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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시가지의 모습
ⓒ 강인규
유학생으로 처음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나는 그 지루한 열 몇 시간을 미국의 모습을 상상하며 보냈다. 그동안 책, 영화, 텔레비전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미국은 개인적 정서와 만나 이미 분명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나는 그 이미지와 '실제' 미국이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자 마음 한 편에서 '실제 미국'에 대한 순진한 기대를 꾸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제 미국'을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 어떻게 떼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뉴욕의 허름한 뒷골목에서 어떻게 갱스터 영화가 일러준 범죄의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있으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보면서 어떻게 <러브 어페어>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낭만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거리에서 처음 만나는 낯선 사람들마저 내게 너무나 익숙한 의미를 안겨주게 될 터였다. 채 도착하지도 않은 저 먼 땅의 거리를 거닐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외모, 옷차림, 표정, 피부색 등에 악몽처럼 배어있는 이미지에 의해 판단 받게 될 것이다. 무서운 일이었다.

'가상의 도시'를 향해 가다

현대사회에서 '낯선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우리들은 처음 떠나는 행선지에 대해서조차 분명한 이미지를 갖고 있고, '실제' 방문은 이 인식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차원에 머물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을 '가상의 세계'로 파악한 보드리야르의 시각은 이해할만 하다. 대중매체의 이미지를 통한 간접경험이 실제경험을 압도하는 시대에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운 장소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뉴욕만큼 이미지에 가위눌린 도시가 있을까.

뉴욕의 형편없는 날씨나 악취 풍기는 지하철마저 '뉴요커'라는 가상적 이미지에 의해 낭만화되곤 한다. '뉴요커'가 문자 그대로 뉴욕이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입고, 거주하고, 소비하는 (정확히는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 상품과 연관된 문화적 이미지라는 점에서 '뉴요커'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개념일 뿐이다.

▲ 마틴 루터 킹
ⓒ 강인규
이처럼 현실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미지라는 매트릭스 세계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미국으로 향하는 시간 내내 포기할 수 없었던 미국의 '현실적인' 이미지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서로 다른 문화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비교적 평등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나의 이런 기대를 뒷받침해 준 것은 고등학교 시절 영어공부를 위해 읽었던 마틴 루터 킹의 연설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인권운동가였던 킹 목사는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계단에 서서 수많은 인파들을 향해 감동적인 메시지를 쏟아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그 노예를 부리던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의 식탁에 마주앉게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제게는 꿈이 있습니다. 불의와 억압의 열기로 이글거리는 저 황폐한 사막인 미시시피주가 언젠가는 자유와 정의의 단물이 흐르는 오아시스가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제게는 꿈이 있습니다. 제가 낳은 네 명의 자식들이 언젠가는 피부색이 아닌 인품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꿈

내가 킹 목사의 연설에 얽힌 역사적 배경을 깨닫게 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였다. 당시 이 연설문을 읽었던 고등학생은 남북전쟁이 끝난 후 100년이 지났는데도 '왜 노예와 노예의 후손이 더불어 사는 것이 '꿈'에 머물러야 했는지' 의아해하기보다는 그 글에 포함된 '관계부사의 용법'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만 했다.

이후 대학에 진학한 나는 영문법 책보다 더 두꺼운 토플책을 들고 다니게 되었지만 (더 정확히는 그 토플책이 주인 대신 도서관 자리를 맡는 데 사용되었지만), 킹 목사의 '꿈'이 미국 현실과 얼마 정도의 거리에 놓여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다만 킹 목사의 정신을 기리는 '마틴 루터 킹의 날'이 미국의 국경일로 정해져 있는 것을 보아 고인이 생전에 가졌던 꿈이 상당부분 진척되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졌을 뿐이다.

그런 나의 기대는 케네디 공항에 비행기가 닿으면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8월의 태양 아래에서 활주로 보수공사를 하거나 화물 하역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흑인들이었으며, 지친 얼굴로 택시 승강장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기사들은 대부분 아랍계 이민자들이었다.

모든 직업이 고귀하다는 생각은 변함없이 지켜온 신념이었지만 그들의 피로한 기색은 자신들의 직업이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택시가 시내로 들어서자,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 속의 시가지가 드러났다. 행인들 가운데 유모차를 끌고 도심지를 여유 있게 걷는 여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유모차에 타고 있는 아기는 대부분 백인이었고, 그 수레를 미는 손은 거의 예외 없이 검었다. 이들의 현대적 옷차림과 뒤의 화려한 네온간판을 제외한다면, 흰 아기를 돌보는 검은 피부의 여인은 미국 역사상 어느 때든 변함없이 볼 수 있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여인들은 더 이상 노예의 신분이 아니며, 일과시간 가운데 짬을 내어 아기를 돌보는 시간제 유모(baby-sitter)가 미국에서 보편화되어 있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모차 안에 앉은 아이의 피부와 손잡이를 미는 사람의 피부 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를 발견할 수 없게 되기 전까지 킹 목사의 꿈은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인식 속에 살아남은 노예제도

'피부색이 직업과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나라.' 다소 거칠게 말해 이것이 내가 미국에 대해서 느낀 첫인상이었다. 물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미국의 전혀 다른 모습도 접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이 사회에 대한 판단 역시 상당부분 조정되었다. 그러나 피부색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애초의 판단은 여전히 그 설득력을 유지하고 있다.

▲ 한국인에게 익숙한 흑인의 과장된 캐리커쳐의 예.
ⓒ <조선일보>
하지만 내가 그동안 깨닫게 된 가장 고통스러운 사실은 미국사회가 인종차별적인 만큼 내 머리 속도 인종차별적이라는 것이며, 내 속에 자리 잡은 인종차별 의식의 출처는 바로 한국사회였다는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흑인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과 혐오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미국을 잠시 방문하거나 심지어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아온 교민들조차 부당한 맥락에서 '흑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볼 때마다 당혹스럽다. 그들이 '흑인들 많은 위험한 동네' 혹은 '흑인들 없는 부촌'이라는 말을 쓸 때 나는 이렇게 묻곤 한다.

"혹시 흑인들에게 좋지 않은 일을 당하신 경험이라도 있나요?"

▲ 우리가 무심코 보아넘겨온 흑인묘사는 인종차별적 '짐 크로우'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
ⓒ <스포츠투데이>
물론 이런 경험이 없을 뿐 아니라, 흑인들과 이야기조차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인들의 이런 인종적 고정관념이 한국사회와 외국 교민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이는 흔히 두 가지 상반된 결과로 나타난다.

하나는 스스로를 '유색인종'이라고 부르는 자기모멸적 열등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무시하고 지배계층과 스스로를 상상적으로 동일시하는데서 나타나는 정치적 보수성이다.

한국의 언론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유색인종으로는 처음으로…" 나 "한국 찾은 외국인들 '원더풀' 연발" 혹은 "한국인… 미국 명문대학 합격" 등의 발언이 열등의식에 근거한 것이라면, 다른 소수인종과 연대하기를 거부하고 백인중산층 위주의 정책을 펴는 공화당을 지지하게 만드는 정치적 보수주의는 상상적 동일시의 결과다.

과자 포장지 위의 '짐 크로우(Jim Crow)'

미국사회에서조차 오래 전에 용도폐기 된 '유색인종'이라는 말이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사회에 백인우월주의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유색(colored)'이라는 말은 백인은 아무런 피부색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른 인종' 만 색깔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짐 크로우'로 대표되는 흑인의 과장된 이미지
ⓒ 강인규
결국 이 언어를 채택하는 것은 자신에게 백인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다른 인종을 '그들'이라는 이름으로 타자화하는 행위다. 투명인간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무색인종'이 될 수 없음에도 말이다.

내가 어린 시절 즐겨 보던 만화와 좋아하던 과자의 포장에 그려진 흑인의 친근한 모습이 실제로는 가혹한 노예제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역시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검은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큰 흰 입술로 웃고 있는 '토인'의 모습은 노예사회로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짐 크로우(Jim Crow)'라는 이름으로 백인들의 오락을 위한 웃음거리가 되었던 흑인의 희극적 이미지다.

이 '짐 크로우'는 킹 목사가 앞의 연설을 하던 시대까지 흑인들을 학대하던 인종차별법의 이름이기도 하다. 1960년대까지 미국 남부에는 이 차별법에 따라 학교, 식당, 상점, 세탁소 등 온갖 공공장소에서 '백인용'과 '흑인용'이 엄격히 구분되었다.

▲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 남부에서 볼 수 있던 표지판
ⓒ 강인규
"백인만 출입가능"이라는 표지판은 예사였고, "개와 검둥이는 출입금지"라는 모욕적인 안내판까지 길가에 걸려있던 시절이었다. 백인과 흑인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버스에서도 백인이 흑인에게 자리를 요구하면 즉시 내 주어야 하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다. 심지어 죄없는 흑인들을 목매달거나 산 채로 불태우는 잔혹한 범죄행위를 보면서도 경찰들이 뒷짐 지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1955년 12월 1일, 백화점에서 고된 일과를 마친 한 흑인여성이 버스에 올랐다. 마침 빈자리를 발견한 그녀는 녹초가 된 몸을 그 곳에 앉혔다. 몇 개의 정류장을 더 지나자 빈 자리가 모두 찼고, 그 가운데는 좌석을 찾지 못해 서있는 백인도 생겨났다. 그녀는 법에 따라 백인에게 좌석을 양보해야 했으나, 피곤한 몸을 일으키지 못해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후 백인들의 항의에 따라 운전사가 다가와 일어날 것을 요구했으나 그녀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달려와 그녀를 차에서 억지로 끌어내렸고, 여자는 '좌석을 양보하지 않은 죄'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로사 팍스(Rosa Parks)로, 이 사건은 흑인들이 인종차별법에 대항하여 싸우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증오에 맞선 평화의 행진

흑인들은 그들을 차별하는 버스를 이용하지 말자는 보이콧운동을 시작했고, 이것은 인종차별행위에 비폭력 저항으로 맞서는 흑인인권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중심에 마틴 루터 킹이 서 있었다. 그는 이 일로 유죄판결을 받아 수감되기도 했으나, 결국 미연방법원까지 가서 버스 안에서의 차별행위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 흑인들에게 음식을 팔지 않는 식당에서 침묵의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
ⓒ 강인규
이렇게 시작된 평화적 투쟁은 흑인들에게 음식을 팔지 않는 식당에 가서 묵묵히 수모를 겪으며 앉아있는 침묵의 시위로 이어졌고, 이들의 정당한 요구에 적지 않은 백인들도 뜻을 같이 했다. 이들은 함께 식당에 앉아 그들의 머리 위에 술과 소금을 쏟아 붓는 백인들의 조롱을 온 몸으로 견뎌냈다.

피부색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비인간적 인종차별에 맞서는 목소리는 전국적으로 퍼져갔고, 이것은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디시(Washington D.C.) 행진으로 이어졌다. 당시 2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경찰견에 물리고 소방차에서 내뿜는 물에 쓰러져가면서 묵묵히 이 대열에 참여했다.

▲ 워싱턴 행진 참가자가 경찰견의 공격을 받고 있다.
ⓒ 강인규
링컨 기념관 앞에 모여든 군중을 물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킹 목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후 민권법이 통과되었고, 흑인들이 공적인 차별행위로부터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킹 목사에게 노벨 평화상이 주어졌으나, 흑인들을 향한 차별의 시선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당시 흑인들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킹 목사를 '빨갱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1968년 4월 4일, 킹 목사는 결국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의 총탄에 숨을 거두었다. 무장투쟁을 주장하던 반인종차별단체의 요구를 평화의 이름으로 설득하던 킹 목사였으나, 그마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증오의 탄환을 피할 수는 없었다.

40년 후의 눈물

지난 주, 차를 손보기 위해 카센터에 들렀다. 차가 수리되는 동안 대기실에 앉아 노트북을 켜 글을 쓰고 있는데, 출입문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들어선다. 고개를 들어보니 키가 훤칠한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모건 프리먼을 닮은 그 할아버지는 당신도 노트북을 하나 사야겠는데 어떤 기종이 좋을지 모르겠다며 조언을 구한다. 노트북에 대한 기술적 이야기는 곧 내가 당시 쓰고 있는 글에 대한 화제로 바뀌었다.

▲ 매디슨의 킹 목사 추모비
ⓒ 강인규
킹 목사를 추모하는 글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할아버지의 표정이 일시 굳어지는 듯싶더니, 곧 한숨 섞인 고백이 흘러나왔다.

"킹 목사가 옳았어" 그는 당시 무장투쟁을 요구하던 '흑표범단(Black Panther)'의 일원이었으며, 비폭력저항을 내세운 킹 목사의 입장을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온건주의'로 비판했다는 것이다.

잠시 후 수리가 끝났다는 연락을 받았고, 나는 할아버지에게 '말씀 잘 들었다'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때 그의 눈에 괸 눈물을 보았다.

영수증을 받아 들고 출입문을 나서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 눈물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 킹 목사를 추모하는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40년 전 그를 비판한 자신의 입장을 반성하는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킹 목사의 꿈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흘리는 눈물이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눈물 속에서 할아버지가 내민 연대의 손길을 보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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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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