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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머니는 저를 포함해 11남매를 키우셨습니다. 대단하시지요, 그뿐만이 아니지요. 손주 두 놈을 고등학교,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 뒷바라지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 어머니는 '장한 어머니 상'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상을 많이 타신 분이 있으시겠지만 '장한 어머니 상'은 타 보지 못하셨을 겁니다. 장한 어머니상은 아무에게나 주는 상이 아닙니다. 인생의 긴 여정을 끝내시고 황혼기에나 들어서야 탈 수 있는 상이며, 어머니로서 큰 공덕을 쌓아야 탈 수 있습니다.

그 상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받으신 상이랍니다. 엄마(저에게는 형수님)가 없는 손주 녀석을 엄마 없는 티 안나게 곱게 키우셨다 하여 손주 녀석 학교로부터 탄 자랑스러운 상이랍니다.

그러니까 농사만 짓던 저희 어머님도 상을 하나 타신 것이지요. 상을 타시던 날 어머님은 정말 기뻐하셨어요. 저희 시골 마을에서는 처음, 그리고 면 단위에 있어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군 단위 이상 상을 탔다는 정보가 없기에.)

▲ 어머니가 사시는 마을
ⓒ 한홍재
저희 어머님은 대단하신 분이셨습니다. 정말 남을 위할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세상에 자기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사회인데 남을 위하여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가를 몸소 제게 깨우쳐 주신 분이셨으며, 이 아들이 상을 조금씩 알게 되었을 무렵에 더 크나큰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이런 분이셨습니다.

제사를 지내고 새벽녘 갓 시집온 며느리와 약간의 언성(다툼?)이 있으시곤 하셨지요. 어머니께선 제사음식을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모두 나누어 드리는 게 아닙니까?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가로막고 우리 가족(식구)들 먹을 떡과 과일은 남겨 놔야 될 게 아니냐고 그야말로 시어머니께 대들었지요. 차츰 며느리가 저희 집 내력을 알게 되었을 쯤에도 며느리 행동은 어느 정도 계속 되었지요.

그리고 제 어린 시절엔 보부상(보따리 장수)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에 2~3번 정도는 꼭 보따리 장수들이 저희 집에 들러 여관인양 잠을 자고 가는 것이 아닙니까. 소문이 난 것이지요. "금곡 마을 대기댁 집에 가면 눈치 안보고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지 않냐고" 얘기를 해 주는 동네 어르신들이 많았나 봅니다.

때론 그 보따리 장수들로 인하여 덕을 본 적도 있지요. 언젠가는 그릇 등을 팔고 현물인 꿀(소주병 1.8ℓ 들이)을 받아 가지고 다니다 무거워서 그러니 윗마을에 갔다 올 때 가지고 가겠노라며 찾아 갈 때까지 잘 보관해 두라고 하길래 큰 방 윗목에 1년간 두고두고 보관하다가 끝내는 아버지의 명으로 "이제는 보따리 장수가 아니 올려나 보다" 하시면서 그 꿀을 온 가족이 다 먹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한 번은 꼬리 없는 개인 일명 '버꾸'(일명 백구)를 키운 적이 있었습니다. 꼬리가 없는 터라 온 가족이 불쌍히 여겨 무척 귀여워 해 주고 다른 개랑 싸울라치면 더욱더 힘을 써 편을 들어주곤 했습니다. 그러니깐 사랑으로 버꾸를 키운 것이지요.

그 버꾸를 아버지께선 읍내 고창장에 내다 파신 것입니다. 어린 마음에 저는 가족을 잃은 것보다 더 아파했었습니다. 울었지요 뭐. 그런데 버꾸 녀석이 큰 산(전라남북도의 경계에 있는 산)을 넘어 일주일만에 저희 집으로 돌아와 버린 것입니다.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 모두는 고민에 빠졌었고 어떻게 하면 버꾸를 읍내 장터에서 매매한 주인에게 돌려 줄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주인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매계약서를 작성한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일년을 더 키웠습니다. 그리고 일년이 지난 후 또 읍내 고창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러니까 개를 두 번 팔았던 것이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버꾸를 가족처럼 사랑으로 보살펴 줬더니, 버꾸가 은혜를 갚은 모양입니다. 그렇게 밖에 정리할 수 없지 않겠어요.

저희 집에 그래도 쌀이 떨어지지 않았었나 봅니다. 어머니께선 농사를 짓고 살았으되 보릿고개가 오면 동네 조금 부족한 이웃들에게 쌀을 아버지 몰래 퍼다 주시곤 하셨답니다. 그래서인지 저희 어머니가 지금 70세이신데도 이웃집 제삿날, 생일날 등 행사가 있으면 꼭 어머니를 부르셔서 식사도 같이 하시고 옛이야기도 하시곤 하신답니다. 이웃집 아주머니께선 그때(보릿고개 당시) 쌀밥 한 그릇이 얼마나 꿀맛이었는지 모른다고 지금도 저에게 들려주시곤 하시지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제가 어머니 은덕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서울시청에서 근무합니다. 그러기에 시청 직원들 또는 저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도 말 한 적이 없지만, 저를 잘 아는 시골 마을 사람들과 제 친구들에게는 자주 말하곤 하였지요. 어머니, 당신께서 주변에 베푼 은덕으로 '오늘의 내가' 있다고 어머니 자랑을 하곤 하지요.

그리고 위 사실을 입증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저희 마을(금곡) 사람들을 단 한 분이라도 만나서 이야기하면 바로 '오늘의 나'에 대해서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저희 마을은 인터넷 주소창에 금곡 영화촌이라고 치시면 바로 저희 마을이 수없이 소개되지요. '내마음의 풍금', '태백산맥', '침향' 등 영화와 다수의 드라마를 찍었던 곳이랍니다. 그리고 저희 마을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로 선정된 것이기도 하지요(중앙일보 선정).

엊그제는 어머니께 백내장 수술을 해 드렸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선 대뜸 왜 이리 늦게 찾아 오셨냐며 막내며느리를 호통 치셨답니다. 어머니 말씀이 "신경통으로 지금도 약을 많이 먹으며 돈을 많이 쓰고 있는데" 하시면서 자식들에게 부담을 덜 줄려고 눈이 잘 안 보이는데도 1년간이나 참으셨답니다.

어머니가 수술을 받고 통원치료를 받던 2주일은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퇴근 시간만 되면은 어머니 뵈러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으며, 또 몇 일 동안으로 그야말로 집으로 막! 뛰어 갔습니다. 어머니와 대화도 하고 외식도 할 겸 해서 입니다. 정말로 행복한 나날들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저와 떨어져 혼자 시골에서 살고 있으셔서 더 그랬나 봅니다.

또 다른 행복 이야기 하나 해드리죠. 수술을 받으신 후 의사선생님께서 어머니 시력을 측정하셨답니다.

"한 쪽 눈을 가리시고 말씀하세요. 자, 보이시죠! 이게 뭐죠?"(우산을 가리키며)
어머니 답변 "삿갓요"(뚝 잘라서)
"네, 그래요."(의사 선생님 고개를 흔들며 한참 후 인정하면서)

"그러면 이건 뭐죠?"(비둘기를 가리키며)
어머니 왈 "꿩…"(길게, 강한 어조로, 자신감 있게)

이번엔 의사 선생님께서 바로 인정하면서 "네, 맞습니다. 맞아요!"(의사선생 박수치며, 감탄하면서)

그래서 어머니께서 좌우 시력이 각각 1.0이나 나왔습니다. 참! 대단하시죠. 집사람으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내 눈이 다 맑고 청량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벌써 어머님께선 일흔이 다 되셨습니다. 또 당신의 아들은 당신 나이의 그릇의 반을 채웠습니다. 어머니 은덕에 아들은 이만큼 컸습니다. 어머니 은덕으로 세상을 살아 갈 방향과 삶의 지표를 세웠습니다. 이제까지 어머니처럼 베풀면서 살아오진 못했지만 앞으로는 보람과 삶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베풀면서 사는 삶을 영위하겠습니다.

장한 우리 어머니! 아들을 건강하고 바른 생각을 가지게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진정 사랑합니다.

태그:#어버이, 어머니, 인고, 손주, 상, 공덕, 뒷바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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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경험을 많이 한 대한의 청년입니다. 매사에 적극적 사고방식과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이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어떻게 살아야 바른 삶을,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길인가를 고민하면서 베푸는 삶이야 말로 진정한 삶이라고 예찬하고 싶은 대한의 한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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