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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신흥무관학교가 개교했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자 국내에서도 많은 애국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도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장지락(張志樂)이 동경 유학 생활을 청산하고, 남만주에 있는 조선 민족주의자의 군관학교에 가기로 결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다니면서 혁명가의 꿈을 키웠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합니하에 있는 조선독립군 군관학교 ―이 학교는 신흥학교라 불렀다.

아주 신중한 이름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군관학교에 들어가려고 하자 사람들은 겨우 15살밖에 안된 꼬마였던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입학자격 최저 연령이 18살이었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서 엉엉 울었다. 내 기나긴 순례 여행의 모든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자, 마침내 학교측은 나를 예외로 대우하여 시험을 칠 수 있게 했다.

지리·수학·국어에서는 합격하였지만, 국사와 엄격한 신체검사에서는 떨어졌다. 다행히 3개월 코스에 입학하도록 허락 받았고 수업료도 면제받았다.

학교는 산 속에 있었으며 18개의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눈에 잘 띄지 않게 산허리를 따라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18살에서 30살까지의 학생들이 100명 가까이 입학하였다. 학생들 말로는, 이제까지 이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 중에 내가 제일 어리다고 하였다.

▲ 김산이 다녔던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옛 터
ⓒ 안천(서울교대)
일과는 새벽 4시에 시작하여, 취침은 저녁 9시에 하였다. 우리들은 군대전술을 공부하였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도 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였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른 바 게릴라 전술 훈련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강철같은 근육을 가지고 있었고, 등산에는 오래 전부터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학우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간신히 그들을 뒤따라갈 수 있었다.

우리는 등에다 돌을 지고 걷는 훈련을 하였다. 그래서 아무 것도 지지 않았을 때에는 아주 경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그 날’을 위해 조선의 지세, 특히 북조선의 지리에 관해서는 주의 깊게 연구하였다. 방과후에 나는 국사를 열심히 파고들었다.

얼마간의 훈련을 받고 나자, 나도 힘든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으며, 그러자 훈련이 즐거워졌다. 봄이면 산이 매우 아름다웠다.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랐으며 기대에 넘쳐 눈이 빛났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할쏘냐? -<아리랑> 중에서-


독립 전사의 산실

신흥무관학교 전성기 때는 1기 학생수가 600여 명에 이르렀다. 국내에서 일제에 불만을 품은 수많은 애국 청년들이 압록강·두만강을 건너오는 목표가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입교를 지원하고자 함이었다.

신흥학교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면서, 유하현 고산자에는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 간부를 양성했고, 통화현 합니하, 칠도구, 괘대모자 등에는 신흥무관학교 분교를 두어 초등군사반을 편성하여 3개월간의 일반 훈련과 6개월간의 후보 훈련을 담당케 했다.

당시 고등군사반의 초대 학장에는 이시영, 교장 이세영, 부교장 양규열, 학감 윤기섭, 훈련감 김창환, 교성대장 이청천, 교관 오광선·신팔균·이범석·김광서·성준용·원병상·박장섭·김성로·계용보, 의무감 안사영 등이 있었다.

합니하 초등군사반의 교장에는 이장녕, 학도대장 성준용, 교관 박두희·오광선·이범석·홍종락·홍종린 등이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수많은 지원자로 활기에 찼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가능한 한인사회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학교 자체의 힘으로 꾸려갔다.

여기서 배출된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숭고한 멸사보국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중국 전역, 러시아령, 국내에까지 잠입하여 해방 전까지 항일 독립 전사가 되었다.

1920년의 청산리 전투 주역도 이들이요,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의혈단까지 이들이 주역이었다. 또한 이들은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독립군 사관생도 모집 활동도 전개하는 등 구국대열에 주저 없이 몸을 던졌다.

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신생 대한민국에 주역이 되었더라면, 이 땅에 정의와 진리, 양심은 만신창이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제가 괴뢰로 내세운 만주국 푸이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군관학교 출신들과 그 추종자들이 해방 후 주름 잡았으니 이 나라에 정의와 진리, 양심은 죽어버린 거나 다름이 없다. 이러고도 제대로 해방된 나라인지 그저 오호통재일 뿐이다.

▲ 베이징에 거주하시는 독립군 이태형 옹
ⓒ 박도
현재 베이징에 사시는 독립군 원로 이태형 선생(1907년생: 독립운동가 월송 김형식 선생의 사위)은 당신 소년 시절에 보았던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10살 무렵 동흥소학교를 다녔는데 신흥학교 가을 대운동회 때 줄 배를 타고 강을 건너 구경 간 적이 있었다. 신흥학교 생도들이 목총을 들고 체조하는 걸 봤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생도들이 종대 횡대로 정열을 했는데, 줄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치 먹줄로 금을 그은 듯 가로 세로 줄이 맞았다. 무릎에 ‘人’ 자 모양으로 흰 천을 두른 각반을 찼고 교복은 무명 옷감에 신나물로 물들인 누런 빛깔에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린 나이에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 없었다. 그들이 우렁차게 부른 신흥학교 교가는 지금도 생생하다.

서북으로 흑룡 태원 남의 영절에
여러 만만 헌원 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 섬 중 어린것들 품에다 품어
젖 먹여 준 이가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 좔좔 결치며 돈다.

장백산 밑 비단 같은 만리 낙원은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 집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종 설움 받은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자손들이라
가슴 치고 눈물 뿌려 통곡하여라
지옥의 쇠문이 온다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새로운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새 나라 세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청년들이라
두 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떴다.


1920년 초 신흥무관학교는 개교 후 가장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당시 주변 상황은 독립운동 진영에 불리하게 펼쳐졌다. 중국 관헌의 항일 단체에 대한 박해와 학교 해산 압력이 잇달았다.

이들의 압력은 자기네 땅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의 군사 훈련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 구실이었지만, 사실은 만주에서 커 가는 항일 운동 세력에 놀란 일제가 중국에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일제는 만주 군벌 장작림으로부터 봉천·길림에서 중·일 합동 수사권을 얻어내 남만주 일대에 독립운동가에 대한 검거 색출이 시작되었다.

1920년 1월 14일, 중국 관헌은 삼원포 한족회와 독립단 본부 해산을 명하였고, 다음날에는 한족신보사와 고산자의 동흥학교를 폐쇄시켰다.

이에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 참모장 김동삼 등은 대책회의를 열어 그 타개책을 심각하게 논의한 바, 신흥무관학교를 백두산 북쪽 삼림지대인 안도현으로 이동케 하였다.

이렇듯 이역 만주에서 오로지 조국 광복 일념으로 신흥학교를 졸업한 인원은 1920년 7월, 신흥무관학교가 안도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만 35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렇듯,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신흥무관학교 유적지가 지금은 한낱 옥수수 밭으로 변하여 무심한 옥수수 대만 무성히 뻗어있는 들판에서 우리 일행은 허망감만 안고 발길을 돌렸다.

그곳까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안내해 준 원금석 노인과 그냥 헤어지기가 너무 섭섭하기도 하고, 살아 생전 다시 못 볼 사람 같아서 약주 값으로 조금 드리고 다음 행선지 삼원포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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