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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9일 저녁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9주년 기념 특별 강연회에서 '국민의 정부'의 업적과 역사적 성격에 대해 특강하고 있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9일 저녁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9주년 기념 특별 강연회에서 '국민의 정부'의 업적과 역사적 성격에 대해 특강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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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선언 이후 한반도는 열전과 냉전의 생채기를 씻고 모처럼 화평의 시대가 열렸다. 강만길은 남북정상회담 이후로도 북한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민화협과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북한 학자들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들과는 주로 역사 문제를 비롯하여 민족문제와 통일문제 등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와 관련한 사론(史論)도 많이 썼다. 우리나라에서 '사론'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인물은 강만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려운 문구와 새까맣게 주석이 달린 역사 논문은 내용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일반 독자는 접근하는 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강만길은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기에 누구나 부담 없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 때문이었을까. 그의 사론집은 출간될 때마다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더러는 큰 사랑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정조를 우리는 흔히 조선시대 호학 군주라 칭송한다. 그런 정조가 문체반정(그 정치적 의도는 접어두고), 즉 문풍 복고 운동을 일으켜 당시 유행하는 문체를 비판하고 고전적인 글쓰기를 강요했다. 그 뒤로 사대부들은 다시 역대 고문의 문체를 사용하고,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을 당연한 일인 것처럼 여겼다. 이런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지식인들의 전통과 문화가 그렇거나 말거나 강만길은 글을 쉽고 재미있게 썼다. 지식인이랍시고 철옹성처럼 지키는 인습은 따르지 않았다.

2001년에 취임했던 상지대학 총장은 2005년에 임기가 끝이 났다. 잘 몰랐던 학교였으나 이 학교의 운영을 정상화하고 학원을 민주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시간이었다.

총장직에서 물러나자 시간이 많아졌다. 글쓰기가 천직인 듯 신문과 잡지사에서 원고 청탁이 끊이질 않았다. 사유하는 시간도 많아지면서, 역사학도의 소명의식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더 깊이 고민할 수 있었다. "현실적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조명함으로써 독자들이 현실을 보는 눈과 역사를 보는 눈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창작과비평사, 2002)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듯이, 그가 역사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학에 들어가서 역사학을 전공한 지 올해로 꼭 50년이 되었다. 반백 년을 바쳐 공부한 역사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이 책에 실린 것과 같은 짧은 글로나마 생각을 정리해 본 일이 있다. 역사학자는 역사 철학자처럼 자기가 생각하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벅차다. 그 점에서 E. H. 카(E. H. Carr)는 뛰어난 역사학자요 역사철학자라고 생각한다. (주석 1)

이 책의 제목은 앞서 소개한 <내일을 여는 역사> 창간호에 썼던 '사론'의 제목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는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이 명제가 역사의 본질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다음 글에서 그의 역사철학을 엿볼 수 있다.

역사는 결코 저절로 성립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낱낱이 사건을 쌓아 둔 창고도 물론 아니다. 그리고 가치성과 방향성을 잃은 채 궤도 없이 흘러가는 것은 더욱 아니다. 역사에는 각 시대를 사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단순한 사건들과 역사는 엄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주석 2)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는 4부로 나누어 총 20편의 글을 담았다. 사론들과 함께 인물론도 5편이 실려 있다. <조선혁명간부학교와 육사 이활>, <윤세주와 조선민족혁명당>, <심산 김창숙의 해방 후 정치활동>, <김구는 왜 지금 더 크게 살까>, <장준하의 민주·민족운동> 등이다. 그중 '김구'가 존경받는 이유를 정리한 이야기를 함께 들어 보자.

일제강점시대와 '해방공간'을 통해서 백범이 우리 역사 위에 남긴 발자취를 정리해 보면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도 시세의 흐름에 적응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고집스럽게 사수해 온 일이고, 다른 하나는 우익전선의 한가운데 우뚝 섰으면서도 필요할 때마다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을 펼친 점이다.

백범이 존경받는 일반적인 이유는 앞에서 든 첫째 이유 즉 만난을 무릅쓰고 임시정부를 사수한 고집과 애국심에 더 있는 것 같지만, 민족분단시대가 반세기 이상 지속되고 이제 겨우 평화통일이 전망되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일제강점시대의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펼친 좌우합작 민족통일전선운동과 '해방공간'에서 추진한 통일 민족국가 수립운동, 즉 남북협상에 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석 3)

강만길은 '분단시대'의 명명자로서 분단시대 이후 역사를 줄기차게 탐구했다.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제1부의 사론 중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후의 역사인식>에서 그 탐구의 궤적을 찾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더 요약해 보면,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이후의 역사인식>은 우선 식민지시대의 민족해방운동사 전체가 우익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운동으로 양립되어 따로따로 엮이거나, 20년대까지의 운동사가 민족개량주의운동 및 공산주의운동과 신간회운동으로 대표되는 좌우합동전선운동의 계기적 발전으로 설명된 후, 30년대 이후의 운동이 통일전선운동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채 좌익계 운동만으로 혹은 우익계 운동만으로 설명되는 일에 불만을 가지면서 30년대 이후의 민족해방운동을 통일전선운동 중심으로 엮어야 하며 그 운동의 추진과정과 이론적 발전과정의 추적을 통해 '분단극복 역사학'의 줄기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주석 4) 

그의 '분단극복 역사학'은 <통일은 왜 해야 하는가>라는 글에서 더 강조되고 그 지평을 한반도가 아닌 전 세계로 넓혀 나간다.

핏줄을 같이하는 동족이며 긴 역사를 통해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으니까 앞으로도 한 국가를 이루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물론 중요하다. 또 분단비용이 많이 들고 그 밖에도 현실적 불이익이 너무 크다는 사실도 통일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통일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뿐이라면 이제는 절실성이 떨어진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제국주의 피해를 입은 민족사회라 해도 21세기는 제국주의가 아닌 평화주의를 바탕으로 역사인식을 하는 한, 제 민족문제에만 한정되는 시대가 아니다. 동아시아 전체, 나아가서 세계 속에서 책임감 있는 구성원이 되어 떳떳하게 살기 위해서는 제 민족문제 중 지역평화 및 세계평화에 역행하는 문제부터 먼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반도 주민들이 가능한 한 평화통일을 이루어야 할 절실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하겠다. (주석 5)

고정휴 교수는 <우리 시대 진보적 이상주의자의 역사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쓴 해제에서 강만길의 관심은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라고 논평한다.

강만길은 진보적인 이상주의자이다. 그는 과거를 탐구하는 국가·민족 그리고 세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있는 듯하다. 그는 아무리 현실이 암담해도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왜? "역사는 기어이 변하기 때문이다." 유신체제와 신군부 독재의 암울했던 시기에 그를 지탱해 준 것은 역사에는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고 또 지그재그식 행로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보다 나은 그리고 밝은 세계로 나아간다는 진보에 대한 한없는 믿음이었다. (주석 6)


주석
1> 강만길, <책을 내면서>,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 창비, 2018.
2> 위와 같음.
3> 위의 책, 248쪽.
4> 위의 책, 77쪽.
5> 위의 책, 111쪽.
6> 위의 책, 뒤표지.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강만길평전, #강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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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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