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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광산 3500구 민간인 유골 있을 것
인도적 차원에서 중앙정부가 수습해야"


경산시의회(의장 변태영)는 최근 뜻 깊은 보고서 하나를 세상에 내놨다.

142일간의 진상조사, 이제 정부가 나서야 한다 / 최창환 PD

▲ 정교철 시의원
ⓒ 오마이뉴스 이승욱
경산시의회 산하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 진상조사 청원심사특별위원회'(이하 특위. 위원장 정교철)가 지난해 9월 23일부터 지난달 6일까지 총 142일간의 시간을 들여 진상조사를 벌이고 이를 정리한 '청원심사결과 보고서'가 그것.

이번 '청원심사결과 보고서'는 그동안 유족들과 일부 시민사회단체에서만 주장하던 경산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이하 코발트학살)을 공식적으로 국가기관에서 다룬 것으로, 지난 60년 4.19 이후 일시적으로 진행됐던 부분적인 국회조사 이후 40여년 만의 이뤄진 진상조사였다는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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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위가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코발트학살이) 민간인학살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관련 자료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열람이 불가능해 단지 유족과 지역주민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하지만 본 조사 활동을 통해 평산동 코발크광산에서 군과 경찰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됐음을 피해 유족과 지역주민들의 한결같은 증언을 통해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또 "경산 코발트 학살은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대구·경북 일원에서 보도연맹원, 교도소 수감자 등 다수의 민간인이 이념적 갈등으로 코발트관상에서 학살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오마이뉴스>는 최근 특위 위원장인 정교철(경산 서부2) 의원을 만나 142일 동안 진상조사 과정과 앞으로 코발트학살 사건의 해결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정 의원은 "코발트 학살과 관련한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거나 공개가 되지 않아 진상조사 과정이 힘들었다"고 토로하고 "3500구에 달하는 유골을 수습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문제"라면서 "사형수도 사형을 당한 후에는 기도를 해주고 매장을 하는데, 유골을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은 우리에게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 "특별법 제정이 되기 전이라도 국회의원들을 현장을 둘러보게 하고 중앙정부 차원에서 유골수습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코발트 학살이 있던 당시는 어두웠던 시대였지만 현재 우리들도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다. 다시는 코발트학살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면서 특별법 제정 등으로 코발트학살사건이 재조명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정교철 청원심사특위 위원장과의 인터뷰 전문.

- 경산시의회 차원의 조사가 작년부터 있었던 것으로 안다.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이었나.
ⓒ 오마이뉴스 이승욱
"지난해 8월 유족들이 시의회로 청원서를 냈다. 같은 해 9월부터 지난 3월 6일까지 총 142일 동안 (경산코발트광산) 현지방문과 특히 생존한 피해자와 유족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경산시의회처럼 특별위원회 경험이 있던 경남 산청, 전남 화순군 의회를 방문해 의견을 듣고 조사방향을 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었다."

- 현장조사 등도 진행했나. 느낌은 어땠나. 또 어려웠던 점은?
"우선 경산 평산 코발트광산과 관련해 그 동안 3500여명에 달하는 민간인 학살당했다는 유머가 많이 돌았다. 특위 의원 5명과 같이 현장을 방문해 장화를 신고 갱도에 직접 들어가 무너진 틈새로 아직도 유골이 박혀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50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유골이 방치되고 있는 상황에서 인도적인 차원에서 안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피해자 유족들도 가족들이 죽었다는 추정만하고 있었고, 경찰, 국방부, 국회, 행자부 등 관계기관에 (자료를 요청하는) 각종 공문을 보냈는데 한 곳도 근거(자료)가 없다고 회신했다. 그래서 우리(시의회) 힘으로도 더 이상 조사할 근거가 방법이 없어 아쉬웠다."

"관계기관 자료없어 애먹어...유골수습 서둘러야"

-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과 관련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당시 어수선한 시대적 상황에서 전개된 사건이다. 갱도에 수많은 유골들이 발견된 자체가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선 유골을 수습해야 한다. 사형수도 사형을 당한 후에는 기도를 해주고 매장을 하는데,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골을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은) 우리에게도 부끄러운 일이다."

- 당시 경산 코발트학살의 경위에 대한 조사는 이뤄졌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 8월경에 북한군이 대구에 점차 가까이 밀려오고 있는 상황에서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죄수들을 경산 인근으로 끌고 와 사살하고 코발트광산에 묻었다는 증언들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1]-1950년 한국전쟁 발발직후 350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돼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경산코발트광산의 수평갱도 입구. 이 갱도를 따라 50여미터를 걸어가면 아직도 수십구의 유골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9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서는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올해에도 7월 첫째 주 일요일 이곳에서는 위령제가 열리게 된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 보도연맹과 연루돼 억울한 죽음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당시만 해도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수였다. 말 한 마디만 잘못하면 빨갱이로 몰리는 지경이었다. 게다가 낮에는 국군이나 경찰이 지키고 있다, 밤에는 빨치산이 내려오는 상황에서 빨치산에 조금만 협조해도 빨갱이 사상을 가졌다고 매도되는 경우가 많았다. 코발트광산에 묻힌 상당수의 피해자들도 자신들도 모르는 상황에서 죽음을 당하는 등 일이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 피학살자의 대부분 연령대는 어떻게 분포된 것으로 파악됐나.
"특위를 통해 희생자로 접수된 이들의 대부분은 연령대가 20대였다. 인근 하양에 살고 있는 올해 일흔 여섯의 한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결혼한지 1년이 안돼 남편이 경찰에 끌려간 것으로 드러났다. 남편은 당시 부잣집 자식이고 학식이 있는 분으로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 경산경찰서에 면회를 한 번 했는데 행방 불명됐다. 남편을 잃은 할머니는 지금까지 눈물로 지새우고 있었다."

- 피학살자 수가 대규모라 경산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피해자들이 많을 것 같다.
"당시 학살된 수가 대략 3500여명이니깐 경산지역 뿐만 아니라 멀리 타지에서도 끌려 온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안동에서 끌려 온 사람도 있었다는 증언들도 나왔다."

"경산지역 뿐만 아니라 타지역 피학살자도 있었을 것"

▲ 산위에서 본 경산코발트 광산의 수직갱도 입구- 이 수직갱도는 100여미터 깊이로 우물처럼 구덩이가 나있고, 당시 학살은 이곳에서 이뤄져 100미터 아래의 수직갱도로 시신을 던져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 사실상 유골의 수습이 어려운 상황에서, 3500명이라는 수는 어떻게 파악된 것인가?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일제 트럭이 지나가던 길가에 살던 주민들이 하루에 몇 대씩 트럭이 지나갔는지 일일이 체크했었다. 특히 꼼꼼히 기록한 분이 체크한 17일 동안 차량 트럭이 왔다갔다 했던 횟수를 근거로 대략 35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 유족들의 신고접수는 어느 정도였나?
"지난해 10월부터 40일간 공고를 해 접수된 수는 76명이었고, 이중 여자는 2명, 남자는 74명이었다. 공고를 인터넷과 각 읍면에 공고를 내 신고를 내 접수를 받았는데 당초 예상보다 적은 수였다. 아마도 피해자 유족들이 많이 타지로 이사를 갔을 수도 있고, 경산시 지역만 공고했지 전국적으로 공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또 시대가 많이 변화됐다고 하지만 너무 참혹한 시대였으니깐 아직도 당시 유족들이 말을 하는 것을 아끼고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 유골 발굴 외에 진상조사도 필요하지 않는가.
"개인적인 생각으로 관계기관이 시의회의 요구에 대해 자료가 없다는 답하는 상황에서 진상조사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국회 차원에서는 가능하지 않겠나 생각된다. 국회 권한으로 문서 보관서를 확인한다든지…. 사건과 관련한 자료가 모두 소각됐는지는 모르지만 어딘가는 서류가 남아있지 않겠나."

"코발트학살 관련 서류 어딘가 남아있지 않겠나"

- 보도연맹으로 형무소에 끌려갔다 학살당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진상조사에는 대구형무소 재소자 명단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대구형무소(현 대구교도소)에도 당시 제소자 명단은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다만 당시 대구 <매일신문>에서 신문에 명단있던 것이 있지만 이것도 사건이 끝난 후 4.19혁명 후 신고를 것일 뿐이라 전체적인 상황 (피학살자들의 신원이나 수)을 확인하지는 못하는 자료이다."

▲ 수평갱도에서 발견된 유골을 수습하는 장면 ⓒ 경산지역 양민학살 피학살자유족회
- 대량 학살이 이뤄진 경위는 어떻게 파악하고 있나.
"우리로서는 그 당시 상황을 자료가 없으니 정확히 알 수 없고 정식적인 재판을 받고 사형집행을 받았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단지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추론해 봤을 때 이북에서 내려오니깐 군·경이 앞으로 전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니깐 즉결로 조처를 취하지 않았겠나."

- 지난 14일에도 코발트광산 인근 지역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고 하는데….
"경산 고발트광산 안 뿐만 아니라 아랫마을에 살았던 분 중 당시 19살이었던 한 남성은 당시 보초를 서다 사람을 데리고 올라가 자꾸 총소리가 나니깐 호기심이 발동해 산으로 올라가 계곡에서 사람을 사살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14일 현장을 찾아서 실제로 4평 정도를 호미로 파 보니깐 유골이 나왔다. 당시 코발트광산 뿐 아니라 경산·청도 주변의 많은 지역에서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특별법 제정 등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내는 등 활동을 하고 있는데... 순조롭게 이뤄질 것으로 보나.
"지금 참여정부가 몇 개월 밖에 안 됐고 국정이 어려운 상황이다. 또 국회의원 선거가 내년인데 정치적 상황이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어 특별법 제정 등이 미뤄질 가능성도 없진 않을 것이다."

코발트광산 외에도 인근지역 학살지 발견...
"유골수습 반대? 유골 나 뒹구는 현장보면 생각 바뀐다"


- 아직도 '레드-컴플렉스'가 만연해 있는 것이 우리사회의 현실이다. 보도연맹에 연루된 이들에 대한 유골수습, 추모사업 등이 반발을 일으키진 않겠나.
"지금까지 조사해 본 결과로는 이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든지 빨갱이라는 증거가 없다. 그저 사람들이 수천명이 죽은 것은 사실 아닌가. 많은 시대적인 정황을 봤을 때는 추론해 볼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직접 유골을 보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세력이든 누구든 이의를 달 수 있겠나.나한테도 누군가 전화를 걸어와 항의를 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랬다. '나와 현장에 같이 가보자' 직접 현장에 가보면 인도적인 측면에서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사진 그림은 경산코발트광산 단면도 - 맨위(수직갱도 입구)에서 학살된 시신은 100미터 구덩이로 던져져 차곡차곡 쌓였다. 현재 유골이 일부 발견되고 있는 지점은 이 구덩이와 각각 인근 도랑(구덩이 아래 90미터 지점), 중턱 입구(사진1. 40미터 지점)와 연결된 수평갱도에서 쌓인 유골이 흘러나와 외부로 유출된 것이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 경산시 차원의 이 사건과 관련 어떻게 지원할 방침인가.
"유족대표 이야기는 추모제 비용이라도 지원해 달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집행부에 건의해서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그 외에 할 수 있는 방법은 유골 수습이 우선이니깐 중앙정부와 국회에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도록 요청하는 것이 지원할 수 있는 최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 앞서 언급했지만 특별법 제정이 현실적으로 어렵거나 장기간 소요될 것 같다.
"특별법 제정 이전에라도 폐강산에 대한 유골 수습이 될 수 있도록 국회 해당 상임위 의원들이 현지를 방문하고, 여야가 국회에서 공분을 모아 지원에 대해 의논하면 된다. 그것이 핵심이다. 특별법이 되지 않더라도 그거만하더라도 돌아가신 분들의 유족들은 엄청난 위안을 받을 것이다."

"한반도 위기상황, 전쟁 두려워...코발트학살 다시는 없어야

-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코발트 학살이 있었던) 당시는 시대적으로 어두운 시대였고 이념적으로 극명하게 대치하고 있던 시대였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전 세계에서 한반도 밖에 없지 않나. 지금도 북핵 때문에 위기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또 다시 전쟁이 발발할까 걱정스럽다. 우리는 이라크전쟁을 보면서 부녀자, 어린이들 죄없는 민간인들이 폭격으로 죽는 모습을 보지 않았나. 코발트 광산 학살이 있었던 당시는 그런 일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다시는 없어져 한다. 이를 위해서 코발트 사건이 재조명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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