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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은 '극우정객과 공산주의자 연합에 의한 반란'이라는 기존의 논리가 먹혀들지 않는 데다 여순사건이 장기화되자, 이번에는 반란의 주체세력을 '민간인 공산주의자'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민간인 주동설'을 유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형원 공보처차장이 총대를 멨다. 그는 일반 국민들이 여순사건을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민중이 여기에 호응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전남 현지에 있는 좌익분자들이 계획적·조직적으로 소련의 10월혁명 기념일을 계기로 일대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하고 그들이 일부 군대를 선동하여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서울신문 1948. 10. 29)

▲ 이승만은 어떤 외세와도 웃으며 손을 잡을 수 있었지만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자국의 일부 국민과는 절대 화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여순사건이 발생하던 1948년 10월 19일 일본을 방문해 맥아더의 영접을 받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그는 이날 일본 수상과도 만났다. 출전: <사진으로 본 광복 36년>

다시 말해 반란의 주체는 '14연대 장병'이 아니라 '민간좌익'이라는 것이 발표의 요지였는데, 이 발표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14연대 장병은 민간좌익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렇게 갑자기 정부가 입장을 선회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사편찬위원회의 김득중 편사연구사는 이렇게 분석했다.

"김형원의 발표는 정부 조직의 한 부분인 국군 내부로부터 반란이 처음 일어났다는 점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반란의 초기 주체가 국군임을 부정하고 그 책임을 민간인에게 떠넘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이 발표는 우익과 공산주의자들의 연합으로 사건이 발생했다는 정부의 초기 발표를 사실상 수정하고 사건의 주체를 민간인 공산주의자로, 14연대 군인은 이에 종속되는 지위로 파악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이 사건을 민간인 공산주의자 주동의 폭동으로 명백히 규정하면서 필연적으로 그 파장은 '북한 공산주의세력'으로까지 번져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국방부는 여수와 순천에 대한 진압을 완료한 이후인 11월 3일 '전국 동포에게 고함'이란 벽보를 전국에 살포했는데, 여기에는 "민족적 양심을 몰각한 공산도당의 조직과 명령을 통하여…대한민국 정부를 파괴", "소련제국주의의 태평양 진출정책을 대행하려는 공산당 괴뢰정권의 음모"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평화일보 1948. 11)

여순사건 당시 14연대를 배후에서 조종하거나 결탁한 세력이 '극우정객' → '현지좌익' → '북한세력'으로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거니와, 객관적 사실이 어떠했는가는 이승만 정권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당시 그들은 이런 사실을 확인할 여유나 의지를 갖고 있지 못했다.

여순사건의 주체세력을 '확인되지 않은 외부세력'으로 설정할 경우, 더욱이 그것이 '북한 공산주의세력'으로 상정될 경우, 여순지역 현지주민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진압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11월 4일 발표한 담화에서 '국부(國父)'로서의 자상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표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에 등장한 '지도자'라는 말이 백범 김구를 겨냥한 것임은 두번째 연재기사에서 밝힌 바 있다. 여기에다 '남녀아동까지 일일이 조사'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등등의 살벌한 단어에서 우리는 당시 이승만의 정신상태가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살기등등한 분위기 속에서 이른바 '민간인 주동설'과 '북한 사주설'은 여수와 순천에 대한 진압작전과 곧이어 벌어진 협력자 색출과정에서 현지 주민들에 대해 가해진 엄청난 희생을 정당화시켜준 요인으로 작용했다.

▲ "남녀아동까지 일일이 조사하고 모든 민중은 절대 복종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고압적인 담화 발표는 계엄군의 민간인에 대한 무분별한 진압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었다. 이승만의 담화를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에서 '숙청'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일제시대의 만주토벌을 연상케 한 초토화 작전과 협력자 색출은 14연대가 점령했을 때보다 더 큰 인적·물적 피해를 남겼다.

여순사건을 작품 초반부의 시대적 모티프로 삼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도 잘 묘사돼 있지만, 14연대가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지방좌익이 한 일은 그 동안 주민의 원성을 높이 샀던 친일경찰이나 우익인사를 선별하여 처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만큼 인적·물적 피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진압이 시작되기 전 김지회, 지창수 등이 이끄는 14연대 주력부대는 모두 여수와 순천을 빠져나가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도주해 입산한 뒤였다. 대오에서 낙오된 소수의 군인과 이 지역 좌익활동가들 그리고 분위기에 편승에 합류한 청년들만이 남아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진압군의 작전은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적으로 삼는 무차별적인 공격이었다. 이러한 과잉작전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수없이 죽어갔음은 물론이다.

오늘로부터 정확하게 53년 전인 1948년 10월 27일.

진압군은 육·해·공군을 동원해 여수를 사방에서 포위한 뒤 기관총을 난사하며 시내로 진격했다. 그들이 잔여세력을 제압한 뒤 제일 먼저 한 것은 '집 안에 있으면 모두 반란군으로 간주한다'고 경고하면서 전 시민들을 집 밖으로 몰아내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한 것이다. 군인들은 이 과정에서 집집에 들이닥쳐 방문을 덜컥 열면서 "손 들엇"하는 짧은 외침과 함께 싸늘한 총구를 선량한 시민들의 가슴에 들이대는 고압적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막무가내식 진압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조금이라도 반란군으로 의심되면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즉석에서 사살하였고, 약간의 반항이라도 하면 가차없이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나이 어린 한 학생의 손목을 잡고 냄새를 맡아보던 진압 군인이 화약냄새가 난다며 끌고가 죽인 일도 있었다. 그것이 진짜 화약냄새였는지, 아니면 잘못 맡은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반란군에 협조하지 않기 위해 집 안에 숨어 있던 우익단체 지도자나 우익 성향의 청년이 국군이 들어왔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환영하기 위해 집 밖으로 뛰쳐나가다가 반란군으로 오인되어 그 자리에서 사살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진압군은 순천(10월 23일)과 여수(10월 27일)에서 전 시민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몰아넣은 뒤 이른바 '부역자 심사'라는 것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칼-마이던스 기자가 목격했던 것처럼 '가장 무섭고 두려운 장면'이 속속 연출됐다.(첫번째 연재기사 참조)

이러한 풍경은 국내 기자들의 눈에도 그대로 목격됐다. 다음은 1947년 조선일보에 입사해서 이듬해 여순사건을 취재하고 나중에 편집국장까지 지낸 유건호의 저서 <전환기의 내막>에 나오는 대목이다.

"심사중인 그들 앞에는 경찰관에게 끌려나온 사람이 충혈된 눈으로 이 얼굴 저 얼굴을 번갈아 훑어보면서 누군가를 찾고 있고 웅크리고 앉아서 떨고 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그 시선을 피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얼굴을 들었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쳐서 '저놈이다' 손가락을 가리키기만 하면 끝장이 나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한 정황 파악도 제대로 못한 채 천신만고 사건 현장에 도착한 기자의 눈 앞에 전개된 첫 광경이었다.

읍민들이 수용되어 있는 북국민학교 교정 남쪽에서 탕, 탕, 탕 카빈 총소리가 들렸다. 언제 파놓았던 것인지 구덩이가 패어져 있는 앞에 손을 뒤로 결박당한 청년 5명이 서 있고 약 10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5명의 경찰관이 총격을 가했다. 제2탄, 제3탄이 계속 발사되었다. 이 총살형은 계엄사령관의 명에 의한 것이라고 했고,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부역자를 지목하는 일은 반란에서 살아남은 지역의 경찰, 우익인사, 우익단체 청년들이 맡았다. 그들이 가리킨 단 한 번의 손가락질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사를 갈랐다. 평소 민족청년단 지도자와 심한 언쟁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 억울하게 부역자로 지목된 사례도 있었다. 이때 생겨난 말이 바로 '손가락총'이다.

이 '손가락총'이라는 말은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연구원들이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전남동부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한 증언조사에서도 수시로 튀어나온다.

▲ 1948년 10월 27일 여수 서국민학교 교정. 여수시민들은 진압군의 명령에 따라 운동장에 모였다가 우익인사나 경찰의 '손가락총'에 따라 졸지에 '폭도'(오른쪽)와 '양민'(왼쪽)으로 구별됐다. 그동안 한국언론은 이 사진을 '공산폭도들을 피해 모여든 여수시민들의 모습'으로 설명해 왔다. 출전: 이경모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

한편 이렇게 '손가락총'으로 찍힌 사람은 학교 건물 뒤편 등에 마련된 즉결처분장으로 끌려가 개머리판, 참나무 몽둥이, 체인 등으로 맞아죽거나 곧바로 총살당했다. '백두산 호랑이'로 악명이 높던 김종원 대위는 일본도를 휘두르며 혐의자들을 즉결 참수하기도 했다. (그는 이후 한국전쟁 때도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다 구속됐는데, 이승만의 선처로 석방된 뒤 도리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살벌했는가는 1948년 당시 순천 갑구 국회의원 황두연, 순천지청 검사 박찬길, 여수여중 교장 송욱 등 이 지역의 사회지도급 인사들마저 반란의 '수괴'로 몰리어 총살당하거나 '빨갱이'로 몰렸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짐작된다.

우선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차석검사였던 박찬길 검사는 순천이 진압된 직후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엄격한 법의 기준에 따라 사건을 처리해서 올곧은 판사로 이름이 나 있던 그의 죄목은 반란군에 협조하여 인민재판에서 재판장을 담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혐의는 나중에 국회에서 근거 없이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다.

박찬길 검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된 까닭은 사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현지 경찰 등이 올린 조작된 정보 때문이었다.

당시 언론은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폭로하거나 막지 못했다. 도리어 언론은 한 나라의 국회의원까지 순식간에 '빨갱이'와 '반도'로 만들어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데 압장섰다. 당시 대표적인 극우언론 평화일보가 그 악역을 담당했다.

평화일보는 10월 30일 '순천반란지구 인민재판에 국회의원 황두연 배석판사로 활약'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현역 국회의원이 인민재판에 판사로 참가했다는 보도는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런 기사와 소문은 전후 사실에 대한 확인이 없이 조작된 기사였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야 김효석 내무부장관은 국회에서 황 의원이 인민재판에 배석했다는 것은 허위라고 인정했지만, 이 오보로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었던 황두연은 순천 진압 직후 다짜고짜 특별조사국에 끌려가 치욕적인 구타를 당해야 했다. 김득중 편사연구사는 제헌의회 국회속기록을 인용하여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황 의원이 인민재판에 참가했다는 평화일보 10월 30일자 기사는 이미 3일 전인 27일 순천에서 이지웅 기자가 보낸 것이었다. 양우정 사장은 '이런 악질행동을 한 자를 숙청하는 의미'로 대대적으로 보도하라고 지시했으나 황 의원의 아들 황현수가 회사를 직접 방문하여 사건을 부인했고, 국회 출입기자도 사실이 아니라고 하여 게재가 보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29일 중앙청 출입기자와 양우정 사장은 사실임이 틀림없다고 다시 주장하였고 사장은 황 의원에 대한 기사를 실을 것을 지시했다. 이와 같은 신문게재 경위는 배후에 깔린 정치적 목적을 의심하게 하였다. 더욱이 이 기사를 송고했던 이지웅 기자는 인민재판에서 석방된 어떤 시민한테서 황 의원 혐의사실을 들었을 뿐이고 다른 확인절차를 취했던 것도 아니었다."


참고로 이 사실을 처음 보도한 평화일보 양우정 사장은 이승만과 가까운 인사였다. 놀라운 것은 황 의원의 누명이 벗겨진 후에도 평화일보가 악의적 보도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1948년 10월 당시 평화일보의 모습에서 2001년 10월 조선일보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떠오르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 여순사건 당시 발행되던 세계일보 보도기사에 '여수반란의 총지휘자는 여수여중 송욱 교장?'이라는 제목이 보인다. 이승만 정권과 언론이 여순사건의 주체세력을 '극우정객'에서 '민간좌익'으로 바꾸면서 사건 초기에는 전혀 언급이 없던 송욱의 이름이 갑자기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수여중 송욱 교장은 사건 초기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다가 갑자기 반란의 총지휘자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여학교 교장이 반란의 수괴라는 내용은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도리어 이 점이 세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정부의 강경한 진압을 부추겼다.

송욱 교장이 여순사건의 민간인 수괴로 알려지게 된 것은 정일권 육군총참모부장의 10월 26일 발표를 통해서였다. 당시 국제신문, 조선일보, 세계일보, 민주일보, 동광신문 등 대다수 신문이 이 사실을 보도했으며, 이 사실은 지금도 국방부의 <한국전쟁사>에 '정사'로 기술돼 있다.

그러나 최근 그것은 잘못된 보도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송욱 교장은 좌익이 아니라 양심적 우익인사라는 것이다. 송 교장이 어떤 사람인가는 살벌한 계엄령하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취조를 받기 위해 군기대로 넘어갔을 때 여수의 각 학교와 학생단체에서 그의 석방을 탄원하는 진정서를 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던 우익인사였던 송욱 교장이 반란군 수괴로 잘못 알려진 것은 봉기군이 그의 대중적 인기를 이용하기 위해 강제로 인민대회 연사 명단에 이름을 집어넣은 사실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판단으로 보인다.

실제로 조선일보 1948년 11월 2일자 기사를 보더라도, 인민위원회가 조직되면서 '5명'의 의장단을 선출했다고 보도하고도 정작 의장단 명단에는 송욱을 포함해 '6명'의 이름을 소개하는 해프닝을 연출하고 있다. 이것은 계엄 당국이 송욱 교장을 봉기군의 수괴로 만들기 위해 그의 이름을 사후에 추가한 뒤 기자들에게 발표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결국 많은 사람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송욱 교장은 총살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48년 대한민국을 휩쓴 '인종청소'와 '마녀사냥'의 광풍에서 서북계의 대부인 고당 조만식의 제자이자 우익 성향인 송욱 교장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현직 국회의원, 검사, 교장까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빨갱이'로 몰리는 상황에서 힘없고 빽없는 일반 민초들의 희생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이런 엄청난 '인종청소'와 '마녀사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은 어떻게 건재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들에겐 '전가의 보도'와 '조자룡의 헌창'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이, 민간인에 대한 무리한 진압에 따른 비판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동원한 것은 바로 '냉전논리'였다.

우선 윤치영 내무부장관은 11월 8일 북한의 최소한 8개 도시에서 공산지배에 반대하는 광범한 폭동이 일어났으며 원산에서만 6천명이 학살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했다. 물론 국민들의 관심은 모두 그곳으로 쏠렸다.

그러나 이것 또한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었다. 당시 미군은 북한에서 소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규모의 조직된 저항이 있었다는 한국 정부의 발표에 대해서는 신뢰를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윤치영 장관의 '허황된 발표'는 남한의 여순사건이 가져올 신생정부의 위약성과 정통성 부재를 외부의 북한정권에 대항한 더 큰 규모의 반란에 관심을 돌리게 함으로써 문제를 회피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1948년판 북풍사건'이라 할 만 했거니와, 거의 모든 일간지가 이 사건을 일제히 1면 또는 사회면을 통해 대서특필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부와 언론의 여순사건 왜곡을 지켜보면서 김득중 편사연구사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여순사건의 많은 사실들은 과장되거나 은폐되고 근거없이 확대되면서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허위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신화가 되었다. 당시 신문은 기본적 사실확인도 없이 보도했고, 이후 관련 기록들은 한쪽의 일방적 시각 밑에서 서술되었다. 여순사건 연구가 먼저 사실에 대한 규명부터 출발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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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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