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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씨에게 "한국 요원들에 의해 납치당했다"고 진술한 이한영. 82년 한국에 들어온 후 성형수술까지 해 신원을 감춘 그는 96년 신원이 노출된 지 1년여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지난 1997년 2월 15일 귀가길에 괴한들로부터 총격을 받고 그로부터 열흘 뒤인 25일 사망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처조카' 이한영(당시 37세) 씨. 그가 지난 82년 한국으로 '귀순'하는 과정에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요원들의 납치, 회유공작이 있었다는 주장이 소설가 황석영(59)씨에 의해 최근 공식 제기됐다.

그 동안 이한영은 82년 9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대사관 직원을 만나 독일 프랑크푸르트,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국군의 날'인 10월1일 서울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황씨의 증언 이후 <오마이뉴스>는 10여일간에 걸쳐 이한영이 직접 쓴 자서전, 그의 어머니 성혜랑(66)의 자서전, 당시 국내언론의 보도내용, 그리고 한국 체류시절 가깝게 교류한 주변인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82년 이 씨의 '귀순' 당시의 상황을 정밀점검한 결과 이 씨의 '한국 귀순'은 다분히 타의로 이뤄진, 즉 '납치'쪽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결론내렸다.

<오마이뉴스>는 최근 논란이 됐던 '수지김 사건'처럼 안기부가 이 씨의 '귀순'을 왜곡, 날조해왔다면 이는 안기부가 도덕적, 법적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라고 보며, 동시에 선정적 보도로 결과적으로 그를 의문의 죽음으로 이끈 일부 언론의 보도태도에 대해서도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창립대회에 초청을 받아 참석한 소설가 황석영 씨는 언론보도의 피해사례를 소개하던 도중 "방북혐의로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1993년 여름 이한영 씨로부터 '강제로 납치돼 한국으로 오게 됐다'는 얘기를 직접 들었다"고 공개한 후 "이같은 얘기는 아직 공개석상에서는 한 번도 얘기해본 적이 없다"며 '이한영 납치설'을 공식 제기했다.

북한을 알기 위해 '자의로' 방북길을 떠났던 남한 작가와 북한 최고지도자의 인척으로 호사스런 생활을 하다가 '타의로' 남한에 오게 된 북한 '로열패밀리'의 극적인 만남은 93년 여름 서울 구치소에서 처음 이뤄졌다.

"그해 여름 구치소 독방에 있는데, 운동을 하러 가던 한 젊은 친구가 내 방 식구통을 열고 '황 선생님이십니까? 저도 북에서 왔는데, 황 선생님을 존경합니다'라고 말했다. 느닷없는 그의 말에 의아해서 내가 "당신, 귀순자냐?"고 물으니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돌아갔다"

황 씨는 이한영과 처음 만난 순간을 이렇게 떠올렸다.

나중에 운동시간에 다시 만난 젊은이는 "저는 이한영입니다. 김정일의 '처조카'이고, 김정일과 이모(성혜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김정남과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입니다"고 소개해 황 씨를 놀라게 했다.

당시까지 이한영의 존재는 일반에 알려지기 전이었는데, 그가 밝힌 '귀순 정황'은 황 씨를 더욱 놀라게 했다.

"82년 오스트리아 빈(실제로는 스위스 제네바)의 외국인 학교에 다녔는데, 그때 한창 전자오락 게임에 푹 빠져서 미국에 가고 싶었습니다. 경호원들에게 얘기해봐야 들어주지도 않을 것 같고... 학교 친구들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으니 친구들이 '남한대사관에 얘기하면 미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미국에 가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냐?'고 제네바 한국대표부에 전화를 걸었고,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누구를 만나서 차를 탄 기억은 나는데 그후 정신을 잃고 사흘 후에 깨어나 보니 한국이었습니다"


1월31일 '언론인권센터 창립대회'에 참석한 소설가 황석영 씨가 '이한영 납치설'을 제기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손병관
황 씨는 "이한영은 안가에 머물며 안기부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안가를 벗어난 뒤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한 것으로 보아 안기부에서 그를 지원해준 것 같았다. 모 방송국을 다니다가 그만둔 후 조합주택 사업을 하다가 사기죄로 감옥에 들어온 상황이었는데, 나에게 '한국요원들에게 납치돼서 여기까지 오게 됐으니 선생님이 기자를 불러주면 제가 납치된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황 씨는 "그렇게도 나가고 싶으면 자네를 담당했던 사람에게 밖에 있는 아내와 딸이 보고 싶으니 빨리 오라고 연락하라고 했는데, 그 같은 얘기를 나눈 지 일주일여만에 이한영은 구치소에서 모습을 감췄다"고 말했다.

황 씨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이한영의 인상은 그리 곱지는 않았다.
"구치소에서 없어지기 얼마 전 그가 '나가면 통일운동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길래 '자네는 절대 안돼. 그냥 생업에 종사하며 아내랑 조용히 살아. 이제 다시는 그런 얘기하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권유했다"

황 씨는 이한영의 소식을 3년 후 공주교도소에서 다시 듣게 됐다.
"96년 2월인가 3월인가 <월간조선>이 '이한영의 북한 가족들이 북한을 떠나 해외로 도피했다'고 보도해 난리가 아니더라. 경제적 어려움 속에도 씀씀이가 컸던 이한영이 돈을 벌어볼까 하고 <월간조선>과 접촉을 한 것 같다. <월간조선>은 이한영이 성혜랑과 전화하는 것을 녹음해서 테이프로 팔아먹기까지 했다. <월간조선> 보도가 나가고 신원이 노출돼서 이한영은 결국 목숨까지 잃게 됐다"

연설을 마친 황 씨는 기자에게 "이한영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의 한국행은 국제법 위반 아니냐?""내가 이런 얘기를 지금에서야 털어놓는 이유는, 언론이 더 이상 터부(금기)가 없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수지 김 사건을 봐라. 그 동안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억울한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이한영이 죽고 나서 그의 아내가 당시 '우리 남편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이 같은 남편의 기구한 운명을 빗대서 한 말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한영은 누구인가?

1981년 북한의 이한영 가족이 김정일 부자와 함께 찍은 기념 사진. 뒷줄 왼쪽 시계방향으로부터 이한영의 어머니 성혜랑, 여동생 남옥, 이한영(당시 리일남), 김정남, 김정일.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로 알려진 이한영(본명: 리일남)은 1960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이모 성혜림이 김정일의 동거녀였던 덕으로 북한 최고 교육기관인 만경대 혁명학원에 진학하고, 러시아 등 공산국가들은 물론, 서방 국가들도 자유롭게 여행하는 특권을 누렸다.

82년 '귀순' 후 이듬해까지 안기부의 조사를 받은 이한영은 본명을 버리고 '한국과 더불어 영원히 산다'는 뜻의 이름 '이한영'으로 개명하고 생일(4월2일)도 '귀순'한 9월28일로 호적을 바꿨다. 안기부는 이한영에게 아파트와 당시로는 거금인 1억원의 정착금을 지원했다.

1984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그는 방탕한 생활에 젖어들어 돈이 바닥났고, 급기야 그해 가을 '내가 그리던 자유는 이런 게 아니었다'는 유서를 써놓은 채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한영은 85년 안기부의 권유로 성형수술을 받았다. 얼굴까지 바꾼 그는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을 인정받아 87년 12월 KBS 사회교육방송 러시아어 담당 PD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대학 후배의 소개로 만난 CF모델 출신 김모(34)씨를 만나 88년 12월 결혼했고 90년 1월 딸을 낳기도 했다.

사업에 뜻이 많았던 이한영은 KBS를 나와 주택조합 건축에 손을 대 한때 24억원의 거금을 만지기도 했지만, 93년 3월 10억원대 횡령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1심에서 징역 3년을 받고 94년 2심에서 무죄로 석방된 그는 민사소송에서 패소, 방배동 집 등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94년 5월 분당으로 전세를 얻어 이사했다. 이후 약 1년간 부산에 내려가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무역을 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안기부마저 95년 10월 이한영에게 "우리는 할 일을 다했으니 더 이상 당신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통보, 이때부터 이한영은 각 언론사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증언 및 원고를 게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월간조선>과 접촉, 5백만원을 받아냈고, <동아일보>를 통해 자서전을 발간하기도 했다.

피살 전 이한영은 부인과 딸을 처가에 맡기고 친구 집과 호텔 등을 전전하며 오퍼상을 시작, 새로운 출발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이한영은 97년 2월15일 대학시절 지인 김모(49)씨의 성남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괴한 2명의 총격을 받고 열흘만에 사망했다. 이한영 피살 사건은 황장엽 당시 북한노동당 비서의 망명 사태 직후 일어나 '북한의 보복 테러'라는 설이 제기됐으나 진범이 붙잡히지 않아 사건 진상이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다.

이한영이 96년 여름 펴낸 자서전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의 표지. 자서전 출간문제로 안기부와 이한영은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됐다.
그 동안 알려진 바로는, 이한영은 '귀순'한 82년 9월 1년간의 프랑스어 연수를 위해 모스크바를 거쳐 스위스의 사이트 사운드(Sight Sound) 외국어 강습소에 입교했다. 제네바 레만호 부근 아파트에 여장을 푼 이한영이 미국여행을 수소문했으나 북한여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제네바 한국대표부로 전화를 걸었다는 것. 한국대표부 직원과 만난 이한영은 9월28일 승용차에 올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10월1일 서울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김정일의 '처조카'로, 호사스런 생활을 하던 그가 82년 돌연 '한국행'을 택한 배경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점이 제기되어 왔다. "납치돼 서울까지 왔다"는 그의 주장이 제3자의 입을 통해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가 자의로 한국행을 택한 것이 아니라는 정황은 이한영과 교류했던 취재기자의 전언에서도 확인된다.

이한영을 취재차 만났다가 나중에 친구처럼 어울렸다는 <월간중앙>의 윤석진 기자는 "이한영이 '납치된 것은 아니지만, 자의로 온 것도 아니다. 원래 가고 싶은 곳은 미국이었다'는 알쏭달쏭한 얘기를 했다"고 회고했다.

이한영 스스로도 96년 발간된 자서전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이하 대동강, 동아일보사)에 납치 가능성을 암시하는 표현들을 삽입했다.

"이것저것 따져보는 게 체질화된 지금 같았으면 그처럼 쉽게 전화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그처럼 간단하게 남조선대사관 사람과 만날 약속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게 말해서 순진한 청년의 철없는 행동이었고, 나쁘게 말한다면 아무 것도 모르는 천둥 벌거숭이가 미국 갈 욕심에 눈이 먼 상태였다"(대동강, p.236)

"남조선 제네바 대표부 대사라는 분과 인사했다. 이름을 얘기했지만, 기억에 없다. 키가 작고 마른 사람이었다. 대사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른다. 잘 선택했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최근 언론에 얘기했는데, 일부 언론이 그 말을 확대 해석, 내가 제네바대표부에서 한국망명을 얘기했다고 보도했다. 그것은 틀린 이야기다. 그때도 미국으로 가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처음 남조선 대사관에 전화할 때 미국 여행방법을 물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미국에 가봐서 좋으면 안 와야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대표부 안에서는 얘기가 좀 진전돼 미국으로 망명하고 싶다는 얘기까지 했다"(대동강, p.238∼239)

"도대체 망명작전이니 뭐니 하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기부 사람들과 사전 접촉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9월28일 아침 내가 갑자기 전화해서 시작된 일에 공작이란 말은 성립될 여지가 없었다"(대동강, p. 240∼241)

"나를 속여 남조선으로 데려온 황참사를 무척 원망했다"(대동강, p. 255)

"내가 서울에 있다는 것을 알면, 김정일이 납치해간 리일남을 내놓으라고 주장할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구치소 안에서는 그렇게 되길 원했다....그때 나는 납치당했다고 주장할 예정이었다. 내가 납치당했다고 하면 납치가 되는 상황이었다. 오게 된 과정이 애매하고, 서울에 온 후 공개하지 않은 것도 납치를 주장할 수 있는 조건이 됐다. 납치라고 끝까지 주장해서 북한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생각까지 하기도 했다"(대동강, p. 325)


그가 쓴 자서전에는 '납치설'을 뒷받침하는 내용보다는 "안기부의 꾐에 빠져 자의반 타의반 서울까지 오게 됐다"는 기조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한영이 '귀순' 정황을 전하는 데 있어 "당초 원하지 않았던 한국행을 택한 데에는 안기부와의 접선에 쉽게 응한 나 자신의 실수도 적지 않았다"는 자책론으로 상황을 정리했을 개연성도 없지 않다. 실제 이한영은 자서전을 집필하며 안기부와 사전조율을 거쳤고, 책 내용 때문에 안기부와 마찰을 겪기도 했다.

이한영의 자서전이 안기부의 영향력 아래 내용의 조율이 이뤄졌다면, 남북한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제3국에서 집필된 성혜랑의 자서전은 진실의 또 다른 단면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들이 죽은 지 약 3년 후 발간된 성혜랑의 자서전 '등나무집'은 아들의 실종을 접한 어머니의 당혹스러운 심경과 함께 '이한영 증발' 이후 그의 소재 파악에 동분서주했던 북한 외교가의 표정을 가감없이 담고 있다.

" '요렇게 빤한 길인데 나 혼자 가두 돼'
'괜찮겠니? 그럴까?'
나는 유치원 아이처럼 데리고 다닌다고 그 애 비위를 거슬릴 것 같아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여기는 손바닥처럼 좁은 도시이다. 자주 괴뢰대사관(한국) 외교단 차 26번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오주주했다"(등나무집, p. 434)

"장미공원 옆에 있는 말만 들었던 대사관을 찾아가 진충국 대사를 만나고 갈팡질팡 헤매는 사이 결과는 적의 납치라는 어마어마한 사고의 단정으로 육박하고 있었다"(등나무집, p. 436)

"나에게서 제일 풀리지 않는 의문은 그 애가 잡혀갔느냐 자의로 갔느냐였다. 제가 없어지면 엄마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 때문에 꼭 떠나야 했다면 후에라도 내가 안심할 수 있게 어느 구석에 쪽지라도 남겼을 것이고 어느 먼 곳에 갔더라도 전화를 걸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나는 문득 만약 그들이 데려갔다면 지금쯤(10월초) 남한대사관 황 서기관(그는 안기부로 알려져 있다)이 일남이를 데리고 서울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사람을 만나자고 제기해보라고 했다. 엄마로서의 직감이었다. 섬뜩하게도 황 서기관이 출장중이라고 한다.

'우리 일남이 데리고 서울 갔나봐요'
나는 사람들 앞에서 서슴없이 말했다...

(중략) 내 직감이 맞았다는 것이 13년 후 내 아들의 책에 고스란히 적혀있었다"(등나무집, p. 442)


성혜랑은 평양으로 돌아간 후에도 아들의 행방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이한영은 '귀순' 이후 해외출국 금지자 리스트에 올라 당초 바라던 미국행은 물론, 해외에서의 모자 상봉도 이뤄지지 못했다.

이들 모자는 타의에 의해 헤어진 지 14년만에 국제전화로나마 서로의 안부를 전할 수 있었지만, 97년 2월 이한영이 피살당한 후 재회는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성혜랑은 자서전에서 "통화 내용을 감청한 녹음테이프가 거침없이 남한 일간지에 공개된 것을 오랜 뒤에야 알게 됐다. 엄마와 아들의 정은 무참히 능욕당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라며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녹음해 판매한 월간조선의 안보상업주의를 통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이한영의 피격 사태를 다룬 97년2월16일자 <조선일보> 기사


성혜랑은 저서 후기에서 "내 아들의 죽음은 지금도 미해명"이라고 밝혔지만, 북한의 공작설에 대해서는 "어느 바보 공작원이 지도자의 생일 전날 그런 사건을 일으켜 '선물'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라고 강한 의구심을 제시했다.

97년 피격 사망한 이한영으로부터 93년 발언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한영이 남한에 거주하며 귀순 당시 정황을 알렸음직한 지인들도 더 이상 이한영의 죽음은 물론, '귀순'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피살 직전까지 이한영이 다녔던 분당 교회의 담임목사 김모(59)씨는 "(납치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본다. 그러나 오래된 얘기, 그것도 국가기밀에 관련된 얘기를 왜 지금에서야 끄집어내느냐?"고 되물었다. 이한영의 대학 시절 이웃이자 그가 죽기 전 몸을 의탁했던 한양대학교 직원 김모(49)씨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정색을 하면서도 "당시 언론 보도와 달리 이한영이 피살 전에 북한의 위협을 느끼고,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이한영의 죽음은 갑자기 찾아왔다"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이한영이 한국에서 결혼한 아내와 딸(13)은 서울 인근의 신도시에 은거하고 있고, 95년 모스크바에서 성혜랑을 상봉하기도 했던 외삼촌 성일기(69)도 현재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이다.

생전의 특수한 신분때문에 남북한 모두로부터 '뜨거운 감자'였던 이한영. 성혜랑이 '아들의 죽음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초고에는 쓰지 않았다가 부득부득 쓴 자서전 후기'는 이렇게 끝맺고 있다.

"나는 인터넷을 뒤져 내 아들의 현주소도 찾아놨다.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광주공원 묘지 이한영'

일남아, 좀더 기다려. 엄마가 너를 찾아가서 너의 집에 채송화를 잔뜩 뿌려주마. 너는 작고 미미한 것을 좋아했지, 다리 못쓰는 새끼 고양이라든가 귀뚜라미같은.

엄마는 다 안다, 다 기억한다. 네가 떠나기 전 내 옆에 앉아 석쉼한 음치로 부르던 '마음의 고향'....(중략)... 아, 나의 아들 내 나라는 얼마나 먼 곳에 있든가..."


오는 25일은 이한영 씨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지 5주년이 되는 날이다. 97년 당시 그의 죽음을 '북한 무장간첩단'의 소행으로 단정짓고, 수사를 마무리지은 수사당국의 판단은 너무 성급했던 것이 아닐까?

2002년 벽두에 제기되고 있는 '이한영 납치설'은 미제로 끝난 피살사건의 조사가 20년 전의 '석연치 않은 귀순 과정'에 대한 진상 규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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