두를 지켜 주십시오.

저희에게 참 가치를 일깨워 주시는 주님.
지금 우리나라 대다수 국민들은 정치와 국가 장래에 대한 깊은 무관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정치가 없는 통치와 통제 속에서 살아왔고 심한 정변을 겪은 까닭에 패배주위와 체념주의에 빠져든 결과로 이제는 무관심주의 속에서 스포츠에나 열광하고 오락과 쾌락 따위만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현실입니다.

저희에게 각성을 주시는 주님!
우리 국민들로 하여금 바야흐로 도래한 국회의원 선거 때만이라도 정치에 대한 바른 관심을 회복하고, 국가 장래에 대해 고민할 줄 알게 하며, 어려운 정치 조건 속에서도 진정으로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 투표를 할 수 있도록, 저희 모두에게 밝은 지혜를 주십시오.

길이요 진리이신 주님!
민주주의의 중요한 한가지 요체인 국회의원 총선거를 실시하게 된 우리나라와 우리 모든 국민들을 축복하소서. 집권 여당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는 우리의 선거 제도 속에서도 참된 선거가 이루어지도록 비추어 주소서.

그리고 국회의원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기적인 출세욕으로만 선량 자리를 탐하지 않게 하소서.

더불어 모든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자신의 출세와 집안의 광영만을 기뻐하지 않고, 이 나라 이 사회와 이웃들에게 봉사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게 하소서.

또한 그들이 국회회원(國會會員)이나 국회위원(國會委員)의 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진정한 국회의원(國會議員)의 모습을 갖게 하소서. 그들 모두가 그들의 집단과 세력을 위해서보다는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며 살게 하소서.

하느님!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이 의미 깊은 시점에서 감히 청원하는 저의 이 기도를 자비로이 들어주시옵고, 저로 하여금 오늘의 이 모든 기도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아멘. (1984년 천주교 대전교구 <대전주보>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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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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