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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주기 추모제가 열렸던 천안공원 묘역의 '나주 임종국지묘'
ⓒ 박도
2003년 11월 9일 오후 2시 정각, 천안공원 묘원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주관으로 나주 임종국 선생 14주기 추모식이 있었다.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잠시 멈춘 공원 묘원 식장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회원, 광복회원과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이기형 시인, 비전향 장기수 정순택옹, 정신대 황금주님 등 100여 참배객이 모인 가운데 추모식이 엄숙히 열렸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과 동 연구소 충남지부 전재진씨의 공동 사회로 고인 약력 소개, 고인 육성 듣기, 추모 말씀, 살풀이 춤, 헌화·헌주 순으로 추모제가 진행되었다.

▲ 임종국 선생 14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참배객들이 고인을 기리고 있다.
ⓒ 박도
고인의 육성 녹음은 돌아가시기 전, 기독교방송에서 임헌영 문학평론가와 대담한 테이프로, 당신이 친일 연구를 하게 된 배경 설명이었다.

1945년 임종국 선생이 중학교 3학년 때 해방이 찾아왔다. 그때 일본군은 물러가면서 20년 후 다시 조선에 온다고 했는데 정말 꼭 20년 뒤인 1965년 한일회담이 성사되었다. 임 선생은 이를 보고 일본의 재침을 경계하고자 친일 연구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임헌영 소장은 즉석 추모사를 통해 "임종국 선생의 정신을 받들어 민족문제연구소가 창설되었으며 오늘의 이 난세는 해방 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고 역설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추진 중인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면 가장 먼저 선생님의 영전에 큰 제단을 마련해 바치겠습니다. 좀 더 살아계셔서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아주셨어야 함에도 하늘은 쓸모 있는 인물을 먼저 데리고 가셨습니다”고 깊이 고개 숙이며 애통해 했다.

▲ 고인의 원혼을 달래는 살풀이 춤
ⓒ 박도
이어 살풀이 춤, 헌화·헌주 순으로 추모식을 마친 후 참배객들이 음복하면서 고인을 기렸다. 조촐한 임종국 선생의 무덤 곁에는 묘비가 세워진 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시인이요, 사학자였고, 민족주의자였다. 일찍이 시 <비(碑)>로 문단의 기대를 모았으나, 이 나라 구석구석에 남은 일제 통치의 독소를 말끔히 씻어내고,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으로 방대한 자료를 찾아내어 문학뿐 아니라 정치·경제·종교·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친일의 실상을 낱낱이 밝히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글을 쓰며 외로운 싸움을 맡았다.

그에게는 항일 독립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쉽게도 뜻을 다 펴지 못하고 삶을 마쳤으되 서슬 푸른 기개와 높은 뜻은 길이 이어지리라.

저서 <친일문학론>·<일제침략과 사상탄압>·<일본군의 조선침략사>·<일제침략과 친일파>·<한국문학의 민중사>·<한국사회 풍속야사>


▲ 임헌영 소장의 헌주
ⓒ 박도
선생의 저서들은 후학들의 친일 연구에 귀중한 교본이 되었다. 몇 해 전 필자도 중국대륙 일대를 답사한 후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를 집필하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이 임종국 선생의 <일제침략과 친일파>이었다. 이 책을 펴 보면 해방 후 내로라하고 거들먹거렸던 정치인·교육자·언론인·경제인·문화인들의 이름이 실려 있어서 참담한 심경을 금치 못한다.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는 어떠한 범죄도 성립될 수 없다. 나라 팔아 먹은 놈도, 왜놈 앞잡이하던 놈도 해방 후에도 높은 벼슬하며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에 배고파서 도둑질한 사람이 무슨 죄가 되겠는가? 이런 나라는 부패하기 마련이었고 도의와 양심은 땅에 떨어져 버렸다. 수 천억 원을 강탈해 간 도둑이 오히려 큰 소리치면서 배째라는 세상이 아닌가!

임종국 선생은 언 땅에다 씨앗을 뿌린 선구자적 위업으로, 하마터면 영영 유실될 뻔한 민족반역자의 발자취를 역사에 남겨 후세에 누가 바른 삶을 살았는지를 가늠케 한 크나큰 공로자시다.

그러나 살아생전의 선생은 외롭고 구차했다. 돌아가실 때는 돌보는 이도 없이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피를 쏟으며 세상을 뜨셨다고 하니 이 땅에 정의가 있는지를 의심케 한다.

변절자 육당 최남선이나 춘원 이광수를 연구한 이는 교수도 총장도 되었는데, 그들의 친일 행적을 연구한 이는 평생을 가난과 핍박으로 보낸 게 오늘 대한민국의 한 단면 같아서 필자의 마음이 돌아오는 길 내내 몹시 아팠다.

영령이시여! 이제는 하늘 나라에서 편히 잠드소서.

▲ 추모제 참배객들이 '일제청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박도


임종국 선생 약력

임종국 선생은 1929년 10월 26일 경남 창녕 읍에서 임문호씨의 4남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교회 내 직책 변경으로 상경한 10대 시절부터 이후 1980년 천안으로 내려가기까지 근 40여 년을 서울서 생활했다.

1945년 해방되던 해 그는 중학교 3학년 17살 소년으로 일본군의 퇴각을 경험했고 그 후 고려대 정치학과에 진학했으나 끝내 문학으로 돌아온다. 1959년 <문학예술>지에 시 <비(碑)>를 발표함으로써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다. 이 시기 그의 시작활동은 그의 일생 중에서 가장 활발했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1965년부터 2년여 신구문화사에서 직장생활을 한다.

1965년 한일회담은 임종국 선생의 생애에 전환점을 마련한 중요한 계기로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즈음 그의 연구 주제는 문학사회사였다. 이것이 한일회담의 반민족적 행위와 접목되면서 본격적인 친일연구의 계기가 되었고 그 결실이 <친일문학론>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1966년 <친일문학론>을 내고 나서 한동안의 공백기를 보낸 그가 본격적인 친일 연구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이다.

그때부터 그의 연구영역은 정치·경제·사회·교육·종교·군사·예술 등 사회 전역에 걸친 친일문제로 확산되어 갔고, 연구방법은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한 실증적 고찰이었다. 집필활동이 왕성했던 1980년대 이후 그는 친일파 개개인의 친일행적은 물론 그 집안의 친일내력까지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1980년 그는 건강문제와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서 천안 교외에 외딴 집을 짓고 ‘요산재(樂山齋)’라 이름하고 이곳에서 일제침략사와 친일파의 가족사를 규명해 나갔다. 1983년 <일제침략과 친일파>, 1984년 <밤의 일제침략사>, 1985년 <일제하의 사상탄압>, 1986년 <친일문학 작품선집>, 1987년 <친일 논설집>을 차례로 발간했고 이후 친일문제 연구에 체계를 세우고 총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하여 <친일파 총서>(10권)를 펴내기로 계획했다.

1988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를 내놓은 이후 임종을 불과 8개월 앞둔 1989년 3월에 1994년 완간 계획으로 친일파 총서 10권 중 <총론> <사상침략과 친일파> <정치침략과 친일파> <해방이후 친일파> 등 4권의 집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 후 계속되는 지병과의 싸움에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1989년 11월 12일 0시 40분, 민족의 정기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역사의 상처를 한 몸에 부여안고 반민족 범죄자와 싸워왔던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이고, 재야사학자인 임족국 선생은 그의 큰 뜻을 후학들에게 남기고 타계하였다.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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