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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역에서 내려 읍내로 들어가 맨 처음 만난 곳.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은행 ‘호서은행.' 1913년 창립돼 17년이란 짧은 기간만 이 땅에 그 이름을 남겼으나 순수한 예산 사람들만으로 은행을 만들어 오늘날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금융자본의 지방화를 앞서 실천한 한국 금융사의 자랑스런 흔적이 예산경찰서 앞에 있다.

호서은행은 대등한 조건으로 역시 민족자본에 의해 설립된‘조흥은행’과 합병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 현재 은행이 위치한 곳에 마련한 기념비가 있는 곳에는 조흥은행이 아닌 충청하나은행의 지점이 있어 씁쓸함만이 가득하다.

▲ 김정희가 어린시절 천자문을 배웠다는 추사고택
ⓒ 한혁승
읍내를 벗어나 군도 3호선을 타고 가다보면 나타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 ‘예당저수지’예산과 당진의 지명 앞 글자를 따 온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충남 최대 평야지대인 예당 평야의 젖줄로 면적 약 9.9㎢, 둘레 40㎞, 너비 2㎞, 길이 8㎞에 관개면적 약 7만8000㏊, 저수량이 4600만평에 달한다.

입춘을 지나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를 일주일 앞두자 예당저수지도 절기를 피하지는 못하나 보다. 2월이지만 제법 따뜻한 햇볕을 뚫고 겨우내 꽝꽝 얼었던 몸을 풀고 마구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붕어, 잉어, 가물치 등 묵직한 손맛을 즐기려는 낚시꾼들로 가득했던 날들을 기억하고 다시금 그네들을 맞이하려는지 예당저수지는 저수지 주변을 시작으로 하여 두터운 얼음 옷을 벗고 있는 것이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 서서히 드러나는 파란 물결은 햇살에 제 스스로를 금빛 단장하고, 다시 맞이한 물을 보고 어부는 낚시배를 시험해보면서 작은 파문을 만드는 풍경이 평화롭다. 실한 붕어 몇 놈 잡아 마늘이며 고추장, 고추, 파 등의 양념을 듬뿍 넣고 자글자글 소리나도록 찜을 만들면 소주 몇 병은 금방이고, 해장으로 국수며 쌀 수제비 등을 넣은 어죽을 먹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으리.

▲ 추사 김정희
ⓒ 한혁승
지금이야 평화고 안식이지만 예당저수지는 해마다 장마철이면 요주의 관리대상이다. 지난 95년 충남 전역에 내린 대홍수 때 예당저수지가 범람하여 예당평야는 물론 예산 전 지역이 완전히 물에 잠기는 일도 발생했던 적이 있다.

금강의 서북쪽을 지나는 금북 정맥에서 빠져 나온 용산 자락에 위치한 추사고택. 묵향을 맡으며 화선지에 사군자를 치는 것은 전설의 고향이고, 200원이면 살 수 있는 볼펜마저 마다한 채 전자파 새어나오는 자판기만 두들겨대는 요즘 사람들에게 ‘추사 김정희’는 서울 인사동이나 TV 감정 프로에서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면 과장일까.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343-1번지에 위치한 추사 고택은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한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추사가 태어난 곳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되새김질하지 않아도 고택은 건립되던 1700년대에 비해 19칸 이상의 건물이 사라졌으나 여전히 34칸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풍모를 자랑하고 있다.

굳이 서예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고 학자로서의 추사를 기념하지 않는다해도 건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곳을 찾으면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자연과 하나되는 건축물을 만날 수 있다.

▲ 추사가 청나라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천연기념물 제106호 백송
ⓒ 한혁승
옛 내음 가득한 이곳에서 추사는 필경 먹을 갈며 ‘하늘 천 따 지’를 배웠을 것이고, 고택 뒤로 우뚝 선 용산에 올라 그보다 더 멀리 솟은 팔봉산을 바라보며 자연을 가슴에 담았을 것이다.

추사가 청년시절 중국 연경을 방문했을 때 가져와 고조부의 묘 입구에 심었다는 백송은 우리나라에 몇 그루 없는 희귀종으로 고아한 자태를 세월의 거스림 속에서도 뽐내며 추사의 흔적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내 친구 중 하나는 노래방만 가면 부르는 십팔번이 있다. ‘1·4 후퇴 때 피난 내려와 내가 살던 곳…’가수 조영남이 부른‘내 고향 충청도’

친구는 딸만 둘인데 노래 가사 중 ‘내 아들과 내 아내와…’는 항상‘내 딸 둘과 내 아내와’로 바꾸어 부른다. 삽교읍의 삽교 중·고 앞에서 조영남이 직접 썼다는 내고향 충청도 중 ‘내 고향 삽교를 아시나요’삽다리 노래비를 보며 오래간만에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여유를 가져본다.

▲ 조영남이 직접 썼다는 삽다리 노래비
ⓒ 한혁승
노래 중에 나오는 ‘… 천안을 지나고 온양을 지나 수덕사 구경을 하시려거든’ 내려야한다는 삽다리를 지나면 덕산온천이 먼저 반긴다. 조영남은 온천을 싫어했었는가 보다. 황금빛 삽교 평야를 배경으로 몇 며칠 떠날 줄을 모르고 외다리로 풍경을 만들었던 학이 찾아냈다는 덕산 온천의 전설은 오늘날 이곳을 온천휴양지로 만든 것이다.

예산의 국도 변에는 많은 현수막이 보인다. 도청소재지 유치를 비롯, 과거 백제 문화권과 비교할만한 문화를 형성했던 내포문화의 중심지임을 알리는 문구가 특히 많이 눈에 띠었다.

내포(內浦)란‘안개’란 뜻으로 바닷물이 만나는 강을 통해 육지 깊숙이 들어온 곳을 말한다. 내포문화권은 예산 당진 홍성 태안 서산 보령 등 충남지역 6개 지역을 권역으로 하고 있으며 개발계획에 의해 덕산에 옛 보부상마을이 들어서게 된다. 옛빛 가득한 예산은 내포로 지금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 호서지방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 입구
ⓒ 한혁승
덕산 온천에서 5㎞를 가면 나타나는 산세는 낮으나 호서지방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 수덕사 입구에 내려앉은 작은 구릉의 덕숭산은 넘실대는 파도로 눈 흔들림을 자극하고 있다. 겨울이 다 갔는가보다. 산사에서 마른 풀냄새를 전해오는 바람이 두텁게 여민 옷깃을 풀어헤치게 만들고, 빛바랜 단청 아래 풍경소리는 겨우내 묵었던 때를 벗고 새롭게 다가올 봄을 맞이하라는 전령이 되어 불자가 아닌데도 저절로 합장하게 만든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개화기 최초의 여류문인이며 신여성운동의 선구자였던 일엽스님이 속세의 사랑에서 벗어나 홀연히 입산하던 일주문하 황하정루에서 차마 더 이상 발길을 옮기지 못했다. 차차 높아지며 수덕사 경내로 들어가는 길을 접어들면 다시는 속세로 돌아오지 못할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기우 때문이다.

"내포 문화권 개발로 옛 영광 되찾아야"
김문회 예산문화원 사무국장 인터뷰

▲ 김문희 예산문화원 사무국장
“내포 문화권의 중심지는 예산입니다. 내포문화 종합개발을 위해 덕산에 보부상 마을을 조성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보부상은 전국 어디나 있었지만 이 고장 출신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 추모단체인 월진회 회장으로 계시는 윤규상 선생이 과거 보부상 두목도 하셨습니다. 그분만큼 보부상 조직을 아는 사람이 드물고 그 외에도 몇 분 더 생존해 계시며 보부상 유품 전시관이 있는 곳도 현재 도내에서 예산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김문회 예산문화원 사무국장(사진)은 오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1300억원을 들여 덕산면에 보부상 마을이 들어설 수 밖에 없는 당위성과 함께 예산이 내포의 중심이 된 배경은 장항선 개통전만해도 내포지역 교통과 상업 중심지였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70년전에는 예산읍내와 가까운 무한천 철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예산읍 창소리에는 50년전만 해도 새우젓배, 소금배가 드나들었습니다. 이같은 영향으로 현재 조흥은행이나 지금은 없어졌지만 최초의 지방은행인 호서은행 등이 이 지역에서 탄생한 것 입니다”

김국장은 이와함께 “내포문화권 개발을 통해 다시 한번 예산이 상업 중심지로 태어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조흥은행은 몇 년전 예산에서 100주년 기념식도 가져 과거 예산에서의 은행 흔적을 발굴해 전달 의사를 밝혔는데도 별로 큰 관심을 안보이더군요”라면서 섭섭함을 드러냈다. / 이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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