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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대교들 전투에서 전사한 1만의병의 합장묘 만의총
ⓒ 김대호
강진에서 해남 가는 길, 옥천면 길가에서 집채만한 무덤을 보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이 무덤을 보면서 '어느 잘된 후손이 조상을 저리 호사스럽게 모시나' 하는 생각이 드니 심기가 불편하다.

두륜산 대흥사에 단풍구경 가는 일이 급했던 터라 무심코 지나칠 일이지만 그날따라 '배산임수 좌청룡우백호' 명당도 아닌 허허벌판에 누가 무덤을 썼을까, 그 이유가 뭘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이었다. 간단하게 안내문만 볼 요량으로 차 시동을 켜 놓고 내려 안내문을 읽은 나는, 차 시동을 끌 수밖에 없었다.

해남군 향토유적 6호 만의총(萬義塚). 땅끝, 두륜산 대흥사, 미황사, 녹우당, 보길도 등등 해남군의 이름 있는 명소들이 많지만 내가 해남여행기 첫 번째로 만의총을 생각하게 된 것은 그곳이 해남하면 떠오르는 윤선도나 서산대사, 초의선사와 달리 이름 없는 무명인(無名人)들의 무덤이었기 때문이다.

정유재란 역전시킨 '성산대교들 전투'

▲ 승병을 이끌고 왜군을 격퇴한 서산대사가 머물었던 대흥사 대웅전
ⓒ 김대호
만의총은 정유재란 당시 소서행장(小西行長) 휘하의 3만 왜군을 맞아 순절한 이름 없는 1만 의병들을 모신 합장묘다. 임진왜란 1만 의병과 3만 왜병 피아 간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는 옥천 성산대교 전투는 어떤 전투였을까? 만의총유적보존회 양회철(78세·향토사학자) 회장이 말하는 대략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호남을 점령하지 못해 패전했다고 판단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7년 11만 대군으로 다시 조선을 침략해 우군은 전주성을, 좌군과 수군은 남원성을 공격했다. 전라병사 이복남과 명나라 부총명 양원이 이끄는 4천의 병사와 6천의 주민들은 결사항전에 임했으나 모두 전멸했다.

남원성과 진주성 공략으로 자신을 얻은 소서행장은 칠천량해전 이후 사실상 무력화된 조선수군을 궤멸시키고 마지막 남은 해남을 끝으로 전라도를 수중에 넣기 위해 병력을 북쪽과 서쪽에서 밀고 들어갔으며 어란진-우수영을 통한 수군의 압박작전으로 전쟁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괴멸시킨 뒤 300여 척의 전함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몰려온 왜 수군은 명량해전에서 단 12척에 불과한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대패한다. 왜군은 제해권을 상실하면서 전쟁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이를 역전시키기 위해 3만 대군을 이끌고 병치를 넘어 해남으로 진격해 온다.

명량대첩 3일 후, 관군이 병마절도사가 있는 병영에서 진을 치고 있는 터라 안심한 왜군은 옥천 성산대교에서 또다시 암초에 직면하게 된다. 장흥·강진·영암에서 모여든 4천 의병과 해남지역 2천여 명 등 윤륜(尹綸), 윤신 (尹紳)형제가 이끄는 6천여 명 의병이 손에 낫이며 곡괭이, 죽창을 들고 버티고 있었던 것.

6천쯤이야 한나절이면 된다는 왜군의 오만은 달마산 전투에서 승리한 윤현(尹俔), 윤검(尹儉) 형제가 이끄는 의병 2천여 명과 성남(대흥사) 방면의 김인수 장군이 이끄는 1500여 명이 합류하면서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 상륙하는 왜 수군을 격퇴한 달마산에 있는 미황사
ⓒ 김대호
3일 낮밤을 쉬지 않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통해 피아 간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처절한 혈전이 되어 승리한 왜군도 궤멸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명량대첩에 이은 이 전투로 인해 왜군은 임진왜란에 이어 또다시 전라도 공략에 실패하고, 정유재란의 전세는 하루아침에 뒤바뀌게 된다.

이때 전사한 1만 의병의 죽은 시신을 모아 합장한 것이 만의총으로 당시 6기가 있었는데, 농지개량 등으로 현재는 3기만 남아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성산대교들 만의총유적보존회를 조직해 매년 10월 10일 이들을 기리는 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나머지 2기의 묘소를 복원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보존회 양회철 회장은 "당시 의병들이 훈련했던 연병장 터는 남아 있고, 성은 일본인들이 왜정 때 저수지를 만들면서 없애버렸다"며 "사당이라도 지어 전사한 1만 의병의 명복을 빌었으면 하는데 안타까울 따름이다"고 아쉬움을 전한다.

'전라도가 있어야 나라도 있다'

정유재란 이후 선조 30년 2월 선조는 그동안 호남인에 대한 차별을 부끄러워하면서 전라도 백성들에게 공식사과 한다.

"멀리 있는 남도 백성들아 짐의 말을 들을지어다. .....생각하여 보니 지난 기축년(己丑年)의 역변(정여립의 모반사건) 이후에 도내에 걸출한 인물들도 오랫동안 뽑아 쓰지 아니하여 그윽한 난초가 산골짜기에 외롭게 홀로 향기를 품고 있으며, 아름다운 옥이 형산에 광채를 감추게 되었도다. ..... (이제야 난을 당하여 널리 인재를 구하고자 하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겁도다." <난중잡록(亂中雜錄) 정유년 2월 22일>

이순신 장군도 전 국토가 짓밟힌 상황에서 끝까지 왜군을 막아낸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니 만일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입만 열면 백성 운운하던 사대부들은 백성을 버리고, 임금의 몽진 길을 따라 피신했지만 전라도의 이름 없는 백성들은 나라를 지켰다.

물론 당시 의병을 이끌었던 윤륜, 윤신형제와 윤현, 윤검형제 같은 사대부도 있다. 그래도 명문 해남윤씨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들은 죽어서도 이름을 기억해줄 가문이 있었다. 그러나 개똥이, 복순이, 칠복이로 불려졌을 이름 없는 백성들은 아스라한 첫사랑의 기억도, 따스한 가을볕에 동구 밖을 뛰놀던 아이들의 기억도 모두 뼈와 함께 스러져 흙이 됐다.

역사는 하찮은 돌멩이 하나에도 허락하던 이름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허락지 않았다. 망월묘지의 무명열사를 비롯해 국립묘지의 무명용사 그리고 알렉산더, 징기스칸, 나폴레옹. 히틀러, 부시와 같은 전쟁 광들이 만들어 낸 살육의 현장에서 이름 없이 죽어 간 혹은 죽어갈 이름 없는 병사들과 백성들에겐 이름이 없다.

한사람의 예술혼이 국보가 되고 보물이 되기도 하지만 1만의 죽음은 여전히 해남유적 6호다. 언제쯤 이름 없는 백성의 이름이 국보가 되는 세상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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