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모든 일이 그렇듯이, 글에도 때라는 게 있다. 시사에 관한 글은 더욱 그렇다. 이 글은 때를 놓쳤다. 장원 총선연대 전 공동대표의 성추행사건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시 글을 쓸 필요도 없다.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만 놓고 말하라면, 이 사건은 장원 씨의 계획적 범죄라고 할 수밖에 없다. 법률에 비춰봐도,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도 달리 할말이 없을 것이다. 만일 여기서 그가 더 말을 한다면, 심지어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는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더 깊게 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386술판 사건'은 그렇지 않다. 냉정하게 그들이 과연 무엇을 잘못했는가 따져봐야 한다. 우선 성스러운 5.18 전야에 술을 마신 것이 잘못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무죄다. 나는, 우리는 4.19가 되면, 5.16이 오면, 그리고 5.18이 되면 술을 마셨다.

어제, 5월 28일은 고 김태훈(1981년 서울대 도서관 5층에서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뛰어내린 김태훈을 기억하시는지)의 19주기였다. 그의 경제학과 동기였던 우리들은 그의 추모비 앞에 모여서 술을 마셨고 뭔가 아쉬운 사람들은 2차도 갔다. 그들이 잘못이라면, 이런 날만 되면 술을 마시는 우리 모두, 그리고 그렇게 만든 우리의 역사도 잘못이리라.

왜 하필 룸싸롱이냐고 묻는다면 답이 궁하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곳은 낯선 타지이고 부른 사람은 어쨌든 '대선배'이다. 휴대전화를 받고 이리저리 길을 물어 모여들었다. 술집 문을 들어서면서 이들은 썩 내키지 않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발길을 돌려 나가야 했을까? 물론 그랬다면 오죽 좋으랴. 우리는 삶이 매 순간마다 칼날 위에 서서 살지는 않는다. 대학 시절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의 상징이라고, 물론 건강에도 좋지 않다고 커피를 거부하던 친구도 지금은 커피를 마신다.

정치인이므로, 또 국민들의 기대를 받는 개혁세력이므로 그런 기준 위에 살아야 한다는 믿음은 그들의 정신건강을 과대평가하는 일일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그저 편하다고 자신의 단골술집으로 이들을 부른 김태홍 씨의 책임이 제일 크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왜 노래하고 술마시고 춤췄냐고? 신문의 선정적 보도대로 과연 '질펀'했는지 아닌지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또 '질펀'의 기준은 무엇인가? 더구나 선술집에서, 금남로 위에서 그랬다면 '질펀'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단지 장소의 문제라면 이미 대답이 되었을 것이다. 여자 종업원이 들락거렸는지, 앉아 있었는지, 같이 춤을 췄는지도 같은 문제이다. 사람의 서비스가 돈으로 거래되는 문제는 복잡하다. 자본주의 자체가 모든 걸 상품으로 만드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본주의에서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서비스 거래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룸싸롱의 서비스 거래에 그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만 한정하면 이들은 뭔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그런 책임은 앞으로 그런 서비스를 돈주고 사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부과되어야 한다.

이제는 정말 그들이 잘못한 것이 뭔가를 따질 때가 되었다. 만일 386그룹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이번 사건에서 그 그룹의 도덕성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한다. 임수경이라는 훌륭한 내부 고발자는 이 그룹의 도덕성을 지킨 파수꾼이며 칭찬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임수경 씨의 글을 지워서 문제를 덮으려고 했던 '제3의 힘' 홈페이지 관리자에게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정당한 내부 반성의 기회가 스캔들로 돌변해 버렸다. 또 문제의 386당선자들이 임수경 씨 개인의 감정 때문에 이런 일이 불거진 것처럼 은근히 내비치는 것이야말로 반성해야 한다.

내부 고발을 억누르는 집단은 백이면 백, 썩기 마련이다. 이 점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이른바 386에는 희망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일단 이들을 난도질한 다음에는 그래도 '너희가 우리의 희망'이라고 했다. 무엇에 대한 희망일까? 두말할 나위 없이 그들의 개혁의지이다.

그렇다면 이들에 대한 판단 기준은 그 무엇보다도 그들이 그러한 개혁의지를 실천에 옮기는가 여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그날 밤, 앞으로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로 세미나를 하기로 했다면 그걸 실천했어야 했다.

정말 제대로 토론을 했는가? 어떤 결론이 나왔는가?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술마신 것 자체가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개혁을 위해 하기로 했던 일을, 있는 힘껏 실천하지 않았다면 그건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그들은 더 많은 감시의 눈초리 아래 놓이게 되었다. 잘된 일이다. 노력만 하면 국민들이 다 알게 될 것이니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어디 있으랴.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건 이들이 그동안 별로 신선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공천과정이나 선거과정에서 그랬던 것은 일단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예컨대 이한동 씨의 총리지명을 이들 모두 찬성하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일까? 신문의 각 면이 어지러운데 그런 문제에 대해 이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들의 노랫소리가 아니라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