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12월 18일 밤 10시 30분은 모든 국민에게 '이상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선거개시를 불과 7시간 30분 앞두고 정몽준씨가 노 후보와의 공조파기를 선언한 것이다. 수많은 유권자들은 대선에 미칠 영향에 관심을 기울이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으나 한결같이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권영길 후보는 정몽준 후보의 행위를 두고 '코미디'라고 단언했고 많은 사람들은 권 후보의 말에 동감했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조선일보는 1면 머리기사 <정몽준 "노지지 철회">에 이어 3면머리에서는 <노 "다음 대통령에 정동영·추미애도…" / 정 "배신과 변절 정치 반복돼선 안돼">로 제목을 뽑았다. 심지어 12월 19일자 사설에서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또 이 사태를 놓고 조선일보식 편집왜곡을 저질러 '차기 지도자'라는 말을 '차기 대통령감'으로 살짝 바꾸어 "이렇게 좋은 차기지도자들은 가진 국민들은 행복하고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혀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는 정몽준이 노무현을 '버렸다'고 표현해 '선데이 서울'식 저질 선동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지적이 많다. 정몽준과 노무현이 연애라도 한단 말인가. 국민의 일정한 지지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후보단일화와 그 파기문제가 누가 누구를 버리고 말고 할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조선일보의 속내는 곧 드러났다. 조선일보는 이 사태로 이회창이 당선될 것이라고 믿고 섣불리 "대선 판도가 180도 바뀌었다"고 주장해 그동안 자신들이 지지해오던 후보가 열세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시인하면서 이회창 당선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우리는 조선일보의 12월 19일자 사설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를 만장일치로 오늘의 나쁜보도로 선정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선거보도 감시위원회가 뽑은 나쁜보도 중 이 사설이 '으뜸'이라는 사실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사설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는 "투표를 7시간 앞둔 상황에서 정씨가 후보 단일화를 철회했다"며 "이로써 대선 정국은 180도 뒤집어졌다"고 단정하고 있다. 이어 사설은 "어쩔 수 없이 벌어진 급격한 상황 변화 앞에서 우리 유권자들의 선택은 자명하다. 지금까지의 판단기준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뒤집는 것이다"라며 유권자들의 표심향배를 돌리려는 꼬임수를 놓고 있다.

그리고 사설은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다. 이제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라고 은근짜를 놓으면서 "정몽준 후보도 노 후보를 버렸으니 유권자들도 버려야 한다"는 도식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내부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조선일보의 자유다. 그러나 특정후보 지지에도 최소한의 양식이 있어야 한다. 언론이라면 언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최소한의 '사실보도'와 '논평'은 해야한다. 최소한의 사실보도란 무엇인가.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 지지를 철회했다"이다. 그리고 "정몽준이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은 12월 18일 밤 10시 30분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또 하나의 사실이다. 그리고 "정몽준은 노후보의 대북대미관의 차이를 그 이유로 들었다"가 사실의 하나다.

그리고 좀 더 성실하게 취재한 다음 "속사정은 종로유세에서 나온 차기지도자 관련 발언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라고 보도하면 기본 사실은 다 드러난 셈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이러한 간단한 사실을 보도하면서도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앞서 지적했듯 '지도자'라는 단어를 '대통령'으로 바꿔치기 한 것이다.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으니 논평은 말할 것도 없이 '잘못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조선일보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공조파기를 선언한 정몽준의 문제점은 지적하지 않고 오직 모든 문제를 노 후보에게만 돌리는가. 어떻게 '정몽준이 버렸다'는 표현을 쓸 수 있으며, "그러니 유권자도 버리라"고 노골적으로 선동할 수 있단 말인가. 읽고 있는 눈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우리는 다시는 이와 같은 글을 '신문'이라는 명분으로 보고 싶지 않다. 편파왜곡에도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한다.

이하 사설 원문입니다.


[사설] 鄭夢準, 노무현을 버렸다

16대 대통령 선거의 코미디 대상(大賞)은 단연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다. 선거 운동 시작 직전, 동서고금을 통해 유례가 없는 여론조사로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선거운동 마감 하루 전까지 공동 유세를 펼치다가, 투표를 7시간 앞둔 상황에서 정씨가 후보 단일화를 철회했다. 이로써 대선 정국은 180도 뒤집어졌다.

이런 느닷없는 상황 변화 앞에 유권자들은 의아한 심정이지만, 따지고 보면 ‘노·정 후보 단일화’는 처음부터 성립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북한 문제와 한·미관계를 보는 시각부터, 지금의 경제상황과 사회적 문제를 보는 눈이 기본적으로 다른 두 후보가 단지 여론조사에서 우세한 사람을 단일후보로 뽑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투표 직전이긴 하지만, 정씨가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은 결국 이런 근본적 차이를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희극적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벌어진 급격한 상황 변화 앞에서 우리 유권자들의 선택은 자명하다. 지금까지의 판단 기준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뒤집는 것이다.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 20일 동안 모든 유세와 TV토론, 숱한 유권자들의 마음을 졸인 판세 및 지지도 변화 등 모든 상황은 노·정 후보 단일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이 같은 기본 구도가 변했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전국의 유권자들은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며 투표소로 향할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다. 이제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다.

덧붙이는 글 | '오늘의 나쁜 보도'는 미디어 국민연대 선거보도감시위원회 신문 일일논평팀의 모니터 결과를 토대로 선정한 것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국언론정보학회 회장, 한일장신대 교수, 전북민언련 공동대표, 민언련 공동대표,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 등 역임,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 리버럴아츠 미디어연구회 회장, MBC 저널리즘스쿨 강사,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강사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