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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에 있는 김명수의 비석. 김명수 부부의 무덤이 비석 뒤에 보인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김용균 "민형사상 소송 제기할 것"

김용균 한나라당 의원은 2일 <오마이뉴스>기사와 관련 "사실과 다르다"며 "<오마이뉴스>측에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법사위원회 직전 이같이 밝히고, 특히 "부친의 친일의혹 때문에 과거사 진상규명특별법을 반대했다는 주장이 있다"는 질문에 "그런 저질적인 분석이 어디있느냐"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 최경준 기자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고 있는 한나라당 김용균(경남 산청·합천) 의원의 부친이 일제시대 일본 신문사의 기자와 전무를 지냈으며 귀국 후 합천 용주면 면장과 금융조합장을 지내 친일혐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김 의원의 부친 김명수(金命洙. 1907~1986)씨는 제헌의회 때 합천에서 출마해 낙선했고, 2대(합천을)와 5대(부산 동래) 때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의원은 부자 2대에 걸쳐 국회의원을 지낸 셈이다.

최근 김용균 의원이 '친일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에 반대 입장을 보이자 합천군청 홈페이지에는 김 의원의 부친의 친일행적을 제기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어 지역민들의 관심 또한 높다.

▲ 1935년 당시 김명수씨가 합천군 용주면 면장으로 재직중이었음을 보여주는 <조선총독부 소속관서 직원록>(1936년 9월 발행)

김광명수(金光命洙)로 창씨, 면장 10년-금융조합장 17년 지내

일제 때 면장은 어떤 자리였나

일제당시 면장은 군수 바로 아래의 직책으로 당시 사실상 지방행정 책임자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일제말기 총독부가 도지사를 거쳐 군, 면에 식량 등 물자공출이나 지원병·정신대 등 인력동원 등을 지시했을 때 이를 지역현지에서 처리한 인물이 바로 면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몇몇 면장들은 총독부에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해 상부에서 할당한 물량 이상으로 인력이나 물자를 바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명수가 합천군 용주면장으로 10년간 재직중 구체적으로 어떤 성향으로 활동에 대한 공식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김명수는 경남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 출생으로 김광명수(金光命洙. 가네미쓰 메이슈)로 창씨개명을 했으며, 1935년 11월부터 1945년 12월까지 합천 용주면장을 지냈다. 지금도 경남 합천군 용주면사무소 2층 회의실 벽면에는 재직연도와 함께 사진이 걸려 있다.

김명수는 어려서 한문 공부를 했고, 15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고학으로 와세다 중학과정을 수료했다. 그 뒤 우부일일(宇部日日)신문사 기자로 들어가 뒤에는 전무직까지 지냈다. 그리고 그는 귀국 후 부산에서 실업시보사를 운영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용주면장을 지냈다.

일생을 친일파 연구에 바친 고 임종국 선생은 저서 <실록 친일파>에서 "(김명수가 국회의원을 지낸) 2대 국회에는 대일협력자가 20명으로 제헌국회에 비해 2배 증가했는데, 반민법 폐기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썼다.

그는 개별항목에서 김명수에 대해 언급하면서 "김명수는 경남 합천을구 출신으로 1936년 이래 17년간 금융조합장을 하였는데, 일제하 금융조합장은 제령 제22호, 금융조합령 제31조 제3항에 의한 도지사의 인가를 얻음으로써만 조합원의 선임에 효력이 발생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적어도 그가 일제정책에 협력자였음을 엿볼 수 있다.

"합천 지역서 나이드신 분들은 대개 그를 친일파로 보고 있다"

▲ 한나라당 김용균 의원의 부친 김명수씨. 그는 일제때 면장을 10년, 금융조합장을 15년간 지내 친일경력 의혹을 사고 있다.
ⓒ 국회의원총람
한 독립운동사 연구가는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의하면 김명수는 1939년에 창씨개명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총독부가 창씨개명을 본격 실시한 연도(1940년)보다 1년이나 앞선 것"이라며 "일제 때 10년간이나 면장을 지냈다는 사실을 볼 때 일제에 협력한 정도가 짙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합천의 한 유력인사는 "2대 국회의원 선거 때 합천의 대표적인 애국지사인 강홍렬(의열단 출신) 선생이 낙선했는데 당시 주민들 사이에서는 선거 결과를 개탄하면서 '일이 거꾸로 되었다'는 말이 나왔다"면서 "합천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신 분들은 대개 그를 친일파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합천 용주면 출신으로 현재 부산에 살고 있는 한 인사는 "당시 면장의 권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왜정 때 면장을 10년이나 지냈다면 당연히 친일파로 봐야 한다"면서 "선친이 구린 데가 있으니까 아들이 친일파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는 거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박수현 연구원은 "특별법을 석연치 않은 이유로 극력 저지하는 김용균 의원의 행태는 실무 간사의 역할을 벗어난 과도한 대응으로 그 배경이 심히 의심스럽다고 밖에 달리 해석할 수 없다"면서 "일부 의원들의 문제제기로 법안이 이미 누더기 상태가 되었는데 이렇게까지 손을 대놓고 다시 이를 '정치적 악용' 운운하며 사실상 통과를 방해하는 행위는 규탄받아 마땅하다"고 말했다.

안호상 박사가 쓴 비문 "농업기반 확충 등 목민의 길 걸어와"

김명수가 살았던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는 광산김씨 집성촌이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그의 무덤과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문은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가 썼으며, 비석은 1987년 7월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면장과 조합장 등의 직을 맡아 부락단위 저수지 설치를 비롯한 농업기반 확충과 도로개설사업 등을 활발히 추진하면서 목민(牧民)의 길을 걸어왔다"고 되어 있다. 또 안호상 박사는 그를 "20세기 여명기에 태어나 조선조의 황혼과 한일합방, 조국광복과 건국, 6.25동란, 4월 민주혁명, 5.16군사혁명 등 민족사적 시련기를 살아오면서 국가와 국민의 번영, 향토의 발전에 이바지해온 선생"이라 설명해 놓았다.

지역주민들은 그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손목2리에 사는 박아무개(69)씨는 "친일혐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주민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손목리에 있는 광산김씨 종친회 회관에서 만난 노인들은 "일제 때 면장을 지내면서 마을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아주는 바람에 주민들이 잘 살게 되었다"고 말했다.

합천군청에서 발행한 <합천군사>에는 일제시대 면장을 지낸 인물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에 대해 합천군청 한 관계자는 "친일문제는 민감한 사안들이라 편찬위원들의 견해에 따라 담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합천은 전국에서도 히로시마 원폭피해자들이 많은 곳인데, 심진태 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은 "현재 등록된 용주면의 원폭 피해자는 26명으로 다른 면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면서 "하지만 징용 등으로 일본에 갔던 사람들이 면장과 어떤 관계 속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 김명수 비석 아래에 보이는 마을이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김용균 의원 "선친은 친일파 아니다,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김용균 의원은 "선친은 친일파가 아니다"고 해명했다. 그는 31일 <오마이뉴스>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36년간 일제 치하에서 단순히 취업한 사람과 친일한 사람, 반민족행위를 한 사람까지 있을 수 있는데, 여러 기록을 놓고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면서 "단순히 면장을 하고 조합장을 지냈다는 사실만으로 친일파로 몰아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 김용균 한나라당 의원
ⓒ 오마이뉴스 이종호
선친의 면장 재직 경력과 관련, 김 의원은 "일본에서 귀국한 뒤 부산에서 신문사를 하다 고향에 취재를 왔는데, 이전 면장이 죽고 없어 주민들이 똑똑한 사람이 면장을 맡아야 한다고 해서 민선이나 마찬가지로 임명을 받은 것으로 안다"면서 "주민을 위해 봉사하고 강둑과 도로개설 등으로 신임을 받았기에 해방 후까지 면장을 했던 것"이라 말했다.

또 금융조합장 경력과 관련해 김 의원은 "전국적으로 2000명의 총 대의원이 있었는데 선출직으로 5선까지 했다"면서 "해방 후에도 조합장을 할 정도로 신뢰를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 의원은 "선친은 합천청년회를 조직해 교육청으로부터 1년 과정의 국민학교를 개설해 문맹퇴치와 교육에 앞장서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친일진상 규명 특별법 제정과 관련한 논란에 대해 김 의원은 "법안이 3년째 계류 중인데 친일파 기준도 1호부터 25호까지 다양해 전 국민을 친일파로 보고 있을 정도"라며 "과거사 진상규명의 기준은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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