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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살다보면, 사람 살아가는 일이 대충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호주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29년 전, 호주에서는 한국의 탄핵정국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호주가 내각책임제 국가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힘들지만, 호주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것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1975년 11월 11일, 호주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영국여왕(호주의 국가수반)이 임명한 존 커 총독(John Kerr)이 국민이 선출한 고프 위트람 수상(Gough Whitlam)을 해임시킨 것. 호주는 극도의 혼란 상태로 빠져들었고,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헌정질서를 중단시킨 총독을 규탄했다.

그러나 총독의 행위는 엄연한 합법이었다. 왕권은 중립성을 지킨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호주는 입헌군주제와 내각책임제를 함께 실시하는 국가다. 수상은 총독을 천거할 수 있는 권한이 있고, 총독은 수상을 해임하고 국회를 해산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수상 해임으로 헌정질서 중단 사태가 벌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엉겁결에 그 일을 저질러버린 총독마저도 수상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은 헌법조항에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파라다이스'라고 불리는 남태평양 위에 떠있는 거대한 섬대륙(The island continent)에 무슨 사정이 있었기에 정치 후진국에서나 있을 법한 헌정중단의 사태가 벌어진 것일까?

1950∼70년대의 호주는 보수정당의 시대였다.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동서냉전상태의 고착화, 월남전의 장기화 등 시대적 불안 요인 덕분에 보수정당은 무려 23년 동안이나 안정적 집권이라는 어부지리를 만끽했다.

그 결과 빈부의 격차는 엄청나게 커졌고, 구조적인 사회모순에 휘둘리던 서민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의 상태였다. 균형 잡힌 정치발전을 위해 진보정당으로 정권을 넘겨주는 게 시대적 요청이었고 순리였다. 그러나 권력의 단맛에 길들여진 기득권 세력은 순리를 거스르고 헌정을 중단시킬 정도의 중병을 앓고 있었다.

난세가 영웅을 부른다고 했다. 보수우경화의 동맥경화증에 걸린 호주를 혁명에 가까운 방식으로 개혁하겠다고 나선 돈키호테 같은 정치가가 나타나서 집권에 성공했다. 그는 거센 회오리바람을 일으켰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보수그룹은 비열한 방식을 동원해서 그를 도중하차시켰다.

지금은 변화의 시대다

1972년 12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1949년부터 23년 동안 집권한 보수정당(자유-지방 연합당)을 힘겹게 물리친 노동당이 집권에 성공했다. 우파정부에서 좌파정부로 바뀐 것.

그동안 연합당 정부를 이끌었던 고든 멘지스 수상은 친미 성향이 강한 보수정객이었다. 멘지스 정부의 정책은 아시아 사람들의 유입을 막고(keep all Asian people out),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have nothing to do with China), 베트남 파병을 증원(send more troops to Vietnam)하는 등 반 아시아, 친 미국 일변도였다.

그러나 노동당의 집권으로 모든 것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fair and just society)를 요구했고, 시민들은 외세의존도를 줄여 호주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외쳤다. 특히 교육제도의 개선으로 가난의 대물림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권에 성공한 위트람 정부는 그들의 요구에 곧바로 화답했다. 베트남에서 군대를 완전히 철수시켰고, 백호주의(White Australian Policy)를 공식적으로 폐지하면서 서방국가 중에서 최초로 중공과의 외교관계를 개선했다.

오랜 쟁점이었던 애보리진들(호주 원주민)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했고, 대학교까지의 무상교육과 전국민 무료진료제도를 채택했다. 무상교육과 무료진료는 세계 최초였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모든 우체국에 걸려 있던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의 초상화를 떼어냈고, 우체통마다 쓰여 있던 영국여왕의 기장 'ERⅡ'를 지워버린 것이다. 그동안 국가로 사용하던 영국국가 대신 호주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즉, 식민지의 잔재를 털어낸 것이다.

'지금은 변화의 시대다(It's time for a change)'라고 외치면서, 보수적인 전통에 물들었던 호주를 통째로 바꾸고 싶었던 한 좌파 정치인의 오랜 꿈이 마침내 현실 정치에서 실현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한동안 숨죽이고 있던 기득권세력은 정국의 추이를 면밀하게 분석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갈등과 증오의 시대

고프 위트람 수상은 뛰어난 웅변술로 성공한 정치인이었다. 호주 최초의 TV 선거유세와 정책토론에서 기득권 세력의 끝없는 욕심을 조목조목 질타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보수정당에 짓눌려왔던 빈민계층의 상처를 감싸주는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호주의 건국이념이기도 한 평등주의(Egalitarianism)를 부활시키고, 호주에 남아 있는 식민주의의 잔재를 청산하며, 국가의 의사결정에 국민을 참여시킨다는 선거공약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는 개혁을 위해 반대파를 설득하는 방식을 포기하고 TV연설을 통한 국민과의 직접대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러나 위트람의 허점은 대중연설에서 나타났다. 개혁의 조급함에서 비롯된 직설적인 표현과 거친 말투에서 허점이 불거져나온 것이다. 위트람 수상은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말하면서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얘기까지 덧붙이곤 했다. 이미 기득권 그룹의 한 축을 담당했던 언론들은 똘똘 뭉쳐서 위트람의 이상론을 실현불가능 한 망상이라고 공략했다.

신문 라디오 TV 등 언론매체들은 언변이 뛰어나고 글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사사건건 위트람의 발언을 공격했다. 특히 인신공격이나 동기심문에 능숙한 보수논객들은 위트람을 공상가, 행정경험이 없는 무능한 정치가로 몰아붙였다.

갈 길이 급한 노동당 정부를 결정적으로 가로막은 것은 상원에서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보수야당이었다. 하원에서 통과한 국가예산 집행권을 상원에서 거부하여, 심한 경우에는 공무원들의 월급조차 지급할 수 없었다.

보수야당의 목적은 노동당 정부를 '식물정부'로 만들어 조기 선거를 실시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데 있었다. 합법을 위장하고 있었지만 정치선진국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저열한 음모였다. 보수야당과 언론은 보수정부의 회복을 위해서 음모를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동원했던 것이다.

끝내 헌정을 유린한 보수집단

노동당 정부의 위기는 내부에서도 커지고 있었다. 개혁에 쓰일 자금확보를 위해서 아랍국가들로부터 들여온 차관이 문제가 됐다. 모든 언론이 달려들어 비밀리에 들여온 차관을 부패스캔들이라고 몰아붙인 것. 도덕성에서 흠이 간 노동당 정부는 크게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상원의 세출거부와 차관 스캔들로 얼룩진 1975년 11월 11일, 존 커 총독은 위틀람 수상과 프레이저 야당 당수를 총독관저로 불렀다. 총독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위트람 수상에게 수상직을 해임한다는 문서를 전달했다.

영국여왕의 대리자일 뿐인 총독이 국민의 손으로 뽑은 호주수상을 해임한 것. 호주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었고 헌정질서를 중단시킨 것이다. 더구나 NSW주의 수석판사 출신인 존 커 총독은 위틀람 수상이 천거한 총독이었다.

시민들은 연일 가두 데모를 하면서 원상회복을 촉구했다. 호주를 미국의 통제권에 묶어두기 위해서 미CIA가 저지른 음모라고 성토하는 시민들과 호주가 아랍권과 연결되는 것을 꺼려했던 유태인그룹을 배후로 지목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런 괴기한 일이 왜 일어났는지,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단서가 될 만한 일이 프레이저 보수정부에 의해서 발생했다. 집권 첫 예산을 짜면서 총독의 월급을 171%나 올려준 것.

보수정권은 국민들의 원성을 사던 총독을 유네스코 대사에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존 커는 아무런 직책도 없이 슬그머니 유럽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아직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최규하 전 대통령처럼, 단 한마디의 증언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호주 역사상 가장 불쾌한 사람으로 뽑힐 정도로 그에 대한 호주 국민의 증오는 크다.

말콤 프레이저 보수당 정부는 그후 8년 동안 집권하면서 위트람 정부가 힘들게 이룬 개혁의 성과를 대폭 후퇴시켰다. 프레이저 수상에 의한 호주의 보수우경화는 그의 출신배경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때 해임된 위트람 수상은 지금도 호주좌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시드니에 살면서 자신의 분신 같은 마크 레이썸 현 노동당 당수를 후원하고 있다. 레이썸 야당 당수는 최근에 실시된 당내투표에서 대 선배들을 물리치고 당선된 40대 초반의 급진주의자다.

그는 노동당의 간판만 달고 있을 뿐, 점진적 사회주의자들(fabian)의 친목단체로 전락해버린 호주 노동당에 절망하고 있는 서민들의 비애를 잘 알고 있다. 가난한 동네의 정부임대주택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정통 좌파로서, 혁명가의 면모를 지닌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로드(Rhode) 장학생으로 옥스퍼드 유학까지 한 봅 호크 전 수상과 고급 이태리산 수입양복을 즐겨입는 폴 키팅 전 수상 등 노동당의 얼굴에 먹칠한 선배 정치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레이썸의 반대파들은 그를 '가난에 한이 맺힌 싸움닭'이라고 폄하하고 있지만, 그는 분명 '21세기의 희망'이다. 29년 전 보수집단에 의해서 쫓겨났던 위트람의 거친 말투까지 쏙 빼닮은 레이썸은 위트람이 품었던 미완의 꿈을 완성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며, 당대의 비판을 피해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천동설을 고집하던 15, 16세기가 아니다. 100년이 10년으로 1000년이 100년으로 압축되는 시대다. 정확하게 29년 전에 일어났던 호주의 헌정중단 사태, 그 역사의 심판은 이미 끝났다.

한 국가를 경영하는 정치인들은 자기가 속한 정파의 이기주의에서 초연해야 한다. 수평감각을 상실한 잘못된 선택으로 애꿎은 국민들만 피해를 당하기 때문이다. 호주의 헌정중단 사태가 불러온 갈등과 증오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무려 1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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