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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보다 적확한 글을 위해서, 기사에서 `장면`이라고 순화된 단어는 `쇼트`로 읽으시길 권합니다.
  2. 하는 과거를 계속해서 상기시킵니다. 말하자면 버드맨은 리건에게 가닿을 수 없는 욕망을 상징하죠. 물론 여기서 욕망은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라캉이 말한 욕망입니다. 제논의 역설 중에 화살이 결코 과녁에 가닿지 못하리란 것을 증명한 게 있죠. 라캉에게 있어 욕망이란 그런 것입니다. 결코 성취될 수 없는 것, 하지만 무엇보다 원하는 것. 리건에게 버드맨이란 존재는 오이디푸스적 욕망인거죠. 그리고 중간에 트위터나 페북 운운하는 장면에서 sns의 폐해를 떠올리신 분이 있을진 모르겠는데 과연 그럴까요. sns로서 존재하는 현대인들은 이상한걸까요. sns과도 같은 매개체는 존재의 기반입니다. 다만 그게 편지, 면대면 대화 혹은 전화, 가까이는 이메일에서 sns로 바뀐 것 뿐이죠. 문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3. 야기을 아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끔찍한 진실을 안 뒤 자살하지 않고 자기의 두 눈을 찌릅니다. 이후의 서사는 전적으로 예상치 못한, 이를테면 과잉 그 자체입니다. 찔린 눈이라는 상징 그 자체가 이후 서사를 규정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리건의 작살난 코는 오이디푸스의 찔린 눈알에 대응합니다. 그렇다면 영화의 후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작살난 코겠죠. 그리고 실제로 그 부분에선 코 그 자체만이 외설적으로 과잉되어 나타납니다. 이후 서사는 오로지 코를 위해 존재합니다. 보신 분들은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리건을 따라다니는 버드맨의 존재도 의미심장해요. 버드맨은 리건에게 위안임에 동시에 위협입니다. 버드맨은 리건에게 돌아갈 수 없는, 하지만 그 무엇보다 욕망
  4. 내내 부인하던 판타지`만`을 보여준다는거죠. 이건 무얼 의미할까요? 그리고 자세히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영화에서 유일하게 컷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리건이 자살기도를 하는 부분 이후죠. 그 전까지 거의 원테이크처럼 찍힌 영화는 그 이후 몇분 동안 떨어지는 운석, 공연장에서의 환상적 쇼트, 그리고 해안에 죽어있는 해파리 쇼트들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이후 다음 쇼트는 또 하나의 원테이크죠. 그러니까 영화는 저 짧은 쇼트들의 연결로 구성된 부분을 경계로 나뉜다고 볼 수가 있는 셈이죠. 후반부에서 리건은 죽지 않습니다. 리건이 죽었어야 영화는 깔끔하게, 완전무결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죠. 하지만 리건은 죽지 않습니다. 다만 코가 작살났을 따름이죠. 그건 또 무슨 의미일까요. 오이디푸스 이
  5. 이 기사에 미처 쓰진 못했지만, 은 정말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입니다. 댓글에나마 대충 적어보겠습니다. 영화에서 판타지적 요소들은 계속해서 제시됨과 동시에 부정됩니다. 말하자면 영화 속 판타지는 단지 리건 개인의 망상임이 드러나죠. 그런데 영화에서 유일하게 판타지 그 자체로서 나타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마지막 장면이죠. 기억이 안 나신다고요? 바로 사라진 리건을 찾아 창문 밖을 보다가 하늘을 바라보는 샘을 담은 장면입니다. 거기서 더이상 리건의 망상은 작동하지 못합니다. 거기서 리건은 아마도 죽었거나, 인간이 아니니까요(버드맨 그 자체가 되었다면요). 어쩌면 그 장면이야말로 영화에선 유일한 객관적, 혹은 또 다른 주관적 시선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유일한 그 객관적인 부분에서 영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