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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달산아 네게 넋이 있다면, 영산강아 네게 뜻이 있다면 이 김대중을 버리지 말아다오." 김대중의 이 절규처럼 호남은 그와 약 40년을 함께 했다(사진은 1969년 삼선개헌반대투쟁 당시 연설하는 모습)
ⓒ djroad.com

"유달산아 네게 넋이 있다면, 영산강아 네게 뜻이 있다면 이 김대중을 버리지 말아다오."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던 1967년 6월. 한 젊은 정치인이 목포 역전 광장에서 사자후를 토하고 있었다. 유세라기보다 차라리 통곡에 가까웠던 한 젊은 정치인의 이 외침을 목포는 외면하지 않았다.

6·25 한국전쟁으로 수도가 부산으로 잠시 옮겨졌던 시절 말고는 처음으로 지방인 목포에서 대통령과 전 각료가 참석한 국무회의가 열렸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거리로 나가 여당 후보 지원유세를 했다. 당시 목포에서는 '개도 발엔 고무신을 신고 입엔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여권의 금권·관권선거가 횡행했다. 박정희의 유일한 목표는 '김대중 낙선'이었다.

그런데 목포는 '박정희의 고무신과 돈'을 거부하고 '김대중의 신념과 패기'를 선택했다. 김대중이 재선의원이 된 것이다. 젊은 정치인의 좌절을 기대했던 박정희는 자신의 목표를 점령하지 못한 채 목포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4년 후인 1971년, 김대중은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장충단 공원에 서 있었다. 정권교체의 희망에 들떠있던 이 젊은 정치인의 상대는 바로 박정희였다. 김대중은 장충단 공원에 운집한 약 100만명의 군중에게 승리를 확신하며 외쳤다.

목포, 박정희의 '고무신'을 팽개치다

"4·19는 학생의 혁명이었습니다. 5·16은 군대가 저질렀습니다. 이제 오는 4월 27일은 학생도 아니고 군대도 아닌 전 국민이 협력해서 이 나라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손에 의해 평화적으로 정권교체한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우리가 이룩하자는 것을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7월1일은 청와대에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입니다. 서울시민 여러분, 7월1일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만나자'던 그의 꿈은 27년이 지난 1998년 2월에야 이뤄졌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이후 '다섯 번의 죽을 고비와 6년의 감옥살이, 수십 년의 망명과 연금, 감시'를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김대중은 청와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김대중의 고난과 핍박은 호남의 고난과 핍박이 됐다. 1973년 8월 일본으로 망명한 김대중이 도쿄의 한 호텔에서 괴한에게 납치됐다가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기적적으로 생환(生還)했어도 호남은 맘놓고 기뻐할 수 없었다. 아니 기뻐할 여력조차 없었다.

박정희가 개발독재의 세례를 '중화학공업 진흥'이라는 슬로건에 맞춰 영남에 퍼붓고 있는 동안 해방 직후 부산·인천과 더불어 3대 개항도시였던 목포는 인구 20만 안팎(1977년 기준)의 지방 소도시로 추락하고 말았다.

해방 직후인 1946년 당시 목포의 인구가 12만 명으로 가장 큰 지역현안이 인구급증으로 인한 주택문제였음을 감안한다면 인구 20만의 목포는 약 30년 동안 도시로서 성장을 억제 당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대중이 정치적 박해를 받는 동안 호남은 유형·무형의 경제적·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 복권 후 광주 망월묘역을 참배하며 흐느끼고 있는 김대중
ⓒ djroad.com
'빨갱이 김대중'과 '폭도소굴 호남'

1980년 5월, 김대중과 호남은 유례없는 고통과 슬픔에 치를 떨어야 했다. 5월 17일 계엄령을 확대한 신군부는 김대중을 내란죄로 긴급체포하고 이에 항의하며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치던 광주시민 2000여 명을 학살했다.

김대중은 사형수가 되었고 광주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아울러 김대중은 '빨갱이'가 되었으며 광주와 호남은 '폭도의 소굴'이 되었다.

1982년 12월 김대중의 미국 망명을 허락해준 신군부는 1983년 프로야구를 창설하며 호남에게 흥을 내라고 요구했다. 호남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해태가 타이거즈 팀을 운영했다.

그 해태 타이거즈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광주 무등경기장에선 '목포의 눈물'이 울려 퍼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보해소주'에 몸을 내맡긴 관중들은 '광주의 한'으로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또 불렀다. 1980년대에 호남은 그랬다.

그리고 1987년부터 매번 선거마다 소위 '호남 몰표'가 쏟아져 나왔다. 김대중은 그 '호남 몰표'의 위력으로 최소한 제일 야당 총재라는 정치적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19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약 5년이 지난 2003년 2월 24일 호남은 지치고 쇠잔해진 김대중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는 민주주의와 나라의 발전, 그리고 조국통일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습니다. 다섯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수십 년을 망명과 연금, 감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치욕과 고통도 있었고, 수많은 유혹도 있었습니다.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저 역시 죽는 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저는 불의와 타협하는 것은 영원히 죽는 것이고, 죽더라도 타협을 거부하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사를 믿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역사는 결코 불의에게 편들지 않습니다. 역사를 믿는 사람에겐 패배가 없습니다.

일생동안, 특히 지난 5년 동안 저는 잠시도 쉴새없이 달려왔습니다. 이제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저의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민족과 국민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제 휴식이 필요하다'며 역사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김대중을 호남은 '짠하게('매우 안쓰럽고 불쌍하게'라는 의미의 전라도 사투리) 응시하고 있다.

▲ 2월 24일 동교동 사저로 돌아온 김대중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보수언론 왜곡된 시각 때문에 공(功)도 인정 못 받고 퇴임"

"자식들 때문에 문제도 있었지만 역사에 남을 큰 일을 많이 했는데 국민들이 제대로 평가해주는 것 같지 않아 아쉬움이 남습니다. 호남의 중심인물이 없어졌다는 허탈감도 들고요."

목포에 있는 신안군청에서 일하고 있는 김아무개(51·공무원)씨의 말이다. 김씨와 같은 정서를 광주에 사는 이창권(39)씨의 소회에서도 느낄 수 있다.

"훌륭한 분이었는데 보수언론의 왜곡된 시각 때문에 공(功)도 인정 못 받고 퇴임하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그만한 인물을 우리 근현대사에서 찾기 힘들 겁니다."

이난(여·35·광주 동구 수기동)씨도 씁쓸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한마디로 DJ는 호남의 정신적 지주였지요. 국가와 역사의 장래를 위한 희망이었다고나 할까요. 임기 후반에 터진 각종 비리사건으로 실망도 하고 외면도 했지만 적어도 햇볕정책 만큼은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받았잖아요. 지금 언론을 보면 DJ를 문제있는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를 하고 있는데 DJ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역사가 다시 하리라고 봐요."

박광우 참여자치21 사무처장은 "호남에서 DJ는 애증(愛憎)이었다"고 말한다. 아울러 그는 이렇게 진단한다.

"지역민들에겐 DJ가 여러 가지 성과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대통령으로 퇴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있겠지요. DJ는 적어도 호남에서 희망이었고 버팀목이었으니까요. 호남이 차별을 받고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해줄 정치적 대안으로 DJ를 지목했기 때문에 전폭적으로 지지를 보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97년 정권교체가 됐을 때 호남은 DJ에게 위임했던 정치적 위임권을 돌려 받고 싶었는데 DJ는 그런 노력을 안했습니다. 물론 이 문제는 DJ탓도 있지만 지역역량의 한계란 측면도 있어요. 희망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대목이지요."

진한 아쉬움이 가득한 호남의 정서는 DJ의 퇴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아 있을까? 이창권씨는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한다.

"호남이 DJ에게 너무 큰 기대를 너무 막연하게 하다보니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DJ라는 막연한 환상은 잊혀질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보다 의외로 빨리 그리고 쉽게 지울 수 있어요."

"DJ이후 과제는 지역문제 스스로 풀지 못한 호남의 반성으로부터 출발"

그렇다면 DJ가 떠난 호남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 정찬영 조선이공대 교수는 "가신정치의 말로가 주는 정신적 공허함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DJ가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일반화시키고 한반도에서 평화를 거스르는 그 어떤 수구적 행태도 발현되지 않게 남북간 화해협력을 정착시킨 점은 높이 살만 하다. 그러나 DJ가 호남에 물려준 일당독재·가신정치의 유산은 청산되어 마땅한 분명한 잘못이다.

따라서 광주를 비롯한 호남은 DJ가 내준 마당에서 벌이던 정치잔치를 청산하고 지역민들이 스스로 나서는 참여잔치를 해야 한다. 그것은 결국 DJ의 유산을 발전적으로 이어받는 일이기도 하다."

정 교수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이난씨도 공감을 표시했다.

"시대변화에 맞게 새로운 정치적 흐름을 지역에서부터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기 위해선 제도도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사람부터 바꿔야 해요."

이난씨의 '사람부터 바꾸자'는 주장은 이창권의 '새로운 인물론'으로 조금 더 구체화된다.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기존 캐리어가 아니라 다양한 세력이 아래로부터 저변을 확대해서 발굴하고 키운 새로운 인물이 DJ이후의 호남 정치판을 이끌어가야 해요. 줄세우기로 큰 해바라기 정치인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크고 시민들이 사랑하는 그런 인물이 새시대에 맞는 새로운 인물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국민들 의식이 많이 높아졌기 때문에 내년 총선에 당장 실현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그 다음에 지방선거에선 희망을 가져도 된다고 봅니다."

이에 대해 박광우 처장은 '호남의 자성'부터 출발하자고 당부한다.

"DJ 이후의 과제는 새롭게 있다기보다는 지역문제를 스스로 풀어가지 못한 호남의 반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호남이 지역문제를 DJ를 통해 일거에 해결하기 위한 욕구가 몰표로 드러났지만 결국 지역문제를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잖습니까. 따라서 호남이 또다른 DJ를 만들어서 지역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지역역량과 지역일꾼을 만들어 지역문제는 지역이 책임지고 푼다는 지역 리더십과 지역 패러다임을 만들고 가져야 해요. 걸출한 인물을 기대하기보다는 호남 지역민 각자가 고민하고 실천하려는 자세가 필요한 때입니다."

약 40년 동안 DJ와 함께 고락을 함께 해온 호남이 DJ 이후에 어떤 지형을 그려갈지 주목된다. 그것은 순환하는 역사를 어떻게 응대하고 이어갈지를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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