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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고경남씨는 상급종합병원에서 소아암을 진료하고 있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전공의 집단행동이 이어지고 있는 지난 3월 27일 대구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 관계자가 이동하고 있다.
 전공의 집단행동이 이어지고 있는 지난 3월 27일 대구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 관계자가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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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의정 갈등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보건의료위기 '심각' 단계의 중앙대책본부를 책임지고 있는 총리는 이미 사의를 표했다. 정부와 대통령실도 총선 이후 재정비와 수습에 바쁜 상황이다. 그러나, 의료 공백은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환자들의 불편은 더 커질 수밖에 없고, 대학병원의 위기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전공의 수련 과정과 의대 학사 과정이 1년 동안 단절될 위기에 처해있다. 이를 막을 골든 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해결하려 해도 되돌릴 수가 없다. 지금 당장 출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2000명의 과학

정부는 2000명이 과학적,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미래 수요 예측은 넓은 오차 범위를 갖는 통계적 추론의 영역이지, 하나의 정답을 구하는 방정식이 아니다. 의료 수요 예측에는 다양한 변수가 있고, 증원의 규모나 속도에도 여러 가능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현재의 의대 교육과 병원 수련 환경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이처럼 급진적인 증원 규모가 과학적인 숫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정부는 2000명이라는 숫자에 매몰되지 않겠다며 의료계에 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를 가져오라고 한다. 그러나, 정부가 제시한 2000명 증원의 근거로 내세운 보고서의 연구자들조차 2000명 증원에 동의하지 않는 상황이다. 따라서, 오히려 정부 주장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평행선을 그리는 가운데, 정부가 그나마 논의의 여지를 최소한으로 열었다고는 하나, 정상적인 논의를 하기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대학별 정원 배정 역시 합리적인 기준 없어

2000명은 현재 의대 정원의 65%에 해당하는 파격적인 수치이다. 게다가, 추가 정원이 모두 지방에 배정됐기 때문에 각 대학의 증원 규모는 파격 그 이상이다. 충북대는 무려 4배, 다른 지방 대학들도 대부분 2-3배 증원되었다. 이렇다 보니 충청/대전 지역의 의대 정원이 서울 전체 의대 정원을 넘어서는 기형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당장, 초중고나 대학의 어떤 학과도 1년 만에 정원을 4배로 늘려서 정상적인 교육이 가능할지를 생각해 보자. 이 지점에서 정부의 증원 결정이 과학적, 합리적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을 잃는다. 

게다가, 거점 국립대 의대 정원을 200명으로 '기계적으로' 통일한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정원이 49명인 충북대는 151명이 늘어서 200명이 되고, 부산대는 125명에서 75명이 늘어 200명, 전북대는 142명에서 58명이 늘어서 200명이 되는 식이다. 각 대학의 기존 규모, 지역 인구, 부속병원 규모가 다 다른데 정원을 모두 200명으로 맞춘 것을 과학적,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증원 규모뿐만 아니라, 대학별 정원 배정 과정 역시 합리적인 기준 없이 성급하게 이루어졌다고 밖에 볼 수 없다.  

9전 9패의 왜곡된 신화

대통령 담화와 여러 언론에서 언급된 '역대 정부가 의료계에 9전 9패'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많은 의사들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어느 순간 언론에 갑자기 9전 9패라는 말이 등장할 뿐, 검색을 해 봐도 그 실체를 찾을 수가 없다. 의료계가 대규모 집단행동으로 정부와 갈등을 빚었던 건 2000년과 2020년 두 차례였으며, 특히 2000년에는 정부가 계획대로 의약분업을 시행하여 의지를 관철시켰었다. 오히려 의료계에서 반대했던 여러 제도들이 정부의 의지대로 시행된 적도 많았고, 그중에는 부작용만 남긴 채 사라진 의학전문대학원 제도, 폐교된 서남의대와 같은 부실의대 문제가 있다.  

'9전 9패'의 근거를 찾기도 어렵지만, 이번 사태에서 더 큰 문제는 정부가 이를 의료계와의 싸움으로 설정한 데 있다. 정부 관료들은 의대 정원 문제를 두고 흥정하듯 굴복하지 않겠다고 한다.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전문가들과 협의하는 것을 흥정이나 굴복이라고 폄훼한다면 정책 추진 과정에서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에 대해 이해당사자, 전문가, 심지어 야당과 협의하는 것은 일반적인 절차이며, 필요하다면 이미 결정된 정책도 보완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흥정이나 굴복으로 치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정부가 의대 정원 문제를 의사들과의 싸움으로 설정하는 순간, 정부와 의료계는 합리적인 논의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비로소 공론의 장으로 나온 의대 증원 문제

정부가 의료계와 충분한 대화를 했다고 언급한 37번의 회의 내용 역시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28차례의 의료현안협의체에서 의대 정원에 대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보도가 있을 뿐이다. 복지부는 작년부터 500명, 1000명 등 의대 정원에 대한 언론 보도가 나올 때마다, '정해진 바 없다'는 말만 반복했으며, 의대 정원과 관련된 제대로 된 공청회도 개최하지 않았다.

이제서야 의대 정원 논의가 공론의 장으로 올라왔다. 이런 논의는 정책 결정 이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이루어졌어야 했으나, 안타깝게도 정부의 일방적인 발표 후에야 공론화되었다. 정책 발표 후에라도 정부와 의료계가 진작에 적극적인 논의를 시작했다면 좋았겠지만, 2000명이라는 자물쇠 때문에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이제 몇 주 안에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공통점을 찾고, 차이점은 일단 미뤄둬야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서 전공의 1,300여명이 참여한 '정책피해 전공의,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 직권남용 및 권리행사방해 혐의 집단고소 기자회견’이 열렸다. 정근영 분당차병원 전공의대표가 입장문 발표 후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하고 있다.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서 전공의 1,300여명이 참여한 '정책피해 전공의,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 직권남용 및 권리행사방해 혐의 집단고소 기자회견’이 열렸다. 정근영 분당차병원 전공의대표가 입장문 발표 후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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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공통점을 찾고, 차이점은 일단 미뤄두자는 얘기다. 정부와 의료계는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해결책에서는 이견이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서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에서 출발해서 의견이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 무리하게 봉합하기보다는 시간을 충분히 두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우선 급한 것은 정부와 의료계가 협의체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단시간 내에 합의점이 나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몇 주 안에 답이 나오기는 어렵다면, 증원 과정을 1년간 멈추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내년까지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걸, 유예나 재검토라고 부르기 어렵다면, 논의의 연장이라고 부르면 된다. 무엇이라고 부르든, 현재의 의료 붕괴를 막기 위해 촉박한 증원 절차를 멈추고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각 계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각종 데이터와 예측을 꼼꼼히 검토하여 보다 균형 있고 합리적인 결정을 도출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의료 상황에 다양한 문제점이 있지만, 이걸 당장 해결하기는 어렵다. 정교하게 수리해 나가지 않으면 현재의 모순이 더욱 악화될 것은 명백하다. 현재 대학병원과 의과대학이 겪고 있는 대혼란을 감수할 만큼 시급한 정책이 어디에 있는가. 정부도 이런 혼란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설마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도 감수하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이다. 만약 현재의 의료 붕괴를 예상하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방향을 바꾸기 위한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다.

파국을 피할 용기가 필요한 시점

현재 상황은 치킨게임과 같다.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어느 쪽의 말이 맞는지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결국 충돌하면 둘 다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의료계와 의학교육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정부가 바라는 의료개혁은 더 멀어질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의 재정과 노력도 의료붕괴 수습에 소모될 것이다. 그렇다면, 둘 다 멈추는 게 최선이다. 한쪽의 양보가 아니라, 양측 모두 같이 멈추고 한발씩 물러날 필요가 있다. 의료계와 정부가 의견이 다른 부분을 지금 해결할 수 없다면, 일단 공동의 목표에 합의하고, 내년까지 논의를 연장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시간이 정말 촉박하다. 전공의 수련 중단과 의대 학사 일정 파행으로 인해 전문의 및 신규 의사 배출이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다. 내년에는 3000명의 신규 의사와 3000명의 전문의가 배출되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의과대학에서는 한 학년에 8000명을 한꺼번에 가르쳐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올 수 있다. 대한민국 의료 역사에 없던 초유의 사태다. 

대학병원에 자주 가지 않는 일반 국민들은 체감하기 어렵겠지만, 교수로서 바라보는 지금의 대학병원 상황은 너무나 심각하다. 대학병원 진료 기능이 심각하게 위축되고 있고, 경영 상황은 파탄 직전이다. 이대로 가면 전공의들이 돌아올 병원 자체가 사라질 상황이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다양한 별칭이 생겼는데, 낙수과 교수나 카르텔로 불리거나, 착취의 중간관리자로 불리는 것은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중증 소아암 환자들을 돌보는 상황에서 의료붕괴의 증인이 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정부가 보건의료재난 경보를 '심각'으로 상향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이 재난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정부가 쥐고 있다. 지금대로 밀어붙인다면 우리 사회는 1년이 아니라, 수년간 상시 의료재난 '심각' 상태에 놓일 수 있다. 복지부와 교육부는 보건의료재난 상황과 의과대학의 유급 사태에 발이 묶일 수 밖에 없다. 대통령이 국정과제로 내세운 노동, 교육, 연금 3대 개혁의 주무 부서인 복지부와 교육부가 의료재난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면, 이는 국가 전체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이번 총선 결과가 오히려 정부에 약이 될 수 있다. 대통령에게는 기존 정책 방향을 다시 정비할 기회가 생겼다. 의대 증원 문제 역시 '몇 전 몇 패' 식의 싸움의 틀에서 벗어난다면 충분히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당장 정원을 2000명 늘리는 것만이 의료개혁이라는 조급증을 버린다면 얼마든지 합리적인 결정이 가능하다. 때로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 정부와 의료계가 고집스러운 파국을 피할 수 있는 용기를 선택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태그:#의정갈등, #의대증원, #의사증원, #의대정원, #의료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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