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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바고란 '어느 특정한 시점까지 보도를 못하게 한다'는 뜻으로 취재원이 기자들을 상대로 요청하거나 기자들의 합의에 따라 이뤄지기도 한다. 특히 이번 경우는 국제과학계의 오랜 관행이자 일종의 전통으로 여겨온 '국제적 성격의 엠바고'라서 논란이 더욱 커졌다.

<사이언스>나 <네이처> <셀> 등 세계적 수준의 과학전문지들은 논문 게재를 요청한 연구내용에 대한 검증이 끝난 뒤 공식 발표를 하기 전까지는 일반 언론에 보도하지 않는다. 이는 잘못된 연구내용이 공신력 있는 기구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채 노출됐을 경우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막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 홍혜걸 중앙일보 기자는 '엠바고 파기' 비판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 중앙일보 화면
그러나 중앙은 12일 「장기복제 길 한국인이 열었다」라는 제목으로 "국내 과학자들이 세계 최초로 사람의 체세포와 난자만으로 인간배아 줄기세포를 만들어내는 개가를 올렸다"며 1면 머릿기사와 관련기사 등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중앙은 "세계적인 과학잡지 사이언스는 12일 인터넷 속보를 통해 한국 연구진이 복제기술의 꽃으로 불리는 사람간 핵이식을 통한 인간배아 줄기세포를 얻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성과는 중앙에서 보도하기 전에는 국내외 어떤 언론도 보도하지 않았다. 즉 보도시점으로만 보면 중앙의 특종인 셈이다.

그러나 사이언스는 한국 시간으로 13일(미국시간 12일), 중앙의 엠바고 파기 뒤 관련 소식을 인터넷 속보로 띄웠다. 즉 중앙에서 인용한 12일자 사이언스 인터넷 속보는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이 점도 중앙의 보도윤리를 지적하는 시빗거리가 됐다.

중앙의 엠바고 파기에 가장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한 곳은 동아, 조선과 연합뉴스. 특히 AAAS 등록회원인 연합과 동아 기자들은 "취재를 마치고도 엠바고를 지키기 위해 보도를 먼저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연합·동아 "공식자료 받고 취재했으나 엠바고 지켰다"

김길원 연합 기자는 "AAAS로부터 미리 자료를 받았기 때문에 확인취재를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와 동아일보는 황 교수에게도 개인적으로 간곡히 엠바고 요청을 받았다"면서 "물론 엠바고 준수는 그 이전에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기자는 의도적인 엠바고 파기가 아니라는 중앙 주장에 대해 "말도 안된다"고 일축했다. "11일 밤에 황 교수 연구진 중 한 사람이 홍혜걸 기자에게 '엠바고 걸려 있으니 먼저 쓰면 안된다'고 분명히 말했다고 했다"고 전한 김 기자는 "그래도 홍 기자는 썼다, 나도 당시 홍혜걸 기자가 취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직접 연락을 시도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공식적인 엠바고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는 중앙의 해명과 관련 "사이언스에 실릴 논문이면 엠바고가 있다는 게 기본 상식인데 그걸 물어보는 기자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또 "홍 기자가 참고한 논문(카피본)에는 분명히 엠바고가 표시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아는 사람인데도 지키지 않았다면 윤리의식이 없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기자는 "중앙이 엠바고를 깨고나서 사이언스측으로부터 '중앙일보 홍혜걸 기자가 엠바고를 깨서 해제한다'는 이메일이 왔다, 그리고 뉴욕타임스 기사에도 한국 언론의 엠바고 파기가 명시돼 있다"고 밝혔다.

▲ 동아일보는 중앙일보의 엠바기 파기를 비판하는 기사를 연일 내보냈다.
ⓒ 신미희

이영완 동아 기자도 중앙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 기자는 "AAAS에서 제공한 논문을 갖고 서울대 연구진을 취재했을 때도 사이언스에 실릴 논문 자체가 엠바고에 걸려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중앙은 기사 출처를 처음에는 사이언스 인터넷 속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엠바고가 명기된 논문이라고 말을 바꿨다, 소스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이어 "해외 언론들도 연구발표 사실을 다 알면서도 엠바고를 지키느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게 깨지자 그 자체에 주목한 것"이라며 "국내에서 논란이 커진 것은 국내 과학자의 성과인데 이를 한 언론사가 성급하게 보도함으로써 분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기자는 "이번 연구는 국제적인 성과로 중점적으로 준비하고 있던 사안으로, 엠바고를 깬 중앙이 '다른 언론사는 놀고 있었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된다"고 질타한 뒤 "취재원과의 약속을 깨고 먼저 보도한다는 게 중앙일보 독자를 위한 것이지 어디 국민의 알권리를 위한 것이겠느냐"고 꼬집었다.

조선은 동아, 연합과 달리 황 교수가 출국한 뒤 보내온 이메일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접했다고 밝혔다. 김철중 조선 기자는 "황 교수가 중대발표를 한다는 정보는 듣고 있었는데 어떤 내용인지는 잘 몰랐다"며 "어차피 사이언스나 네이처가 발표하기 전에 보도할 수 없다는 게 불문율이기 때문에 사안을 알아도 기사를 쓰기 힘들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중앙 기자 "우리 국민이 하루 먼저 알권리 있다"

엠바고 파기의 당사자인 홍혜걸 중앙 기자는 "어디로부터도 엠바고 요청을 받은 바 없는 상태에서 독자취재를 통해 얻은 결과이기 때문에 엠바고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홍 기자는 "사이언스의 공식적인 통로가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자료를 입수했다"면서 "몇십년만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엄청난 우리 과학자들의 업적을 우리 국민이 하루 먼저 정도는 알권리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구체적인 논문입수 경위에 대해서는 밝힐 수 없다고 답했다.

또 "우리가 독자적으로 취재했고, 어차피 사이언스에 게재될 것이 확실한 논문이라면 먼저 써도 문제되지 않는다고 봤다"면서 "서구언론이 먼저 쓰고 우리는 꼭 받아서 베껴 써야만 하는가"라고 되물었다. 홍 기자는 "물론 학자와 과학지의 약속을 다른 언론사가 존중하는 게 바람직하고, 그런 측면에서 논문에 명기된 비보도를 깬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달게 받겠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사이언스와 외국 언론사간 엠바고를 우리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또 "하루 먼저 보도한 것이 다른 언론의 표현대로 '국익훼손'과 '나라망신'으로까지 비난받을 일인지 납득하기 힘들다"면서 "합리적인 비판은 인정하겠지만 일부 언론의 악의적인 비난은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홍 기자는 "이번 사건은 단순한 엠바고나 특종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또하나의 '신문전쟁'"이라며 "이렇게까지 대대적으로 보도될 사안일지 모르겠지만 미디어 교과서에나 실릴 만한 소재"라고 비유했다.

홍 기자는 "물론 개인적 공명심이나 특종 욕심이 없었다고 얘기하지 않겠다, 그러나 '물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먼저 보도를 한 기자를 '집단 이지매' 하거나 천박하게 매도하는 것은 참기 힘들다"며 "게으른 기자가 열심히 뛴 기자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지막으로 홍 기자는 "이번 일로 황 교수에게 부담된 것은 죄송한 게 생각한다"면서도 "타 기자들이 갑자기 애국주의자인양 나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일관된 입장을 나타냈다. 홍 기자는 자신의 취재과정과 보도경위를 소상하게 밝힌 「중앙일보 '국제 엠바고' 파기 파문이 실상」과 「열심히 취재한 기자가 나쁜 기자입니까」등을 자사 인터넷과 프레시안을 통해 밝히기도 했다.

과학기자협회 "중앙일보 대응방안 강구하겠다"

이번 사건에 대해 과학기술부도 난처한 입장을 나타냈다. 이석래 과기부 서기관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관련 사항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사이언스에 요청한 엠바고였기 때문에 대외비로만 처리했다"고 말했다.

이 서기관은 "사이언스측에서 이미 주요 메이저 언론에 보도자료를 뿌렸기 때문에 그게 유출돼서 나갈 수 있었던 걸로 판단해 황 교수팀에게 쉽게 불이익을 주기 어려웠던 것 같다"면서 "그러나 이번 일로 황 교수팀이 굉장히 어려움을 겪은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또 "사이언스측이 전면적인 재검토를 했고, 현지 있는 사람이 많이 불안했을 것"이라며 "다음에 유능한 분들이 사이언스에 게재를 할 경우 한국측에 안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한편 한국과학기자협회(회장 이찬휘)는 12일 성명을 내고 "한국 과학계의 쾌거를 세계에 알릴 기회가 특정 신문, 특정 기자의 특종 욕심으로 깨졌다"라며 "국익을 무시한 자사이기주의 소치에 대해 조만간 임시 이사회를 열어 대응방안을 강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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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언련) 사무차장, 미디어오늘 차장, 오마이뉴스 사회부장 역임.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을 거쳐 현재 노무현재단 홍보출판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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