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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참 걱정이 많다. 외출하는 대학생 손자에게 오늘도 차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한다. 손자는 웃는 얼굴로 '알았다'며 건성으로 대답한다. 할머니는 어제도 그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손자가 짜증내지 않은 것은 차 조심하라는 당부에 녹아있는 할머니의 간곡한 사랑을 믿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마음, 그게 노파심이다. 하지만 세상엔 사랑이 담긴 노파심도 있지만 걱정만 가득 찬 노파심도 흔하다.

방송사에 근무할 때 나도 가요심의를 한 경험이 있다. 감미로운 추억은 아니다. 몇 시간 동안 생소한 음악을 들어야 하는 고단함 때문이 아니었다. 창작의 고통을 모르지 않으면서 남의 창작물에 '감히' 가위질, 혹은 발길질, 나아가 못질을 한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주제넘은 일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내 이름 밑의 노래제목들은 '웬만하면' 다 O.K.였다. 그 웬만함이란 '이건 아무리 뒤집어보아도 반사회적이다’라고 판단되는 것만 열외라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가늠하는 '반사회적'이라는 잣대는 또 얼마나 편의적이고 탄력적인가.

또 한번의 '검열의 추억'이 뇌리를 스친다. 1995년 대학가요제를 연출할 때의 일이다. 불과 9년 전의 일인데 그때만 해도 장발은 TV 출연 불가였다. 부산 대표로 올라온 팀의 이름이 '얼스 가이'였는데 그 중 한 학생이 머리가 좀 길었다. 솔직히 내 눈에는 보기 좋았지만 규정을 무시한 저항 후에 다가올 압력이 귀찮았다.(왜 갑자기 물리에서 배운 '옴의 법칙'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전류의 세기는 압력에 비례하고 저항에 반비례하다던가?)

고민 끝에 모자를 쓰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문제는 간주 때 발생했다. 갑자기 그 학생이 모자를 휙 벗어던진 것이다. 모자 속에 갇혀 있던 생머리가 생방송 조명 아래 뿜어내듯 빛을 발했다. 순간 객석에서 거의 폭발할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중계차 안에 있던 나는 한숨을 쉴 여유조차 없었다.

방송이 끝나고 나서 연출자인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씩 웃었다. 그걸로 모든 게 용서가 되었다. 젊음이 눈부시게 호흡하는 장면이었다. 몇 년을 못 버틸 노파심에 동의한 내가 한동안 부끄러웠다. (후기: 다행히 시말서는 쓰지 않고 그냥 '없었던 일'로 넘어갔다.)

'M'은 되고 '빅팀'은 안된다?

▲ 지난 1월 25일 3년만에 귀국한 서태지씨가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의 새앨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강이종행
요 며칠 사이에 비슷한 내용의 메일을 여러 통 받았다. "저희는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음악소비자이자 시청자인 서태지 팬연합입니다"라고 밝힌 그들은 간절하게 자신들의 연대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의 글을 읽으며 여러 가지를 느꼈다. 먼저 서태지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팬들이 자발적으로 이렇게 그의 음악을 수호해주다니.

서태지의 7집 수록곡 '빅팀'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3가지라고 한다.

'퍼런 가위에 처참히 찢겨버린 테러리즘에 지워진 아이야'/ 'Sexual Assault' /'넥타이에 목 졸린 채 구토를 하는 너'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너무도 강렬하다. 생명에의 외경. 낙태의 문제점을 도발적이고 영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왜 그들은 이 '문제작'에 부적격이라고 딱지를 붙였을까. 청소년들에게 해롭다고 생각했겠지. 그렇다면 무엇이 해로울까. 반사회적일까. 반인륜적일까.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1994년 여름 대한민국 TV를 얼어붙게 만든 납량특집드라마 'M'을 기억하는가. 결정적 순간에 음침한 효과음과 함께 변하던 주인공 심은하의 퍼런 눈이 떠오를 것이다. 괴이한 음성도 기억날지 모르겠다. 그 드라마의 소재가 낙태였다. 그 서늘한 화면을 보며 낙태라는 범죄의 죄악을 시청자들은 몸서리치게 느꼈을 것이다.

'M'은 되고 왜 '빅팀'은 안 되는가. 아니면 드라마는 되고 노래는 왜 안 되는가. 그것도 아니면 그때는 되고 왜 지금은 안 되는가. 방송사 측은 "묘사가 섬뜩하고 잔인하며, 표현이 지나치게 직설적이라는" 게 이유라는데 내겐 도리어 "그 근거가 모호하고 수상하며, 판단이 지나치게 자의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국어 참고서를 보면 시는 불과 몇 줄인데 해설은 몇 페이지다.

'빅팀'의 해설도 가사보다 훨씬 길다. 요지는 "1년간 약 3만 명에 달하는 여아가 태어날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우리나라의 현실/ 성을 매개로 가해지는 체제의 억압/ 지배세력으로서의 남성(넥타이)에 의해 주체성을 거세당한 채 상처 받는 여성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예의를 한껏 갖춘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보자.

방송사의 자체심의의 기준의 미비함을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청자들이 문제제기를 하고 그 개선을 요구하기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뿐이라고 저희는 생각합니다.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참여하고 주장함으로써, 주제 선정, 표현에 있어 뮤지션의 창의력과 다양성을 발현할 수 있는 선에서, 또한 다양한 세대와 문화인들의 참여를 통해 새로운 심의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안은 조금 다르지만 김기덕 감독의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수상 인터뷰가 불현듯 귓전에 왕왕거린다. 최근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사마리아'에 18세 관람가 등급을 매긴 것에 대해 그는 "원조교제 등은 영화의 발단일 뿐 본질적인 주제는 아이들과 사회의 관계회복이므로 한국의 청소년과 부모들이 함께 봤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라며 "결과에 승복하겠지만 이 영화에 빨간딱지를 붙이는 것이 과연 청소년보호를 위한 일인지 재고해주길 바란다"고 그는 덧붙였다.

검열하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의식부터 검열해야 한다. 진정으로 관객이나 청중을 사랑하는지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걱정의 벽은 조금 허물고 격정(激情)의 문은 조금 더 열어라. 노파심에서 벗어나라. 모자를 벗고 머리카락을 숨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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