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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탈북자 25명이 중국-마닐라를 거쳐 인천공항에 입국했다. 현재 국내에 거주중인 탈북자는 1800여명에 이르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근원적인 대책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탈북자들의 생활실태와 남한사회에 대한 그들의 시각의 한 단면을 파악하기 위해 현재 남쪽에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4년차 한 서울시민'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사회가 탈북자 문제를 해결하는데 하나의 단초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그가 쏟아낸 얘기 가운데는 극단적이고 또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은 물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남한사회를 바라보는 한 지식층 탈북자의 '의미있는 토로'라고 여겨 가감없이 싣기로 했다.<편집자 주>


'4년차 서울시민' 박상학(35)의 이력서를 보자.

양강도 혜산 출생.
김책공업대 무선공학과 졸업.
김일성사회주의노동자청년동맹(이하 사로청) 청년돌격대 선전지도원.
(남한) 통일정보신문 기자 역임
현 민국신문 기자.


1년6개월 전 한국에 들어온 박상학 기자. ⓒ 오마이뉴스 손병관
놀랄 것 없이 그는 가족들과 함께 1년 반 전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자이다. 휴전 이후 한국으로 넘어온 탈북자의 수는 1800여명에 이른다.

지난 주 주중스페인대사관을 통해 망명신청을 한 25명의 탈북자들도 이제 그 대열에 합류했고, 그들 뒤로 한국행을 기다리고 있는 재중 탈북자들의 수가 3만명에서 30만 명을 헤아린다.

탈북자 보호시설에서 1년만에 나온 박씨는 남한 생활 1년6개월 동안 KBS 1TV 일일연속극 '우리가 남인가요'에 탈북자 청년으로 나오는 탤런트 정은표 씨에게 북한 말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북한 관련 기사와 탈북자 소식을 주로 전하는 '통일정보신문' 기자로 활동했고, 얼마 전에는 IT정보지 '민국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수 성향의 한 월간지에서 일할 기회를 얻을 뻔했던 그는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는 남한 기자사회를 돌아보고, 입사를 포기했다고 한다.

북한식 생활방식에 젖어 있다가 뒤늦게 남조선의 시민이 된 탈북자 기자의 눈에 비친 남북한은 어떤 모습일까? '탈북자 기자'와의 만남은 지난 18일 오후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세종문화회관 뒷편 벤치에서 이뤄졌다.

당연히 첫 질문은 이날(18일) 마닐라에서 한국에 도착한 탈북자 25명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됐다. 기자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작년 6월 장길수 군 일가족 망명에 이어 왜 이번에도 주중한국대사관이 주역이 아닌, '조역'에 머물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그의 의견이었다.

"한국대사관에서는 원칙적으로 탈북자를 받아주지 않는다. 만약 받아준다고 소문이 나면, 매일 수천명의 탈북자들이 한꺼번에 대사관으로 몰릴 텐데, 한국대사관을 통한 한국행이 가능하겠는가? 한국대사관 주변에 항시 북한 요원들이 잠복해있고, 중국 공안들의 경비도 만만치 않아 개별적인 망명 시도는 거의 불가능하다."

"주중대사관 통한 망명 성사는 황장엽 케이스 밖에 없다"

- 국교 수립 이후 한국대사관을 통한 망명이 한 차례도 없었단 말인가?

"딱 한번, 97년의 황장엽, 김덕홍 씨가 성공했을 뿐이다. 그 당시에도 북한에서는 두 사람을 죽이려고 무장요원 수백 명이 한국대사관 앞에 진을 쳤다. 탈북자를 받아들일 경우 남북한과 중국과의 외교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부담도 한국대사관의 입지를 좁힌다.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안되지만, 국익을 놓고 보면 대사관의 처지를 이해한다.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본다. 특히 이 정부 하에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대신 한국대사관에까지 찾아가 망명신청한 사람들이 밖으로 나올 때는 대사관이 북한요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안전하게 내보내준다고 들었다. 내 아버님도 98년 두 차례 주중대사관에 찾아갔지만 받아주지 않아 가족들이 우회로를 통해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지난 주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으로의 망명을 시도한 탈북자들이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18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 YTN 촬영
기자는 문득 전에 진보적인 성향의 한 변호사가 해준 얘기가 생각났다. 그 변호사는 "탈북자 문제는 인도주의적으로 해결해야 하지만, 우리나라 형편에서 재중 탈북자들을 다 받아들이기 힘들다.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불법체류자로 간주하는 중국의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극히 현실적인 변호사의 입장을 전하자 박 기자는 약간 흥분했다.

"그건 완전히 김정일 논리다. 그 사람, '김정일 2중대'가 아니라 1중대다. 중국의 탈북자들은 언제 잡혀갈 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양심도 없는 사람이다. 3만이 아니라 30만 명이 돼도 그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 받아들이는 게 통일이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사회니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할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는 통일 못한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통일을 하는가?

한국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이미 수십 만 명 들어와서 불법취업으로 일하며 먹고살지 않는가? 3만, 아니 30만도 책임을 못지는데, 어떻게 2천만 북한 동포를 책임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것을 보면 당장 손해보면서도 20∼30년 후의 번영을 내다보는 독일인들이 우수하다."

- 북한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나? 이른바 '출신성분'은 좋았는가?
"북한에서 제일 출신성분이 좋은 게 '10가 대상'과 '11가 대상'이다. '10가 대상'은 김일성과 함께 항일투쟁을 한 혁명열사 가족들, '11가 대상'은 조국통일 사업에 투입됐다가 희생된 투사들의 가족들이다. 북한에서는 이들이 최고 핵심이다. 대학도 가고싶으면 가고, 당 간부로 키워진다.

우리 집은 아버님이 대남 공작사업을 했기 때문에 11가 대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명문인 김책공대에 진학했고, 군 복무도 교도(6개월 군사훈련)로 때울 수 있었고, 대학 졸업 후에는 노동당원도 쉽게 될 수 있었다. 특혜라면 분명 특혜였다."

- 왜 기득권을 포기하고 남한으로 왔는가?
"아버지가 공개적인 사업을 했는데, 남북한간에 대남, 대북 사업하는 사람들은 서로 연계도 있고, 안면도 있다. 96∼97년 북한 경제가 극도로 어려워지면서 대남 사업하던 사람들의 70%도 다 남한으로 넘어온 것으로 안다.

세월이 지나면 알려지겠지만, 90년대 후반 북한에서 보낸 상당수의 1급 공작원들도 남한으로 귀순한 것으로 안다. 아버지가 가족들을 설득하다가 먼저 98년 3월 귀순했고, 우리도 그해 10월경 아버지를 따라 북한을 나왔다. 아버지는 아직도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일본에 체류하고 있다. 얼마전 <월간조선>의 조갑제 편집장이 일본에서 우리 아버지를 만나기도 했다."

"북조선 요원이 이한영을 죽였다"?

- 아버지의 선택이 그 동안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는데, 탈북 당시 아버지의 뜻에 반대하지는 않았나?
"반대가 아니라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만약 북한을 혼자 탈출하면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연좌제로 함께 처벌될 운명이었다. '북한은 상호감시가 발달해서 부모나 자식이 서로를 고발해서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소설 같은 얘기다."

- 대남 사업에 종사한 아버지의 위치는?
"38호실(외화를 벌어서 공작 자금을 지원하는 대남 사업부서)에 있었다는 것 외에는 말할 수 없다."

- 아버지가 대남 사업에 종사했다면 고급정보도 많이 다뤘을 것 같은데.
"북한 고위층 사이에는 비공식적으로 김정일 일가의 동향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97년 아버지로부터 '북조선에서 대남 요원을 파견해서 남조선에 있는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

안기부가 했다면 어색하게 북한요원들이 쓰는 권총을 현장에 떨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권총을 현장에 놔둔 것은 '김정일에 대해 나불거리면 이렇게 된다'는 의지를 보여준 거다.

일부 사람들은 '그래서 안기부에서 한 짓 아니냐'고 생각하는데, 반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도 9.11 테러를 저지른 후 '내가 했소'라고 떠벌리지는 않았다."

- 성혜랑(이한영의 어머니)는 자서전 <등나무집>에서 "내 자식을 북한에서 죽였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는데.
"그 책을 봤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김정일이 이한영을 죽일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김정일이 제일 싫어하는 게 자신의 사적 문제라든가 집안의 비밀이다.

이런 걸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데, 하늘의 태양보다도 더 우러러봐야 할 사람의 사생활을 책으로 만들어 폭로했다는 것은 역적 중의 역적이 되는 것이다. 당시 안기부에서도 김정일을 자극할까봐 이한영에게 김정일의 사생활에 대한 얘기는 책에 쓰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이한영이 듣지 않았다.

안기부가 70∼80년대에도 체제 경쟁을 하면서 무리한 측면이 있지만, 90년대 들어서는 이 체제도 많이 민주화되면서 변하지 않았는가? <오마이뉴스>에서 1982년 제네바에서의 이한영 납치 의혹을 제기했다고 하는데, 납치가 실제로 일어났을 개연성은 있었다고 본다. 또 당시 분위기가 그랬다."

- 그렇다면, 수지 김 사건은 어떻게 보는가? 80년대 안기부 요원이 90년대까지 국정원에 죽 남아 사건을 줄곧 은폐했던 게 아닌가?
"자유 민주주의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언론의 자유가 너무 보장되다 보니 정부로서도 골치 아픈 일이 많다. 북한에서는 남한을 무조건 먹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따라서 안기부는 북한이 망하는 날까지는 무조건 존속해야 한다."

"서해 교전 같은 단호한 모습이 필요하다"

지난 1월의 한 토론회에 참석한 박상학 기자 ⓒ 오마이뉴스 손병관
- 지난 금요일 광화문 4거리에서 벌어진 '북파 공작원들'의 시위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위를 보며) 이 나라가 지나치게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익보다도 자기 이익을 앞세우는 집단이기주의다. 이 나라를 이끌었던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려고 그랬겠나? 너무나 많은 시위가 이뤄지는 것만으로도 이 나라가 대단한 나라다. 새세대들이 너무나 개인주의화 된 것도 문제가 많다."

요컨대, 이 정도의 자유를 누리는 과정에서 일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30년 이상 인권이 통제된 전체주의 국가에서 생활해온 그로서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인권을 누리는 것조차 '사치'로 보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부가 탈북자들의 인권을 억압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6일 탈북자동지회 창립 3돌 행사가 송파구 탈북자동지회 회관에서 있었다. 황장엽 씨도 왔기 때문에 KBS, SBS 등 방송국 기자들도 다 나왔다. 그런데, 국정원에서 취재를 막았다. 기자들이 국정원 직원들과 잠시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행사장으로 들어와 취재를 해갔는데, TV에서 방송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여기 언론도 한심하다. 탈북자는 누르면서 김정일은 어르기에 바쁘고, 뭘 어쩌자는 건가? 남한사회에 김정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야 북한도 우리를 함부로 못한다. 언론이 정세를 하도 혼란스럽게 보도해서 어떨 때는 나조차 무감각해지곤 한다."

- 김정일을 무시하고 통일을 할 수 있을까?
"무시하는 게 아니라 대북 대화의 원칙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폭력혁명을 신봉하는 무리들에게는 더 강한 몽둥이가 필요하다.

깡패에게 좋은 소리를 한다고 통하지 않는다. 자꾸 시비를 걸면 단호하게 싸울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 99년 서해교전에서 북한군을 해상에서 격퇴하는 등 우리도 강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그런 걸 해야한다. 비행기나 탱크로 밀고 들어가라는 게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 한번 했다고 그가 변했을까? 천만의 말씀, 김정일이 누가 남한방송 한번 들었다고 죽여버리고, 얼마나 악당인데….

북한 같은 수령 중심 체제에서는 자신에게 부정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큰 위기를 당한다. 북한에서는 형법이나 민법에 걸리면 형식상의 재판이라도 진행되지만 '당의 유일 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하 10대 원칙)'에 걸리면 재판도 없이 비밀리에 처형된다."

"평양만 둘러보고 북한 실상을 알았다고 할 수 있나?"

- '10대 원칙'의 위력이 그렇게도 대단한가?
"북한에는 노동당 규약이 있고, 사회주의 헌법도 있지만, 실제로 그런 건 다 껍데기이고 유명무실하다. '10대 원칙' 3조에 따르면, 당의 영도자이며 북한의 유일무이한 존재인 김일성의 말이 곧 법이며 생활의 지침이며 그 누구도 어겨서는 안된다.

그 어떤 열악한 조건에서도 그의 말은 그대로 행해져야 한다. 태평양 전쟁때 일본군이 천황의 말이라면 깜빡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게 수령체제이다. 북한의 변화 여부를 알고 싶으면 10대 원칙이 바뀌었는 지를 지켜봐야 한다. 10대 원칙을 모르고 북한을 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어떤 교수님과도 만나 얘기를 했는데, 도무지 얘기가 안 통했다. 북한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내놓은 책들도 대부분 공허한 내용들이다.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겠고…."

- 북한을 알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이번에 주중스페인대사관으로의 탈북자 망명을 주선한 독일인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 같은 사람이 북한을 제대로 알고 있다. 그는 벽지에까지 의료 지원활동을 해보고서야 북한의 실상을 알지 않았나?

북한을 여러 차례 구석구석 들여다 본 사람들이 역시 북한을 제대로 안다. 평양은 나라안의 나라다. 북한사람들도 제대로 못 들어가는 곳이 계획도시 평양인데, 마냥 좋은 데만 보여주는 대로 따라다녀서야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박정희의 업적, 높이 평가해야 한다"

- 아까 우리사회의 과도한 자유가 단점이라고 했는데, 북한에 비해 우리 사회의 장점은 무엇인가?
"거칠게 비교하면 북한은 결함이 70%, 긍정이 30%이고, 남한은 장점이 70%, 결함이 30%이다. 물론, 북한 체제라고 무작정 나쁘고 무작정 아무 것도 안되고 그런 사회는 아니다.

90년대 경제가 무너지기는 했지만, 그 전까지는 북한의 공교육이 현재 남한의 교육보다 나았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실패한 거지, 정신적으로는 아직 실패한 것은 아니다."

- 그렇다면, 남한사회의 좋은 점은?
"일단은 경제력이 있다는 것,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나라를 만들었다. 역대 대통령중 단연 최고다. 지금이야 그때와 다른 리더십이 필요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 시대의 역할을 했다고 본다.

배 곪아 쓰러지는데, 다른 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있나? 경제성장을 통해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 김일성이나 박정희나 똑같은 독재자인데, 너무 결과론적인 분석 아닌가?
"김일성이 선택을 잘못했다. 김일성이 시장경제와 계획경제중 후자를 선택했는데, 이게 성공할 수가 없었다. 시장경제는 개인의 창발성을 발휘할 수 있지만, 계획경제에서는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도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체제가 못된다. 체격이 큰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배급이 똑같으니 얼마나 웃기는 제도인가?"

- 그런 점 때문에 자본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북한 노동당에 비판적인 정치세력(사회당)이 우리나라에 있다.
"그 사람들이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박정희에 대한 그의 동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30년간 세뇌 교육으로 마음속 깊이 자리했던 우상(수령체제)이 무너진 후 경배의 대상을 박정희로 바꾼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친일파들을 싸그리 처단했다"면서도 뒤늦게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친일파 청산 논의에 대해서는 "과거 문제를 지금 들춰서 좋을 게 뭐가 있냐"라는 입장을 취했다.

더 묻고싶은 것이 많았지만, 이 정도에서도 얘기를 정리해야 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에게 그동안 취재한 탈북자 사회의 현황을 물어봤다. 그리고, 그 자신은 행복할까?

"탈북자들이 요근래 늘긴 늘었다. 모임도 많아졌고, 백두한라회처럼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임도 있다. 그런데, 만나보면 예전에 내려온 사람들에 비해 정착지원금이 줄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부에서 김정일에게만 수천억 원의 남북협력기금을 주면서 우리는 홀대한다는 의견들도 많다.

실제로 그런 측면도 없지 않지만, 힘든 일을 안하고 집에서 놀면서 불평한다는 게 문제다. 내가 그 사람들 만나면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그런다. 북한, 중국에서 고생하던 시절 벌써 잊었냐고 다그친다."

탈북자 출신의 박 기자에게 남북을 모두 초월한, 전혀 새로운 시각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순한 흥미로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단지 책으로 접하거나 기껏해야 평양과 북한의 관광명소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 언론의 보도를 통해 들여다봤던 기자에게 북한을 직접 체험한 박씨의 '맨투맨 반공강연'은 새로운 지적 체험이었다.

그의 가치관은 분명 조선일보의 '보수우익' 논리에 근접해 있었다. 그 자신도 "내 생각이 이른바 보수우익의 논리와 가깝다면 가까울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날 만남은 개인의 사상을 재단하거나 단죄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에게 따라다니는 '탈북자'라는 꼬리표가 탈색될 즈음, 그가 좀더 다양한 남한사회의 단면들을 경험하고 나면 그는 좀더 진전된 답변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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