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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 하면 우리는 먼저 '안성맞춤'을 떠올리게 됩니다. 안성은 예로부터 삼남의 모든 상품이 모이는 곳으로 그곳에 가면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을 정도였으며, 생활유기또한 발달하여 그를 안성에 주문만 하면 금세 뚝딱 보기 좋게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죠.

유기와, 8월 중순이면 제철인 거봉포도, 그리고 미륵으로 유명한 안성을 향해 함께 떠나 볼까요?

허생전과 미륵의 고장 안성

서울에서 안성 찾아 가기

*자가 차량 :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안성, 평택 나들목을 나가 안성 방향으로 청룡사까지는 약 30분 소요 / 중부고속도로 일죽 나들목으로 나가 죽주산성까지는 5분, 죽산에서 칠장사까지는 15분 소요

*대중교통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안성행 버스 이용

/ 정표채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의 무대인 안성, 조선시대 과거를 보러가던 유생들이 다니던 길목, 풍수·재해가 없는 편안한 땅. 안성에 대한 과거의 수식어는 이처럼 찬란하지만 지금의 안성은 과거의 유명세보다는 많이 쇠락한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안성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문화유적이 이곳저곳에 많이 널려 있습니다. 미륵 신앙의 중심지로서의 안성. 실제 안성에는 수많은 미륵불이 있는데, 후삼국의 궁예가 '미륵'을 칭하고 자신의 모습을 미륵으로 만들어 국사봉 아래 세운 일명 '궁예 미륵'도 있고, 죽산의 죽주산성처럼 군사적인 요충지와 그 이래에는 매산리 미륵당에 '태평 미륵'도 있습니다. 또 임꺽정과 남사당의 이야기가 있는 절집들도 있습니다.

중부고속도로 일죽 나들목을 나서 백암으로 가는 18번 도로로 2-3분 정도 가다가 왼쪽 산길을 따라 가면 조그만 주차장이 있고, 정돈 된 길을 따라 오르면 비봉산 죽주산성이 보입니다.

▲ 잡풀들 만이 무성한 죽주산성의 성벽
ⓒ 정표채
거대하고 멋진 성을 기대한 사람들은 금방 "에이~"하면서 실망의 말을 내뱉을 정도로 지금은 성문과 석축만 약간 남아있죠. 하지만 원래 성 둘레는 1162m였고 신라 말의 기훤 장군, 고려 말 송문주 장군의 전공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 죽주산성에서 바라 본 죽산 평야.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이 곳이 군사적 요새임을 알 수 있다.
ⓒ 정표채
죽주산성 위에서 앞을 바라보면 넓은 죽산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누가 보더라도 중요한 군사적 요새였음을 의심치 않을 것입니다. 빛 바랜 영화와 온갖 들풀들을 보며 죽주산성에서 내려와 안성 쪽으로 약 600여m 가다보면 매산리의 석불입상인 '태평미륵불'이 보입니다.

▲ 매산리 미륵당에 있는 태평미륵불
ⓒ 정표채
고려시대 몽고군을 물리친 송문주 장군과 김윤후 장군의 우국충정을 기리고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건립되었다 전해지는 태평미륵불은 대부분의 불상처럼 머리가 신체의 다른 부분에 비해서 거대하며 인체 비례 또한 맞지 않지만 당당한 모습을 봤을 때 고려시대 초기 불상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일곱 도적을 현인으로 만든 전설이 있는 칠장사

▲ 칠장사 입구에 있는 철당간
ⓒ 정표채
옛날 칠장사로 가는 길은 버스 한 대 다니기 알맞은 곳이었죠. 반대편에서 우마차나 승용차라도 한 대 올라치면 서로 비켜가기가 어려운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도로도 확장하고 포장도 말끔해서 쉽게 칠장사에 오를 수 있게 됐습니다.

칠장사 들어가는 입구에 극락이라는 마을이 있고, 그곳에서 조금 오르면 부도밭을 지나고 쇠막대기 모양의 철 당간과 당간지주 또한 보입니다. 당(幢)은 깃발 당자로 당간에 깃발을 걸어 여기가 절이며 절의 경계를 나타냈던 물건입니다. 특히 칠장사 철당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몇 안돼는 철 당간으로서 계룡산 갑사의 그것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절에 오르면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소조사천왕상'이 눈을 부릅뜨고 천왕문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요즘 칠장사에는 경기도 문화유산 해설사가 항상 주재해 있어 해설사에게 안내를 부탁하면 아주 자세히 설명을 해 줍니다.

대웅전 앞 파릇한 잔디와 괘불 석주(행사 때 쓰는 큰 불화를 걸기 위한 둘 내지 세 개의 돌기둥)와 빛바랜 단청이 묘한 영상으로 다가옵니다. 대웅전 옆에는 봉업사지에서 출토된 석불 입상이 있는데 조각수법이 정교하지만 오랜 풍상으로 얼굴의 모습이 많이 상해 있습니다.

▲ 빛바랜 단청이 아름다움을 더해 주는 칠장사 대웅전
ⓒ 정표채
대웅전 옆 원통전을 돌아 시멘트 계단을 오르면 이 절의 중창자인 혜소국사비가 있습니다. 혜소 국사비는 거북모양의 '귀부'와 비석의 '탑비', 위 부분 용이 엉켜 있는 모양은 '이수'라고 나눠 부릅니다.

▲ 혜소 국사비 이수, 용이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린다
ⓒ 정표채
칠장사는 그러한 유적, 유물 이외에도 많은 설화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옛날 7명의 악인이 여기 살았는데 혜소국사가 그들을 교화시켜 현인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칠장사 뒷산이 칠현산이라 불립니다. 또한 이곳은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의 무대로서 갓바치인 병해대사가 있었던 곳, 조선시대 인목대비의 원찰로서도 이름이 있었던 절로 알려졌지만 인목대비 이후에는 절을 돌보는 이 없어 많은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되게 되었습니다.

남사당과 자연목의 아름다움이 있는 청룡사

안성 시내에서 서운을 지나 진천으로 가는 엽돈재를 넘기 전 좌측으로 저수지가 하나 있는데 바로 청룡저수지입니다. 청룡사하면 잘 몰라도 청룡저수지는 대부분 알고 있는데 강태공들은 말을 빌리자면 이 저수지에서 붕어가 많이 나온다고 하는군요. 한 겨울 얼음 위에서 하는 얼음낚시는 청룡지의 자랑이며 명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 청룡사 대웅전- 정면
ⓒ 정표채
청룡저수지에서 약 1km 오르면 주차장이 나타나고 그곳에 차를 주차한 뒤 절로 오를 수 있습니다. 청룡사는 여느 절 집과는 사뭇 다릅니다. 일반 절집이 마을과는 멀리 떨어져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도 정진하는 조용한 환경을 이루고 있는데, 청룡사는 마을과 붙어 있어 그저 마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마을회관이나 성황당 또는 사랑방 정도로 여길 것 같았답니다. 왜 이렇게 마을과 청룡사는 붙어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이 절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시대 남사당패의 겨울나는 근거지였다는 역사를 안다면 아마도 그 의문 풀릴 것입니다. 남사당 하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각종 공연을 하는 집단으로 조선시대에는 천민의 취급을 받기도 했죠.

청룡사 천왕문에는 사천왕상이 없습니다. 문을 들어서면 예스런 요사채는 모두 허물고 새로 건물을 짓고 있으며 대웅전이 보입니다. 대웅전 앞에는 괘불 석주,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大雄殿"이라고 쓴 현판은 "雄"자와 "殿"자가 약간 옆으로 기울어 쓰여 있습니다.

또 기둥을 보면 우리가 경복궁이나 일반 유명한 절집에서 볼 수 있는 반듯한 기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연목을 사용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러운 멋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청룡사 대웅전 기둥- 자연목을 그대로 써서 아름다움이 배온다
ⓒ 정표채
휘어진 자연 그대로 기둥을 세워 어딘지 불안하고 균형잡히지 않은 모양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대웅전 현판도 휘어진 자연목과 조화를 이뤄 지극한 '자연미'가 청룡사 대웅전에서 배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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