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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남이라는 청년이 일본에서 비행기 조종술을 배웠다. 매우 장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엄청난 일은 아니다. 안군이 새로운 형태의 비행기를 발명했거나 1만 명 중에 1명 나올까말까 한 출중한 비행사가 되었다면, 우리 조선인들은 그를 자랑스럽게 여길 만하다.

그러나 안군은 그저 다른 사람이 발명한 비행기의 조종술을 배운 1천 명 중의 1명일 뿐이다. 따라서 호들갑을 떨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지난 몇 주 동안 많은 지면을 할애해 그를 치켜세웠다. 안군이 비행기를 몰고 조국을 방문하는 걸 도우려는 단체가 결성되었다. 성금이 걷혔다. 멍청이들 같으니!"


이 무슨 심통이 난 독설인지 아니면 탁견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지만, 1922년 12월 9일자 <윤치호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사실이지 윤치호의 말마따나 비행사 안창남의 명성은 분명 <동아일보>의 과분한 찬사가 만들어낸 측면이 없지는 않았다. 마치 그 이듬해에 이기연(李基演) 비행사가 등장했을 때 이번에는 <매일신보>가 그 역할을 고스란히 떠맡았던 것처럼 말이다.

안창남, 제일 유명한 조선인 비행사

▲ 1922년 12월 10일 안창남 비행사는 처음으로 조선의 하늘을 날아올랐다. 왼쪽은 그가 가져온 비행기 '금강호(金剛號)'이고, 오른쪽은 창덕궁 위를 나르는 금강호의 모습이다. 이 당시 창덕궁 전하 즉 순종임금은 후원금으로 금일봉을 하사했으며, 그 보답으로 안창남은 두 번째 비행에서 창덕궁 위를 날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 땅의 숱한 조선인들에게는 '비행기'가 확실하게 희망이자 감격으로 다가왔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안창남은 단연코 제일 유명한 조선인 비행사였다. 그러니까 살아서는 조선인 비행사의 대명사로 통했고, 죽어서까지 하나의 전설이 된 이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그의 등장을 경이감과 동경심을 너머 하나의 열망과 포부로 받아들인 조선의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안창남의 고국방문비행은 또 다른 선구적 비행가들을 많이 만들어냈고, 거기에는 두 명의 여자비행사도 들어있었다.

그 대열의 앞쪽에는 박경원(朴敬元)이 있었고, 이내 이정희(李貞喜)가 그 뒤를 이었다. 흔히 최초의 여류비행사로 알려진 대구 출신의 박경원은 일본비행학교를 거쳐 1927년 1월에 삼등비행사의 자격을, 다시 1928년 7월에는 이등비행사의 자격을 취득했고, 이어서 1933년 8월 7일에 '푸른 제비호'를 몰고 향토방문 및 일만(日-滿) 친선 연락비행에 올랐다가 추락사했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만큼이나 그의 생애에는 파란만장한 구석이 적지 않았다. 일찍이 하늘의 자유를 꿈꾸었지만 넉넉하지 못한 집안의 형편에 늘 발목이 잡히곤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그놈의 가난이 꼭 문제이다. 그런데 어찌 이러한 일이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을까?

여류비행사의 가난은 숙명?

박경원과 더불어 식민지 조선이 배출한 선구적인 여류 비행사의 하나였던 이정희 역시 이 문제에 관한 한 전혀 예외는 아니었다. 다치카와의 일본비행학교를 거쳐 1927년 11월에 삼등비행사의 자격을 취득했던 이정희의 인생역정에는 확실히 박경원의 그것보다 훨씬 더 기구하고 극적인 데가 있었다.

도대체 그는 어떠한 삶을 살았던 것일까?

일본의 제국비행협회가 발간한 <소화5년 항공연감>을 보면 이정희는 조선 경성부 누상동 75번지가 주소지이고, 1910년 1월 26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삼등비행사의 자격을 얻은 것은 고작 열여덟 살 소녀시절의 일이 된다. 아버지는 이순규(李洵珪)였고, 위로 이용구(李龍求)라는 오빠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다른 기록들을 보니까 토월회의 배우였던 이소연(李素然) 역시 그의 오빠였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학교경력은 조금 복잡하다. 처음에는 진명여학교 초등과에 들어가 중도에 그만 두었고, 일년을 놀다가 다시 배화여학교에 들어갔으나 이내 숙명여학교로 옮겨가는 과정을 거쳤다. 여기저기로 떠돈 것은 모두가 집안의 살림살이가 빈한했던 탓이었다.

숙명여학교 보통과 4학년 때에는 가정교사 생활로 근근히 월사금을 감당했다고 적혀 있다. 열다섯의 나이에 겨우 보통과를 졸업했고, 곧이어 숙명여학교 고등과에 진학하였으나 이마저도 학비를 감당하기가 벅찼던지 2학년 과정을 마치고 끝내 학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대신 그가 선택한 진로는 '내선자동차주식회사'의 사무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 식민지 시대에 이정희는 박경원과 더불어 여자비행사의 쌍벽을 이뤘다. 1926년 9월의 대구모험비행으로 처음 그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뒤부터 일본비행학교를 거쳐 삼등비행사와 이등비행사의 자격을 따내던 시절의 모습들이다. 마지막의 것이 1929년이니, 모두가 10대 후반 때에 촬영된 장면들이다.
하지만 이 무렵에는 벌써 그가 비행사 되기를 단단히 작정한 뒤였다. 아닌 게 아니라 숙명여학교 고등과 1학년 때에는 이 일로 병을 얻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까지 해야 했을 정도였다고 했다. <매일신보> 1927년 11월 25일자에는 이정희가 비행사의 꿈을 갖게된 경위를 이렇게 적고 있다.

이정희, 드디어 비행기를 타다

"이리하여 그의 가슴에는 불타는 울분이 피어오를 때 마침 안창남 비행사가 고국방문비행을 하게 되었다. 안창남의 인기가 조선전국에 끓고 적연하던 경성의 창공을 용장히 프로펠러 소리로 정복하는 것을 볼 때 빈곤과 불운에 눌려 살던 이정희양의 가슴은 시원하였고 정신을 쇄락하였었다.

이것이 동기로 이정희양은 자나깨나 비행기 타령만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안은 빈한하고 의뢰할 곳조차 없으니 그에게는 오직 초조와 노심만 더하여 갈 뿐이었다. 그가 얼마나 비행사 되기를 동경하였는가 그가 일찍이 기록한 일기를 뒤져보면 이런 글이 있다. (후략)"


그런데 그러던 차에 정말 그에게 기막힌 기회가 다가왔다. 미하라 후쿠히라(御原福平)가 이끄는 일본 나고야비행학교의 모험비행단이 조선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때가 1926년 7월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정희는 다짜고짜로 미하라 교장을 찾아가서 자신의 열망을 간청하였고, 마침내 비행기에 올라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용산연병장에서 벌어졌던 모험비행은 물론이고 남선지방의 순회비행 때에도 계속하여 비행단에 동행하는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 실제로 이정희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도 바로 그 일이었다. 그것이 나름의 행운이기는 한데, 알고 보면 굉장히 위험스런 행운이었다.

<동아일보> 1926년 9월 24일자에 '숙명출신의 신비행가, 이정희양의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내용은 바로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최초의 신문기사였다. 그제껏 아무런 비행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단지 비행기에 동승했을 뿐이었던 그에게 과연 비행사라는 명칭이 합당했던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러한 그에게 날아가는 비행기의 날개 위에 올라서는 묘기를 부리도록 했던 미하라 교장의 호의는 정녕 호의가 아니라 차라리 만행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실제로 모험비행대회가 끝난 뒤 일본으로 따라가려는 이정희를 짐짓 '수일 내로 전보를 칠 터이니 그 전보를 받고 곧 오라'를 말로 떼어놓고 훌쩍 떠나버린 데서도 그네들의 속내가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물론 그 후로도 그러한 전보는 결코 오지 않았다. 애당초 그네들의 눈에는 비행기를 향한 이정희의 열정이 그저 제 정신이 아닌 무모한 조선처녀의 그것으로 비쳐졌을 것이 뻔했다. 결국 오지도 않을 전보를 기다리면서 이정희는 또 한번의 좌절과 더불어 가난이 주는 고통을 그렇게 맛봐야만 했다.

드디어 삼등비행사 자격증을 따다

그러한 잠시 그해 11월이 되자 이번에는 정말로 의미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진짜 후원자가 나타났던 것이다. 충남 천안 출신의 비행사 서웅성(徐雄成)이 그 주인공이었다. 일본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연마하던 그가 잠시 귀국하던 차에 이정희의 딱한 처지를 전해듣고 그의 후원자 되기를 자청했던 것이다. 둘 사이에는 이기연 비행사가 매개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역시 아주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던 모양인데, 무슨 심산인지 비행기를 사려고 모아둔 돈으로 이정희의 학비를 대겠다는 뜻밖의 제의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비행학교에 동행하기를 권했는데, 혹여 청춘남녀의 일이라 공연히 세상의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하여 둘이서 양가의 허락 하에 의남매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리하여 기대치 않았던 서웅성의 호의와 배려로 이정희는 일본으로 건너가 카미타에 있던 일본비행학교 정과에 입학하였는데, 그때가 1926년 11월 19일이었다. 이듬해 1월에는 이 과정을 마치고 다시 다치카와에 있는 조종과로 옮겨 수련을 계속한 결과 일본에 건너온 지 딱 일년이 지난 시점에서 삼등비행사의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다.

앞서 박경원이 삼등비행사의 자격을 딴 것과는 대략 10개월 가량 뒤졌으나, 박경원이 이정희보다 9년이나 연상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정희의 비행사 입문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른 나이였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이정희가 삼등비행사의 자격을 취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제야 후원회를 조직한다는 움직임이 있었고, 실제로 1928년 3월에는 후원음악회까지 열렸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 같은 도움이 어느 정도의 보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이등비행사가 목표였다.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또한 궁핍한 그로서는 여전히 그것을 감당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 고민거리였다. 그러한 형편 때문인지 1929년 7월에 가서야 이정희는 다시 이등비행사의 시험에 겨우 응시할 수 있었다.

비행사에서 무용가로 변신하다

▲ <동아일보> 1929년 9월 21일자에 소개된 '무용가' 이정희의 모습이다. 이렇듯 가난한 비행사 이정희는 땅으로 내려왔으나 이마저도 '패트론' 최씨와의 마찰 덕분에 이내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무렵 참으로 엉뚱한 듯이 보이는 기사 하나가 <매일신보>에 등장했다. 그토록 갈망하던 이등비행사의 시험에 합격한 이정희가 이번에는 난데없이 무용가로 변신한다는 소식이었다. <매일신보> 1929년 7월 18일자에는 그 내막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경성이 낳은 여류비행가로서 다치카와비행장에서 업을 닦은 지 만 3개년, 청공을 동경하고 일도 사계에 정진하던 이정희양은 이번 7월 5일의 2등비행사 시험에 훌륭히 합격되었다. 그러나 현재 아국 제도로서는 그 기술에 있어서 아무리 우수할지라도 여자는 이등비행사 이상이 될 수 없다.

이에 비애를 느낀 이양은 드디어 다년의 지망을 다른 방면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생활의 길을 밟기로 되었다. 그리하여 신흥예술로 전도의 광채가 찬란한 무용가가 되고저 석정막, 소랑(小浪)을 중심으로 한 석정막무용연구소에 꽃다운 일생을 바치게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석정막(石井漠) 즉 이시이 바쿠는 유명한 무용가 최승희(崔承喜)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물론 최승희 역시 이 무용연구소 소속이었다. 하늘을 날던 비행사가, 그것도 이등비행사의 자격을 막 취득한 직후에 무용가로 입문한다는 것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나름의 재능이 없지는 않았던지 불과 두 달만에 성공적으로 첫무대에 데뷔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무용가로서 새로운 인생진로의 돌파구를 열어보겠다는 이정희의 시도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패트론'이었던 최씨와의 충돌이 말썽이었던 모양이었다. 여기에서 '최씨'라고 하였으니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최승희 혹은 그의 오빠인 최승일과 모종의 마찰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자동차 운전사로 변신한 여류비행가

이시이무용연구소에서 밀려난 그가 하릴없이 서울로 되돌아온 것이 1930년 봄이었다. 말하자면 그가 갓 스물을 넘긴 때의 일이다. 그리고 다시 세상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그가 이번에는 자동차 운전사로 나섰다는 소식이었다. 1930년 5월 이후 중국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이 번번이 좌절된 데다 비행계로 복귀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해보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 <매일신보> 1931년 3월 13일자는 다시 택시운전사로 변신한 이정희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1931년 3월부터 종로에 있던 아세아자동차부(亞細亞自動車部)에 나가 택시를 몰며 기꺼이 핸들을 잡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 또한 그다지 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무렵 주체할 수 없는 열망은 그것에 멈추질 않았고, 그의 생각은 미국으로 건너가 비행수업을 계속하겠다는 데에 미치고 있었다.

이윽고 영어공부를 핑계삼아 중국 상해로 건너간 것이 1932년 10월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도미준비를 하면서 자동차운전도 계속하였다는데, 그곳에서도 어김없이 의외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 자신의 로맨스가 문제였다.

미국진출을 위해 건너간 상해 땅에서 그는 독일부인을 얻어 살고 있던 의학박사 이성영(李成榮, 가명)을 우연히 만났고, 사랑을 속삭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에 두 사람은 부부되기를 약속하고 이 박사는 독일부인과 이혼까지 하였는데, 1933년 6월 무렵 이정희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을 한 뒤로는 이 박사가 변심하여 둘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고 알려진다.

실연의 충격으로 자살을 기도하다

아마도 그것이 상당한 충격이 되었는지 이정희는 마침내 극단의 선택을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매일신보> 1933년 8월 6일자에는 '변화 많은 생애의 주인, 이정희양 음독빈사, 비행가요 무용가요 운전수, 그는 어찌하여 독약을 마시게 되었나, 실연설, 사업실패설'이라는 제목의 급보가 실렸다.

여기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그가 쓰러진 것은 '레미놀'이라는 마취제를 다량으로 복용한 탓이라 하였다. 그는 비행기 공부에 실패하면 죽겠다고 하여 항상 약을 품고 있었다고도 하는데, 약을 먹은 직접적인 이유가 실연에 따른 것인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짐작컨대 거기에는 분명 물질적 여유가 없어 비행기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자기의 신세한탄이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도 싶다.

▲ 중국 상해에서 돌아온 직후 이정희의 음독사실을 전하고 있는 <매일신보> 1933년 8월 6일자이다. 그가 죽음을 생각한 것은 과연 실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궁핍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탓이었을까?
▲ 우연찮게도 이정희가 죽음을 생각하던 며칠 뒤에 또 다른 여자비행사 박경원이 고향방문비행을 시도하다가 추락사했다. <매일신보> 1933년 8월 9일자에 수록된 사진자료 속에는 박경원(가운데)과 이정희(오른쪽)가 나란히 선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일이란 게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이정희의 음독자살 소동이 벌어진 며칠 뒤 이번에는 정말로 '단짝인' 여자비행사 박경원의 추락사 소식이 들려온다. 비행을 꿈꾸던 누구는 죽음을 생각하고 그 앞으로 다가갔으나 정작 그 죽음은 살짝 비켜나 하늘을 날던 다른 이의 몫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더구나 궁핍한 처지로 따지자면 누구 하나 더 나을 것도 없는 처지였기에 박경원의 죽음이 그야말로 결코 남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정희 자신이 가련했던 처지를 추스르는 전환점이 된 듯했다. 궁핍이 가져다준 심리적 압박감을 말끔히 떨쳐내기는 어려웠을 테지만, 그 후로는 일탈된 인생역정을 조금씩 수습해나가려는 자취들이 역력했던 탓이다.

이듬해 즉 1934년 봄에는 본연의 비행수업을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고, 비록 그곳에서 하네다 비행장 앞에 있는 오카다상회(岡田商會)의 비행장 안내계로 일했을 망정 그는 묵묵히 다시 하늘을 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한동안 땅으로 내려갔던 가난한 비행사는 그렇게 하늘로 되돌아 왔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의 의미는?

1935년 10월이 되자 그의 오랜 열망은 마침내 실현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박경원이 못다 이룬 고향방문비행의 기회가 성사단계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일선만(日鮮滿)친선비행이라는 명칭이 나붙은 것이 마뜩찮은 일이었을 테지만, 그게 무슨 대수였을까? 하지만 모질게도 출발 직전 비행기의 고장으로 이 비행계획은 취소되고 만다.

그리고 그 후로도 그의 고향방문비행이 실행에 옮겨졌다는 소식은 없었다. 어느 듯 세상은 식민지 시대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매일신보> 1936년 신년특집기사로 나온 '신년 활약이 기대되는 조선청년'의 면면에 이영민, 최승희, 손기정, 현제명, 백남운, 장혁주 등과 더불어 이정희의 동향이 소개된 적이 있었으나,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와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이 더 이상 드러난 것은 없다.

다만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1937년판과 1938년판 <항공연감>에 연거푸 그의 소속기관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경무국 소속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또 어떠한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어쨌거나 그러한 행적은 여러모로 미심쩍은 부분이라 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다.

우연찮게도 그가 태어난 것이 1910년이었으니 그의 삶은 오롯이 식민지 시절의 길이만큼 겹쳐진 셈이다. 비행사에 뜻을 세우고 어쩌다가 어린 나이에 삼등비행사의 자격을 따내는 행운을 누리긴 했으나 더 이상 그의 꿈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대의 틀을 깨겠다는 당찬 포부에도 불구하고 뉘라서 타고난 빈곤의 굴레를 쉬이 벗어 던질 수 있었을 것인가 말이다.

자동차회사의 사무원이었다가, 얼결에 모험비행대를 따라다녔다가, 서웅성의 도움으로 비행사가 되었다가, 그마저 벗어 던지고 무용계에 입문했다가, 택시 운전사가 되어 길거리에 나섰다가, 미국에 진출하겠다고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가, 거기에서 의학박사와 사랑에 빠졌다가, 마침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비행장 안내원이 되었다가, 드디어 고향방문비행의 성사를 눈앞에 두었다가, 뭔지 모를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의 이력을 남겼던 사람, 바로 그가 이정희 비행사였다.

해방후 공군대위가 되다

그런데 그의 기구한 인생유전은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해방이 되고 1949년이 되었을 때 한참이나 잊혀진 듯했던 그의 이름은 다시 신문지상에 등장했다. 이름하여 '여자항공대', 이곳의 책임자가 이정희였다. 해방 4년만에 그는 어느덧 공군 대위로 변신해 있었다.

이 조직에 관해서는 약간 증언이 엇갈리긴 하지만, <동아일보> 1950년 4월 22일자에 "창립 일주년 기념식이 22일 하오 두 시에 김포공항에서 거행된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1949년 상반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에 걸쳐 대원모집이 있었고, 흔히 최초의 여자공군비행사로 일컫는 김경오(金璟悟) 대위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마음껏 하늘을 날기를 그토록 갈망하던 이정희였으니만큼 여자항공대의 대장은 그에게 딱 제격인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그 즈음의 나라 형편이란 게 전투기는커녕 연습기 하나조차 변변히 마련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 진작에 그가 상해와 도쿄를 떠돌아다닐 때에 비해 별반 나을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안창남 비행사가 자기에게 하늘을 향한 꿈을 심어주었듯이 이제는 그 자신이 후배비행사들의 꿈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나름의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회마저 그것은 아주 짤막한 순간의 영광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군부에 있어서 가장 이채를 끌고 있는 여자항공대의 성과도 날로 여실이 보이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창공을 이며 매로 나를 수 있는 조인(鳥人)으로의 충분한 소양과 기개도 예비되어 명일의 희망도 크려니와

공군 당국에서는 이들에 대한 앞날에 대비하여 현 여자항공대장 이(李貞喜) 대위를 예비역으로부터 현역에 편입시키는 한편 대원특무상사 강(姜○業)과 이(李明珍) 양을 일약 각각 소위로 임관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이정희 여자항공대장의 현역편입을 알리는 <동아일보> 1950년 6월 15일자이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나기 딱 열흘 전의 소식인 동시에 그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록이다. 전쟁의 시작과 더불어 그는 피랍자가 되어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진다.

그가 피납된 사실은 김경오의 증언에 의하더라도 그러하고, 실제로 1956년에 대한적십자사 신고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나이가 47세로 표기되어 있고 주소지가 서울시 종로구 누상동 111번지라고 적혀 있으니, 바로 비행사 이정희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고작 열 두어살의 나이로 "남자가 손이 둘이면 여자도 마찬가지로 둘인 이상 여자라고 안될 리가 없다" 하여 당돌하게도 하늘을 꿈꾸었고, 커서는 비록 비행사의 포부를 이루었으나 번번이 가난에 몸부림을 쳐야했던 그가 삼팔선 너머의 저쪽에서는 또 어떻게 하늘의 꿈을 이어나갔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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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