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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2월 일본에서는 도호(東宝)영화사에서 제작한 <熱砂の誓い(열사의 맹서)>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중국 북부에서 도로 건설 업무를 맡은 일본인 토목기사와 중국 여인의 사랑을 묘사한 것이 주된 내용인데,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일본이 중국 북부를 점령하고 있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해 보면, 일본의 침략행위를 미화하기 위한 정책적인 고려가 개입된 영화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중국인과 일본인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 작품답게, <熱砂の誓い>에는 리샹란(李香蘭)이라는 중국 여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군부가 조종하고 있던 괴뢰정권 만주국(滿洲國)에서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던 리샹란은 사실 중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일본인이면서도 중국인 행세를 하며 영화배우와 가수로 활동했던 그는, 일본을 위해 간첩활동을 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한다.

영화 <熱砂の誓い>의 주제가로 같은 제목을 가진 노래(부제 <建設の歌>)가 영화 개봉보다 약간 앞서 발표되기도 했다. 주제가 <熱砂の誓い>는 당시 일본 최고의 유행가 작가였던 사이조야소(西條八十)와 고가마사오(古賀政男)가 작사, 작곡을 맡았고, 이토히사오(伊藤久男)라는 가수가 불러 일본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음반이 발매되었다. 고가마사오는 앞서 살펴본 <지원병의 어머니>의 원곡인 <軍國の母>를 작곡한 사람이기도 하다.

1940년 10월에 일본에서 영화주제가로 나온 <熱砂の誓い>는 2년 남짓 뒤인 1943년 1월에 <열사(熱砂)의 맹서(盟誓)>라는 제목을 달고 우리나라에서도 음반이 발매되었다(음반번호 40902). 콜럼비아레코드가 일본 본사의 히트곡을 조선 지점에서 번안곡으로 낸 것이라 볼 수 있겠는데, 노래는 <군사우편>과 <승전가>를 발표한 가수 이규남(李圭南)이 불렀다.

기쁜 노래 부르잔다 새벽 하늘에/ 붉은 장미 꽃이 피는 황야의 구름/ 아세아다 아세아다 우리 동양의/ 산과 들에 사무쳐라 건설의 노래소리
저 산천에 이 벌판에 용감스럽게/ 끓는 피를 뿌려 놓은 형제들이여/ 때는 왔다 웃어 다오 기뻐해 다오/ 새 천지에 솟아나는 건설의 노래소리
이 나라의 사나이로 탄생하여서/ 살과 뼈를 아낌 없이 넓은 대지에/ 파 묻어라 이르시고 가신 어머님/ 그 말씀이 반짝인다 푸른 하늘에 샛별
서쪽으론 사막에서 남쪽은 바다/ 찬란하게 피어나는 국화(菊花)이러냐/ 솟아 온다 붉은 광명 동쪽 하늘에/ 온 세상에 사무쳐라 건설의 노래소리
(유성기음반에 실린 내용을 직접 채록한 것이다)


원곡이 영화주제가로 발표되었던 것에 비해 <열사의 맹서>는 독자적인 유행가(가사지에는 ‘신가요’라고 표기되어 있다)로 나온 것이다. 가사도 원곡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이가실(李嘉實), 즉 조명암(趙鳴岩)이 새롭게 약간 다듬어서 썼다. 가사 내용이 영화 줄거리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주제가의 한계가 없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열사의 맹서>는 원곡보다 오히려 군국주의 색채를 더 강하게 가지고 있는 편이기도 하다.

よろこびあふれる歌声に/ 輝け荒野の黄金雲/ 夜明けだサ夜明けだ大陸に/ わき立つわれらの建設の歌
あの山この谷勇ましく/ 血潮流した兄弟よ/ 今こそサ微笑め聞いてくれ/ われらの勝ち鬨建設の歌
日本男児と生まれたら/ この肉この骨大陸へ/ 埋めよとサ言われた亡き母の/ 瞳が輝く暁の星
砂漠の野菊も/ 燦めき拓ける愛の道/ 光はサ昇るよ東から/ 世界に轟け建設の歌


<熱砂の誓い>의 가사는 위와 같은데, <열사의 맹서> 가사와 비교해 보면 대강의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열사의 맹서> 제1절에 나오는 ‘아세아다 아세아다 우리 동양의’ 같은 대목이나 제4절에 나오는 ‘서쪽으론 사막에서 남쪽은 바다’ 같은 대목은 원곡에 없던 것이다.

또 영화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원곡 제4절의 ‘愛の道(사랑의 길)’ 같은 표현은 빠져 있기도 하다. 대체로 보아 원곡의 분위기를 헤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영화주제가라기보다는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노래하는 군국가요로 내용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建設の歌>라는 부제를 달고 있기도 했고 가사에도 ‘건설’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열사의 맹서>에서 맹세한 내용은 현실에서는 오히려 끔찍한 파괴로 나타났다.

허망한 이념과 야망의 건설을 위해 전쟁이라는 도구를 동원한 이상 그러한 결과는 당연한 것이었다. 군국가요의 역사적 의미와 허실이 <열사의 맹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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