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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을 찌를 듯이 꼿꼿이 서 있는 창. 정문을 지나자마자 보이는 건 역시 '사월학생혁명기념탑'입니다. 때만 되면 화면과 사진에 어김없이 등장하여 4.19혁명의 상징처럼 머리 속에 각인된 조형물.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그 조형물이 친일 예술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4.19국립묘지에 오고 싶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오만한 돌덩이들에 가리워진 김주열 님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날씨탓인지, 정문 앞 광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킥 보드'를 타는 아이들, 유모차를 옆에 두고 벤치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젊은 부부, 경쾌한 웃음을 날리며 배드민턴을 치는 아주머니들, 지팡이를 짚고 걷는 할아버지, 그 옆을 속삭이듯 따르는 할머니. 모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곳을 찾았겠지요. 웬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광장을 지나 계단을 올라서자 구상 님의 진혼곡(鎭魂曲)이 보입니다.

손에 잡힐 듯한 봄 하늘에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이듯이
피 묻은 사연일랑 아랑곳 말고
형제들 넋이여 평안히 가오.

광풍(狂風)이 휘몰아치는 쑥대밭 위에
가슴마다 일렁이는 역정(逆情)의 파도
형제들이 틔워놓은 외가닥 길에
오늘도 자유(自由)의 상렬(喪列)이 꼬리를 물었오.

형제들이 뿌리고 간 목숨의 꽃씨야
우리가 기어이 가꾸어 피우고야 말리니
운명(運命)보다도 짙은 그 바람마저 버리고
어서 영원한 안식(安息)의 나래를 펴오.

형제들이 뿌리고 간 목숨의 꽃씨야
우리가 기꺼이 가꾸어 피우고야 말리


네모 반듯한 화강암에 검은 글씨로 또박 또박 적혀 있는 시. 이곳 국립묘지에는 열두 개의 시가 새겨져 있는 큼직한 돌이 중앙 잔디광장 양편으로 각각 세 개씩 자리잡고 있습니다. 모두 4.19혁명을 소재로 다룬 시들입니다. '수호 예찬의 비'. 그러나 이 역시도 친일 예술인이 자신의 작품에 지어준 이름이어서 그런지 뭔가 어색하기만 합니다.

수호 예찬의 비를 지나 얼마쯤 걸어 올라갔습니다. 아직은 앙상한 숲, 그 아래로 이백여 개의 묘비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묘비에 새겨진 모든 이름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 얼른 시선을 내렸습니다. 한성여자 중학교 진영숙 墓, 미아리 고개에서 총상 사망. 덕성여자 중학교 최신자 墓, 중앙청 앞에서 총상 사망... 그때의 아픔들이 가슴 속에 새겨지기 시작했습니다. 힘들게 한 걸음씩 옮기다 비로서 익숙한 이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김주열'이란 이름입니다.

1960년 3월15일 마산 시위. 실종된 지 28일만에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바다에 떠올랐던 당신. 우연히 그 처참한 사진을 보고 너무 놀라 책을 덮었던 아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답니다. 당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도 왜 이렇게도 당혹스러울까요. 다 잊은줄 알았던 옛사랑의 그림자가 책 속에서 튀어 나올 때의 놀라움. 그런건가요. 당신을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이 항상 바라보고 있는 저 상징탑. 그 앞에서 묵념하는 대통령의 얼굴로 당신의 사진을 대신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제서야 국립묘지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사월 학생 혁명탑으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사월 학생 혁명 기념탑문 일부)

친일의 손으로 지어진 탑에서 이 같은 글을 보게 되니 씁쓸했습니다. 원로 교수의 친일 행적을 들춰냈다는 이유로 사년째 학교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어느 미대교수의 얘기가 그제서야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탑문을 읽고 돌아서자 좌우로 또 다른 조각품들이 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 보기에는 어색한 얼굴의 남녀. 굳게 다문 입술, 풀어헤친 긴머리, 불끈 솟아 있는 근육. 그들의 손에는 긴 칼이 그리고 총이 각각 쥐어져 있습니다. '수호자상'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수호'하는 것인지 따져보고 싶어, 석상 아래쪽 푸른 동판에 새겨진 글을 읽었습니다.

4월 학생 혁명 기념탑을 세우며

여기는 1960년 4월 불의와 독재에 항쟁하다가 희생된 185명의 젊은 혼들을 모신 곳이다. 이들의 정신을 길이 받들고자 1962년 3월23일 재건국민운동본부 안에 각계 각층을 망라한 기념탑 건립 위원회를 구성하고, 1962년 11월 21일에 기공하여 전국민의 성금과 국고 보조로 이 공사를 진행하여 오늘로써 제막식을 거행하다.

설계 및 조각한 이 : 김경승 (1963. 9. 20)


어색한 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무엇을 위한 '건립'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4.19묘지를 조성하고 상징탑을 세운 것은 결국 불의와 독재를 희석시키기 위해서였나요? 그렇다면, 친일경력은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겠군요'. '그들만의 정의'는 총칼로 무장한 남녀의 호위를 받으며 몇 십년 동안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멍하니 우락부락한 석상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났습니다. 수녀님과 여섯 명의 아이들. '아이들 데리고 산보라도 나왔나 보다'하고 지나치려는데 조금 이상했습니다. 아이들을 멀리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쩔쩔 매는 수녀님, 그리고 어떻게든 품안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그들. 알고 보니 수녀님은 까리따스 어린이집에서 자폐아들을 돌보시는 분이었습니다.

정문을 향해 걷다가 뒤를 돌아봤습니다. 4월학생 혁명 기념탑 양쪽으로 '군상부조'라는 조각품이 길게 펼쳐져 있습니다. 날개 달린 여인이 피리를 불고,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의 손에는 나팔, 뿔고동, 기타까지 들려 있습니다. 민중들의 자유에 대한 염원 그리고 희망을 묘사했다는 친일예술인 김경승 님의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때문에 김주열 님의 묘가 보이지 않습니다. 185명의 젊은 혼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불의와 독재에 항쟁하다 희생된 영혼들이 불의와 독재를 위해 또 다시 희생된 곳. 친일, 불의, 독재.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한 모습으로 4.19국립묘지는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김주열(金朱烈, 1944-1960)
전북 남원 출생. 1960년 3월 15일, 마산상고 재학중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행방불명됬다. 한달여가 지난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시체로 떠올랐다. 경찰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시신에 돌을 매달아 은폐하려 하였으나 어느 낚시꾼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마산 시민 수만명이 거리로 나섰고, 국민적 분노는 곧 서울로 이어졌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그의 죽음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비해, 그에 대한 관심은 미약한 편이다.  

김경승(金景承, 1915-1992)
김경승은 형 金仁承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미술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일본내 유일한 미술학교였던 도쿄미술학교를 거친 그는 선전에서 관록을 쌓아 1943년 추천작가가 되었다.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의 약칭)은 3.1만세운동이후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인데, 심사위원이 주최측인 총독부가 위촉한 일본작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때문에, 선전에 출품된 조선인 작가들의 작품은 왜색(倭色)을 반영할 수 밖에 없었다. 김경승이 선전에 출품한 작품을 보면 강한 시국색(時局色)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일제침략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식량증산이나 근로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김경승은 또한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목적으로 탄생한 대표적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에서 간부로 활동했으며 이 단체는 후에 전람회를 열어 나온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기도 했다. 해방후 김경승은 친일미술가로 낙인 찍혀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이후 승승장구하여 국전 심사위원, 예술원 회원등을 거쳐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는 평통(平統)자문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문화 훈장을 받기도 했고, 3.1문화상까지 수상했다. 현재 4.19국립묘지에 있는 10개의 조형물가운데 5개가 김경승의 작품이며 이순신 장군,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안중근 의사등 애국선열의 동상의 제작을 도맡다시피 했다.

참고문헌 및 기사
한국 근대 미술, 윤범모 (한길아트, 1998)
뒤집어본 한국 미술, 이규일 (시공사, 1993)
친일파 99인, 반민족문제 연구소 (돌베개, 1993)
친일파(2), 김상웅, 정운현 (학민사, 1992)
미술과 함께 사회와 함께, 윤범모 (미진사, 1991)
대한매일 1999년 2월 22일자,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25회)
대한매일 1998년 8월 28일자, 3.1문화상과 황국 예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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