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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간의 다툼이 일어나서 학교에 찾아오거나 전화로 연락한 부모가 하는 말 중에 자주 듣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입니다. 자녀가 일으킨 일이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어서 충격이 컸을 테고, 집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잘못을 학교에서 저질렀다니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잘못을 저지른 이는 다른 학생이거나 교사가 잘못 판단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왜 이렇게 반응할까요? 그것은 자녀를 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장기의 학생들은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어떤 학생은 집에서는 부모의 말을 잘 듣고 고분고분하지만, 학교에서는 거친 언행을 일삼기도 합니다. 집에서는 교복을 곱게 입고 나오지만, 학교에서 와서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화장을 짙게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그 반대로 하지요. 또 선생님 앞에서는 고운 말을 쓰고 공손하던 학생이 친구들과는 욕도 내뱉으면서 다소 거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니까요.

페르소나(persona)는 이 시기의 학생들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학생이 날마다 연극을 하면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배역을 찾는 중이라면 말이죠. 상대 배역이나 상황에 따라 가면을 쓰고 나타나니, 우리 앞에 보이는 모습이 다양할 것이고, 부모는 자녀가 집에서는 쓰지 않던, 낯선 가면을 쓴 자녀가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죠.

어른들은 자녀나 학생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것을 요구합니다. 마치 당신들은 청소년 시기에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살았던 것처럼 말이죠. '어떻게 학생이 공부를 안 할 수 있어? 도대체 무슨 걱정이 있다고 그 모양이냐?' 하는 식의 말에는 '나는 그러지 않았다'라는 생각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다행입니다. 어른들은 여러 경험을 하는 동안에 오류를 바로잡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 덕분에 나름대로 삶의 지혜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질서 없이 사는 듯한 자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무랍니다. 때로는 저렇게 살다가는 험한 세상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심한 꾸중도 하게 되지요. 그러나 우리도 자랄 때는 좌충우돌하면서 성장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른들의 충고를 곱게 듣지 않고 반항하고, 방황도 하다가 되돌아오기를 거듭하면서 말이죠.

'절대 그럴 리가 없다'에서 '그럴 수 있다'라는 것으로 바꾸면 자녀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꾸짖어 다스려야 할 대상에서 함께 고민하고 더 나은 쪽을 찾을 대화 상대로 바뀌게 되지요. 꾸중할 자녀와 사는 것보다 의논할 자녀와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겠지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면 일어난 사태 앞에서 헤어나지 못하지만,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상황을 빨리 인정할 때 해결 방안도 빨리 찾을 테니까요. 이제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그래, '너도 그럴 수 있어.'

덧붙이는 글 | 경남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자녀, #교육,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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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책을 읽는 일을 버릇으로 만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돕도록 애써 살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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